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만에 달이 해를 가리던 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달에 가려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한 날 금환일식이 일어나더니 다시 또 달이 해를 가렸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국민 국가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국가의 탄생 자체가 저주였을까. 영화 <똥파리>에서 보듯이 상훈이나 연희의 삶 자체가 지긋지긋할 정도를 넘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또한 상훈과 연희의 삶처럼 저주의 대상일 뿐이다.
자연 속의 달은 해를 가리기 위해 61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렸다지만 부분일식이 가장 크게 일어난 오늘 2009년 7월 22일 7개월이 아니라 단 30분 만에 청와대·한나라당·조중동·재벌은 미디어법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미디어법 통과는 달이 해를 가려 온 천지를 시커멓게 만들듯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시커멓다 못해 아예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다. 해를 가리기 위해 61년을 기다려 온 자연의 순리를 30분 만에 난동을 부려 가며 뒤집어 놓은 이 사태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이제는 ‘근조 대한민국’이라는 말도 지겹다. 마르크스가 국가란 계급 지배의 은신처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자회견도 시국농성도 민주당 대표의 단식농성도 이제는 지겹다. 플랫카드 투쟁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시신이 든 관을 메고 시위를 할 정도로 참담한 나라에서 토끼풀 같은 손들고 MB 악법 반대하는 소리도 이제는 지겹고 안쓰럽다. 이것은 싸움이지 투쟁이 아니다.
MBC도 SBS도 YTN도 반MB 악법에 반대했지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에도 무기물 행세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달이 해를 가리는 자연의 법칙을 어찌할 도리가 없듯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민주당 대표와 원내 대표가 의원직을 사퇴한다고 해서 회복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은 내놓고 계급 지배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투쟁은 언제나 온건하고 지지부진하다.
물론 이번 미디어법 처리 강행에서 정족수도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재투표를 실시하고 국회 부의장이 “표결이 불성립되었다”고 했으면서도 재투표를 강행한 점이나, 국회 본 회의장에 없던 의원들이 갑자기 유령이 되어 빨간 불을 파란 불로 바꾼 대리투표의 의혹을 그냥 두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보아 왔듯이 국가가 법 위에 있고 재벌 삼성이 법 위에, 그것도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수준 아닌가.
헌법이라는 것이 프랑스나 미국처럼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획득한 것도 아니고 노동자·민중·일반 서민을 배제한 채 엘리트들끼리 장단 맞춰가며 만들어진 나라가 이 나라인데, 하물며 헌법도 아닌 저 밑의 국회법이 대수일까.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한 들 경찰이고 행정이고 입법부고 사법부고 모두 국가가 독식한 마당에 미디어법 강행 처리가 불법으로 판결날까.
애시당초 부터 민주당 대표가 단식농성 하기 전부터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미디어법 처리할 것이라는 관측을 못했단 말인가. 미디어법이 강행처리 되기 전에 이미 방통위원장이 미디어법 처리 여부와 관계없이 일을 벌이겠다고 엄포 놓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무슨 한나라당과 합리적인 협상을 하겠다고 7 개월을 질질 끌려 다니다가 이제와 저런 참변을 당한단 말인가. 7개월 전에 이미 민주당 모두 금배지 벗어던지고 결사항쟁 했어야 할 일 아닌가. 의회를 지키는 길이 의회 거부에 있다는 역설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인가. 국회 본 회의장 의장석 단상 점거가 신물 나도록 지겨운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는 노동자 민중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이다. 몸을 버려야 할 마당에 금배지가 무슨 소용이며 로텐더 홀 연좌농성이 무슨 소용인가. 처음부터 의회주의 자체를 포기했어야 할 것 아닌가.
