발언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고, 회사가 흑자를 냈니 적자를 냈니 이런 소리도 안하고, 장사가 잘되어도 상장된 회사가 아니니 어디 공개를 합니까. 회사가 잘되고 있는지 못되고 있는지 일하는 사람들도 알아야 하잖아요. 아이엠에프 때 다른 데는 어려웠잖아요. 여기 선박 입출항, 여기는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아이엠에프라는 외부의 핑계를 끌어와서 우리들 봉급을 깎은 거예요. 그때 깎인 임금 되돌리는데 십년이 걸렸어요. 회사가 정말 어려운데 임금을 더 내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야기를 안 한단 말이에요. 전부 일방적이에요.
사장이 취임식 하면 식사라도 같이 하고 유대 관계라도 있어야 하는데, 회식이라도 하면서 회사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이해를 해 달라, 그렇게라도 했으면 사람들 마음이 좀 풀릴 텐데 계속 너무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게 젤 마음에, 그래서 노조가 있어야 한다니까요. 마음대로 다 하니까, 잘못하면 쳐버리고, 여기 징계 한 두 번 안 먹은 사람들 거의 없어요. 숫자가 엄청 나게 많습니다.”
파업 십이 일째, 늦더위가 찾아 온 매암부두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농성 천막 아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던 예인선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나에게조차 강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파업이 열흘을 넘기면서 많은 언론사가 다녀갔지만 실컷 이야기를 다 듣고는 회사 측의 이야기만 보도를 다 해버린다면서 그간 받은 상처들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전날에 이은 두 번째의 방문이었던지라 지회장의 주선으로 몇 명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예인선과 예인선 노동자들 |
그들의 삶을 듣고 있노라면 오늘 이 순간, 이 파업 현장에 있기까지 그들은 늘 외로웠고 고단했고 가난했고 서러웠다. 바다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단지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어 선택한 연안부두의 뱃일은 가족들의 행복을 지키고 꾸려가기엔 너무나 위태로웠다. 아이 셋 낳도록, 아이가 태어나던 날에도 일하느라 한 번도 병원으로 달려가지 못했다는 선장, 오일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배에서 일했다던 항해사, 삼십 년 경력에 겨우 백이십오만 원의 급여를 받고 있는 갑판장. 늘 죽음과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에서 그들이 매일매일 부딪히는 일상들은 가만히 듣고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태도에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한 기관사는 자신이 정식 휴무로 쉬고 있는 날에 일어난 배의 고장으로 징계를 당했다고 한다.
“내가 감봉 먹었잖아요, 내가 휴무 때, 정식 휴무일인데 그날 배에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정비를 불량으로 했는지 그런 원인도 밝히지 못하면서 단지 기관장으로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거에요. 내가 감봉 육 개월 묵고, 삼 개월 묵고, 감봉 두 번 묵었잖아요. 감봉도, 내가 회사와 싸운 게, 육 개월 감봉이면 육 개월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 년 가까이 보너스를 까는 거예요. 왜 그러냐니까 회사 규정이 그렇다는 거라, 그런 게 어딨냐고 따져도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 버리는 거예요.”
예인선은 말 그대로 수출입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닿을 수 있도록 연안 가까이에서 배를 예인하는 역할을 하는 배이다. 앞뒤로 예인선 두 대가 나란히 예인할 배를 줄로 묶어서 항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출항할 때와 입항할 때 모두 이 예인선의 도움 없이는 바다로 나가지도 항구에 닿지도 못한다. 뱃일이라고 해도 주로 연안 바다에서 일하기 때문에 출퇴근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예인선을 선택한 이유다. 외항선을 십일 년 타고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부터 예인선을 타기 시작했다는 한 노동자는 단지 가족들과 함께 있기 위해 감수하고 살아야 할 게 너무 많다고 한다.
“이천 이년도에 포항에서 포항 예인선 타다가 이천 오년도 오월 오일에, 전날까지 포항에서 일하고, 포항에 사년 있었는데 포항이 억수로 악조건이거든요, 억수로 짜거든요. 도저히 생활이 안되는 거요, 울산이 월급이 조금 더 나와 가지고, 그런데 근무 시간은 포항보다 거의 두 배로 들고,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이천 육년도에 울산으로 왔죠. 그 전에는 외항선 항해사로 십일 년 탔고요.
마지막 외항선 탔을 때 연봉이 육천 오백, 외항선 타다가 배타기도 싫고 집사람이 애기도 가지고 결혼도 해야 되고, 집사람 임신했는데 놔두고 갈 수도 없는데, 그래서 연안에 여객선부터 이력서를 넣으니까 포항 예인선에서 제일 먼저 연락이 와가지고, 육상 생활, 그래도 예인선 일은 거의 육상 생활 아닙니까, 반반 육상 생활이죠. 배타는 직업 중에서 출퇴근 하는 데는 여기밖에 없으니까, 배운 건 이거밖에 없고. 예인선 타면서 벌어 놓은 것 다 까먹고, 배만 탔으니 아무 것도 모르고 세상 물정 모르고,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다 그래요. 국제 자격증 가지고 딴 데서 다 높은 임금 받던 사람들이 단지 하나, 출퇴근하고 가족들 같이 있고, 그거 하나에요.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 다 감수하고 사는 거에요.”
