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강한 의지와 뚜렷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송신도씨에 대한 지원모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첫인상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게 생겼”고 “여태까지 알고 있는 할머니들과는 달라, 재판을 함께 해 나갈 자신이 없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한 기자는 송신도씨에 대해 “아주 거칠어 보였고 피해자답지 않은 분노와 웃음”을 지니고 있어서 당황스러웠다고 회상한다.
▲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출처: 공식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songsindo] |
낯선 주체들을 고통 받는 피해자로 재현하지 않기
지원모임의 고민은 나에게 다큐멘터리 영상에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훨씬 실제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우리는 피해자의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그의 경험을 소통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예를 들어, 증언하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마치 훼손당한 육체를 또 다시 찢어내고 그 내부로부터 진실을 도려내는 듯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더욱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지원모임의 고민에서 드러나듯이 송신도씨처럼 자신의 경험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피해자일 경우, 어떻게 그가 겪은 사건들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 당혹스러워질 것이다. 아마도 지원모임의 고민은 일본의 역사 부정론자들이 위안부 정책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가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서는 드러나 있지도 않은 어떤 상황을 계속 상상해보았다. ‘어쩌면 지원모임은 일본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서 계속에서 송신도씨에게 당사자 밖에 알 수 없는 극단적인 고통을 증언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잔혹함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증언은 진실로 받아들이기에 혹은 전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명컨대, 낯선 주체들의 경험을 소통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의 어려움이 때문일 것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는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3부작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작업은 <3xFTM>로, 세 명의 성전환 남성(FTM, female to male)이 자신의 삶을 걸고 영화적 커밍아웃을 하여, 한국사회에서 성전환 남성들의 욕망과 삶의 조건들을 그리고 있다. 한국 최초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국회의원 후보 최현숙과 선본원들의 선거과정을 그린 <레즈비언정치도전기>가 두 번째 작업이다. 마지막 작업은 <종로의 기적>으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공동제작으로 게이들의 커밍아웃을 그리고 있다.
이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3부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연분홍치마가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낯선 주체들의 고통받는 피해-당사자로서 재현하지 않으면서, 낯선 주체들의 경험을 소통가능한 것으로 전환하여 재현하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소수가 경험한 사건을 사건 외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다가가기 까지 실제적으로 넘어야 할, 그러나 넘어서기가 녹록치만은 않은 수많은 난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난관이란 바로 사건의 외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스스로의 편견들이다.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지 않은 한, 타자의 경험에 다가가기 어렵다. 하지만 사건의 외부자들은 언제나 수동적이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신의 경험 안에서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관습화된 연민으로 풀리지 않는 차별
이럴 때,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자의 경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고통의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전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낯선 주체들의 경험을 소통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차별과 그로 인해 받은 피해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서 대중들의 관습화된 연민에 기대어 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습화된 연민이란 다수자의 가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낯선 주체들의 경험에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감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렇게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니...불쌍하다...안타까운 현실이야.”
어떤 이의 말처럼, 연민도 이해와 소통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연민은 그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굴욕적인 것으로 기억하도록 만들어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계기를 박탈한다.
또한 연민의 감정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안도의 감정에 뒤에 발생한다. 즉 연민의 감정은 희생자의 위치든, 가해자의 위치든 ‘나와 상관없다’는 그런 안도감을 전제한다. “나는 저런 삶을 살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그래서 때때로 안도감은 무관심을 야기하기도 한다. “나한테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따라서 자신의 삶에 위협을 느끼지 않은 한, 다수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소수자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래서 무관심은 그 자체로 차별이며 차별이 심화되는 토대이다. 왜냐하면 차별은 어떤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 전제와 그 주체가 갖고 있는 삶의 신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모든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분홍치마는 고통을 수반한 증언으로 성소수자들의 차별적 현실을 재현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어떤 관객들은 차별을 그저 바라볼 뿐, 실감하지 못했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의 한 장면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연분홍치마 활동가인 한영희, 홍지유 두 감독들은 레즈비언인 최현숙씨가 커밍아웃을 하면서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한 것에 관해 시민들에게 의견을 묻는데, 그 가운데 한 시민의 대답은 참으로 걸작이다. “동성애자가 정치를 하든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는데,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싫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를 관람한 어떤 관객은 묻는다. 성소수자들이 받고 있는 차별은 무엇인가요?
<3xFTM>을 본 관객들은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몰랐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래서 영화적 커밍아웃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 ‘주인공인 세 명의 성전환 남성’에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의 기쁨만큼, 그 만큼 성전환 남성들은 차별적인 조건에서 살고 있다. 이보다 더한 차별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3xFTM>을 관람한 어떤 관객은 묻는다. 성전환 남성들이 받는 가장 큰 차별은 무엇인가요?
연분홍치마의 커밍아웃 다큐멘터리 3부작 중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관람한 후에 성소수자들이 받는 차별이 무엇인지 물어볼 때, 그들이 말하는 차별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그들이 볼 수 있었던 차별은 무엇이었을까. 고통을 수반한 증언이 없었기 때문일까. 타인의 고통이 술자리의 흥미로운 대화거리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함께 실천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서 소중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지원모임의 여성들이 끝까지 투쟁할 수 없을 것이라 의심했던 송신도씨 그리고 송신도씨가 전형적인 피해자의 이미지가 아니어서 당황했던 지원모임, 이들의 투쟁의 과정은 서로가 소수집단의 목표가 공동체 전체의 목표와 동일시되는 우연한 계기를 확장시켜나가면서 차별의 이미지와 피해자의 이미지를 변화시켰다. 한 소수집단의 차별경험과 다수의 삶의 조건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고 확장시켜서, 모든 사회적 관계망의 “연루”의 지점을 밝히는 것, 그것은 어쩌면 차별에 대해서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특권(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 보는 것)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잔 손탁, 「타인의 고통」중에서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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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 님은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