용산 살인으로 사람이 죽어 나갔고 아직 시신은 냉동고에 갇혀 있다. 쌍차 투쟁으로 이미 5명이 죽었고 얼마 전에는 29살 난 젊은 여자마저 치 떨리는 협박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택배노동자의 자살이 잊혀진지 벌써 오래다. 우리들의 기억상실증 때문이 아니라 하도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기에 눈으로 본 사건을 저장할 뇌의 용량 자체가 딸리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평택 쌍용 자동차 도장 공장에 갇혀 있고 용산의 철거민들은 냉동고에 갇혀 있으며 방송언론은 시커먼 달 속에 갇혀 있다. 노동자·민중·서민·시민이 줄줄이 칠 흙 속에 갇혀 있는 날이다. 2009년 7월 22일 부분일식이 일어났지만 같은 날 달리 해를 완벽하게 가려 버렸다. 달이 해를 어둠 속에 가두는 날 토대와 상부 구조 전체가 이 명박 정권의 파시즘적인 행태와 신자유주의적인 경찰국가 안에 완벽하게 갇혀 버리고 말았다.
부자들은 세금 깎아 주고 개발 투기·규제 빗장 풀기로 부자들에게는 부동산 돈 몰아주면서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벌이는 쌍차 노동자들의 목숨, 주거권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의 목숨은 앗아가는 세상이다. 헌법이 규정한 삼권 분립은 찢겨 나갔고 전교조 사무실 수색, 국가 기관의 기관장 해임 및 파면, 국책연구기관 개입, 방송언론장악, 재벌 편들기, 노동자와 하층민 죽이기, 자사고 설립 등 이 명박 정권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형상으로 민간독재의 파상공세를 펼치고 있다.
달이 해를 집어 삼키는 일식현상은 장관이지만 민간독재가 오로지 경찰력에 의지하여 대한민국을 싹쓸이하듯 시커멓게 물들이는 것은 장관이 아니라 가관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투쟁을 요구하는 기도 안 찰 몰골이다. 그런데도 아직 진보 대 보수라는 허구적인 이분법에 매달려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시계는 민중 대 반민중의 정세를 시시각각으로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모두 맹인이다. 맹인이 다시 해를 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19세기 초에 벨기에의 화학자는 사진 연구를 위해 해를 쳐다보다가 눈을 잃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눈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눈을 떠 해를 쳐다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노골적으로 부동산 계급·건설 자본가 계급의 길을 가는 이 명박 정권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미디어법 강행 처리 전에 혹시 나나 당신이나 박 근혜의 행보에 일말의 기대라도 걸었던 것이라면 밝은 해 아래 너무도 부끄러운 일일 터이다. 목도리·어묵·떡볶이·배추 몇 포기가 이명박 정권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다. 버스비가 얼마인지가 돈 많은 부자들·재벌들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는 나라가 이 나라다.
국가와 자본에게 무엇을 더 기대하겠다는 말인가. 달이 해의 문을 쾅 닫아버린 날, 해가 다시 달의 뒷문으로 나타날 방도는 없을까. 도스토예프스키가 <미성년자>에서 자연을 거대한 기계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거대한 기계와 싸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 때 우리의 몸자세는 해를 보고자 하는 맹인의 결연한 자세, 그것이어야 한다. 이제 달은 해를 뒤덮어 버렸고 더 이상 잃어버릴 눈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주스러운 삶을 뚫고 불끈 솟아나는 해를 볼 일만 남았다. 기적은 노동자 민중의 정신과 육체가 고갈 날 정도로 싸울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본이 자본 자체의 모순으로 붕괴의 임계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오바마 정권도 이 명박 정권도 자본의 붕괴를 막느라 녹색뉴딜이니 4대강 사업이니 하는 미명 하에 돈을 처바르고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은 산술급수적인 수준이고 이미 전 세계에 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뿌려져 있다. 사람도 죽기 전에 잠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가. 경기 회복 운운은 자본주의에 잠시 돌아 온 의식일 뿐이다. 진저리 날만큼 더욱 더 저주스러울 파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금융지주회사법·미디어법 등 강행 처리에 저항하며 시민단체·방송 3사 노조·야당·민주노총이 거리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