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대란의 1차적 책임이 개인들에게 있다는 정부-도덕적 해이론의 연원
지배계급들은 400만이나 되는 금융피해자가 양산된 현실을 무분별하게 돈을 써 빚을 진 개인이 1차적인 책임이 있고 그 다음이 금융권이고 그 다음이 정부라고 했다.
'카드대란 부실감사’로 국회에 불려온 전윤철 감사원장이 “카드사태의 책임은 분수를 넘어(카드를) 사용한 국민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전 원장은 ‘감사원에서는 신용카드 이용자가 경제위기를 불렀다고 감사 했냐’는 한나라당 장윤석 의원의 질문에도 “신용카드 대란의 1차적 책임이 카드 사용자에게 있다고 내린 감사방향은 옳았다”고 답했다.
지난 2001년 카드사의 길거리 모집을 허용해 카드남발을 초래했던 규제개혁위원회의 민간 위원장이었던 강철규 현 공정거래위원장이 19일 “카드 부실의 원인은 길거리 모집 자체가 아니라 카드 발급 심사를 얼마나 엄격히 했느냐의 문제였다고 본다”며 모든 책임을 카드사에 돌리고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감사원은 총평을 통해 “정부는 IMF 경제위기를 맞아 내수진작을 통한 경제 활성화와 상거래 투명성 제고를 통한 세원확보를 위해 신용카드 관련 각종 규제를 폐지하는 등 카드 관련 각종 규제를 폐지하는 등 카드 사용을 권장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중략.. 감사원은 이어 “그 동안 누적됐던 문제점들이 2003년 한꺼번에 표출되 신용카드사 부실이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되는 위기를 초래했다”고 강조 했다. .. 중략.. 이와 관련 감사원 관계자는 “당시 내수진작과 거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카드 사용을 권장해 2조원의 세수를 확보하는 결과를 낳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히 있었으며 부정적인 문제는 당시 감독 기능의 책임이 크다”고 했다.
“카드 현금 서비스 이용한도를 폐지한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신용불량자 양산의 가장 큰 책임자”라는 노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원장은 “사후 보완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데 대해서 감독당국의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내수 자극해서 경기 부양하는 정책을 안 썼으면 그야말로 정치권의 책임”이라고 맞받아 쳤다.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채무자측에 1차적 책임이 있다'는 말, 즉 '각 개인들이 돈을 써 빚을 지고도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빚을 갚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바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론인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본 말들을 통해 다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정부는 카드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어느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오로지 빚진 개인들에게 책임을 지우고 있다 둘째, 저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정권을 위해 민중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타당한지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요구된다.
▲ 민주노동당에서 주최한 2차 민생포럼의 모습. 파산을 주제로 한 이날 포럼에는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었다. |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란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용불량자들에게 붙여진 ‘도덕적 해이’란 말이 과연 타당한 이야기인가? 도덕적 해이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재원이나 기업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 공공성을 훼손시키는 것을 지칭해 온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즉 공적 자금을 자신의 사욕을 위해 전용하고 횡령하는 등을 일컫는 것이다.
‘도덕적해이’란 말이 다른 자본주의하에서는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미국의 예를 들어보자. 몇 년전 미국에서 분식회계로 주식 시장을 뒤흔든 ‘엔론’이란 회사를 우리는 기억 할 것이다. 이때 미국에서는 기업의 ‘도덕적 해이’ 아니 CEO의 ‘도덕적 해이’운운 했다. 엔론의 분식회계는 일거에 주식 시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월가로 대변되는 주주자본주의 하의 미국에서는 기업회계의 투명한 공개와 신뢰도가 주식 시장운영의 필수적 요건일 것이다. 바로 이렇게 사욕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저버리는 행위가 바로 도덕적 해이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구조적 불평등 구조와 정책실패, 정부와 카드사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들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과 이에 따른 채무의 누적은 개인적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이다.
신용불량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즉 개인들의 ‘도덕적 해이’로 단순히 치부해 버리는 논리는 인정될 수 없다. 즉 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한 개인이 그러할진대 경제활동인구 5명중 1명이 빚쟁이로 몰려 있는 현실은 더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전에는 사람들이 도덕적이어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빚을 갚지 않는다는 식의 도덕적 해이론은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 이라기 보다는 감정적인(채권자의 감정을 반영한)주장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본의 세계화로 대변되는 거대한 조류 속에 구조조정의 진행으로 인한 실업의 만연, 유효소득의 감소 등 개인의 변제능력과 관련한 거대한 환경변화가 결국 신용불량자의 양산을 결과한 것이다.
일정한 사회제도 하에서는 각 개인의 능력의 차이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화된 불평등구조에 의해 각종의 차별이 존재하고 이로 인해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경제력에서 차이가 존재하며 후천적인 교육의 정도 등으로 인하여 또는 우연적인 사고 등으로 인하여 경제력에서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어떤 사회에서나 사회의 일정한 비율은 항상 가난에 시달려왔다.