수산고를 나와 병역 특례로 국내선을 삼년 타고 계속 외항선을 탔다는 그는 망망대해에서 계속 배를 타야만 하는 생활이 싫어졌다고 한다. 스무 살 이후 줄곧 바다 위에서만 살았던 그. 전 날 밤, 파업 현장인 매암 부두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 위에 내린 어둠은 짙었다. 자동차 수출선인 카캐리어호가 화려한 불빛을 뿜으며 먼 바다를 향해 달려갔을 뿐, 정박해 놓은 스물 여섯 척의 예인선에는 불빛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직장 폐쇄라는 공고가 나붙은 예인선 주변을 민간 경비대들이 지키고 있었다. 예인선이 있는 바다를 등지고 그는 둑 건너 바다를 향해 낚싯대를 내리고 있었다. 스무 살 이후, 십일 년간 상선을 타며 대서양 바다 위에 떠 있었던 그에게 낚시는 배위에서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한 취미인 듯 했다.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만날 수 없었던 긴긴 날들, 육지 생활은 그에게 그리움이었고 긴 외로움과의 이별이었다. 그러나 고요했던 바다와는 달리 육지에서 살아가는 일은 각박했다.
“제가 일해서 받는 돈이,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돈, 내 느낌만으로도 내가 일한 것의 오분의 일도 못 받는 거죠. 명목상 법에 저촉되지 않는 최저수준이죠. 월 받는 임금이 세금 떼고 백팔십사,오만 원. 포항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작았고요. 저 같은 경우는 외항선 타면서 모은 돈으로 결혼하고 전세 자금 빼고 통장에 한 구천만 원이 있었거든요. 포항에서 사 년 지나니 통장에 이천만 원 밖에 안남더라고요, 그마저도 울산 오니까 바닥나더라고요. 한 달에 기본 사,오십만 원 적자가 나요. 제가 아들 둘을 키우거든요, 유치원 보내고 그러니 평균수입 백팔십사,오만 원으로는 한 달에 사,오십만 원 적자죠.”
비단 생계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한 달에 여덟, 아홉 번의 당직에다가 휴무자로 인한 결원이 생겼을 때 대체 근무, 그리고 파도가 세거나 태풍이라도 오는 날은 꼼짝없이 바다에서 배를 지키며 버텨야 하는 예인선 노동자들에게 가족들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냥 마음속의 간절한 소망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저같은 경우 울산 예인선 와서는 천육백 마력(엔진 파워)을 타는데, 그 배 탈 때 오일 만에 퇴근한 적이 두 번 있었어요. 출근해서 한사람 휴무 걸리고 야간 차례 걸리고, 선장, 항해사 두 사람이 나눠서 일을 해야 하는데 한사람이 휴무 걸리면 혼자 계속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인원이 대체를 못하니까요. 이 일은 기본 단순한 작업만 배우는 데도 삼 개월 걸리거든요, 제가 예인선 항해사만 팔 년 째인데 제 경험상으로는 어느 정도 숙달되려면 울산항의 경우도 한 이년은 걸려요, 그래야 웬만한 작업도 하거든요. 대체 근무를 한다고 내 휴무가 그만큼 느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따른 댓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는 책임만 있고 권리도 없고 댓가도 없고.”
잦은 사고와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바다. 삼백 시간을 넘기는 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예인선 노동자들의 삶은 난파선처럼 불안하기만 했다. 파업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여기는 항시 사고가 따르는 작업입니다. 선박끼리 부딪히거나 배가 기름이 없어 멈춰 버릴 수도 있고, 작업하다가 줄을 건네주다가 그 줄이 내려오는데 한순간 한 눈 팔면 맞아 버리고, 이번에 여수같은 경우에는 배에서 배로 건너 가다가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잖아요, 두 달 전에. 이 일 자체가 항상 위험해요. 바다가 조용할 때도 배 바닥은 미끄럽거든요. 얼마 전 우리 선원 같은 경우는 배 줄을 잡다가 줄 사이에 손이 끼여 가지고 손목 하나 잘렸잖아요. 다음 날 저쪽 바다에서 손목 발견되었잖아요.”
▲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예인선 노동자들 |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진보 신당의 조승수 의원과 당 관계자들이 매암부두 파업 현장으로 들어왔다. 내가 두 번째로 매암부두를 찾은 날은 때마침 ‘행동하는 양심’을 호소했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전 국민이 그분의 죽음을 추모하던 그 날에도 예인선 노동자들을 향한 ‘행동하는 양심’은 멈춰 있었는 듯하다. 조승수 의원을 좇아 많은 언론사가 파업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그날 밤의 뉴스에는 예인선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는 보도되지 않았다.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의 요구를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요구는 너무나 기초적인, 기본적인 요구이기에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승리의 확신을 갖고 끝까지 함께 싸우십시오.”
조승수 의원의 확언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눈빛은 여전히 불안하다. 파업 보름째, 회사는 여전히 민주노총 탈퇴와 선장들의 조합 탈퇴를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회사와 노동조합의 교섭을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노력을 하겠다는, 조승수 의원과 울산 노동 지청장의 약속이 있었지만 울산 노동지청은 그런 약속을 한 일도, 할 계획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 예인선 노동자들은 바다를 벗어나 울산 노동지청 앞에서 매일 아침 시위를 이어 가고 있다.
파업이 보름을 넘어 가고 있다. 예인선이 바다에 묶인지도 보름이 넘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는 예인선 노동자들의 절규가 묶인 배의 곳곳에서 유령처럼 꿈틀거리는 듯하다. 저 배들도 녹슨 때를 벗고 가볍게 가볍게 출항하고 싶겠지. 뱃머리 위로도 한가득 근심이 올라앉은 듯하다. 팔월 말, 곧 태풍이 닥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