특히 자본주의는 한편의 이윤동기와 한편에서의 빈곤의 압력이 시장에서 만나 자본과 노동으로 맺어지는 제도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항상 일정한 정도의 가난을 그 필수적인 동인으로 가지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IMF이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나아가 비정규직이 전체노동자의 70%를 차지하는 등 민중들의 소득 자체가 절대적으로 감소하여왔다. 따라서 실업으로 소득이 없을 경우 빚을 질 수밖에 없고 나아가 소득이 없어 빚을 갚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에게 빚을 갚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현재의 신용불량자들은 빚을 갚지 “않고”있는 것이 아니라 갚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실제로 1년 정도의 연체에 빠진 채무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채권회수율은 약1%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통설이다.(금융감독위원회는 이러한 자료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갚지도 못할 것을 왜 빌리는가”라고... 우리는 여기에서 체제에 우선하는 문제에 즉, 현 체제의 치부와 맞닥뜨리게 된다. “가난한 자는 죽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이다. (익히 잘 알다시피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사회 안전 망이 가장 취약한 나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아가서 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나앉으면서도 빚조차 지지 말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으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 있다. 인간의 생존의 열망은 체제에 우선한다. 생존본능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고 이를 짓밟는 체제는 그 존재이유가 없다라고. 실업의 나락에 떨어져 가족의 생계를 빚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갚지도 못할 것을 왜 빌리느냐”는 질문은 너무나 사치스런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대략 1년 이상의 실업기간과 이로 인해 다른 수입이 없는 사람에게 빚을 지는 행위를 비난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는 직장이 있다 해도 비정규직으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면 또는 일정한 기술이나 자격증이 없어 충분한 생활비를 벌지 못하는 가정에 있어서 또는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인하여 자신의 수입으로는 도저히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경우 빚에 의존하는 것은 정당화되어야 한다.
즉 구조적 불평등에 의한 생존의 압력으로 인한 경우와 도덕적 해이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채무를 지게 된 사람들 ,예컨대 실업에 처해 있거나 비정규직으로 일을 해오거나 생활보호대상자, 장애인으로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노인으로 생활능력이 없는 경우,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인하여 지출이 증대된 경우 등의 생계형 채무자 또는 경기변동 또는 연쇄부도 등으로 인하여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빚이 늘어났고 갚을 수 없게 된 경기변동형 채무자, 나아가서 정부의 경기부양책의 희생양으로 카드사의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카드의 발급, 즉 충분한 신용조사 없는 카드의 발급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인 채권자 귀책형 이러한 사람들에게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은 무의미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의 변제능력은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이는 사회구조의 결과물이며 정책의 결과인 것이다. 즉 이는 도덕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문제이며 분배의 문제이며 금융정책의 문제인 것이다. 즉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을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아무리 비난해보았자 이는 무의미한 책임회피이자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단순한 도덕적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사실은 카드사와 정부는 서투른 면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의 책임자이며 한편의 민중들의 고통 위에 올라서서 이득을 챙긴 자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심각한 것이다. 민중의 고통을 양산한 자들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도덕 운운하면서 누워서 침뱉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무분별한 도덕적 해이론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고리채업자, 자신의 이득에 민감한 고등 사기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주장하고 관철하는 대신에 그들로부터 뇌물을 챙기는 정치인들, 잘못된 정책으로 자신의 국민들을 사지로 내몬 악덕 관료들인 것이다.
진정으로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누구인가
400만 신용불량자들이 쓰고 빚진 돈의 이득은 누가 챙겨 갔는가? 이는 바로 채권자, 즉 카드사들이다. (높은 연체이율의 적용으로 채무자들에게 받은 이자만 해도 상당부분의 채권을 회수해 간 상태인 것이다) 가판대를 놓고 경품까지 손에 쥐어주며 카드를 반강제로 안기더니 이제 와서는 도덕적 해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최소한의 신용평가조차도 없이 오히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대중을 동원하고 선동했던 자들인 것이다.
자본주의에 구조적 빈곤의 문제가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 무시하고 카드를 남발하였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부실채권을 떠안은 카드사들을 살린 것은 국민의 세금인 것이다. 그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하여 손해를 본 것은 세금을 충실히 낸 선량한 국민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카드사들에게 규제개혁을 약속하고 이를 뒷받침해준 정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책임을 오로지 채무자들만이 지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금융사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살려주면서 자신의 국민들은 세금을 쓸 수 없다는 무책임한 관료들인 것이다.
경기부양이라는 명목으로 희생양이 된 민중
전윤철 감사원장의 국회 법사위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과의 대화 내용을 보자. 전 원장은 민주노동당 노회찬의원이 “갚을 능력이 없는 국민에게 돈뭉치를 쥐어주는 것은 국민을 신용불량자로 내몬 정책”이라며 DJ정부의 신용카드 정책을 혹평하자, “정부가 카드정책이나 부동산 경기 활성화 같은 내수진작 정책을 안 썼으면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됐을 텐데 이 같은 경제 악순환이 계속돼도 좋다는 전제로 하는 말이냐”며 DJ정권의 카드, 아파트 투기부양책을 적극 옹호하면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에 노의원이 “정치적 목적 하에 진행된 경기 부양책에 서민들만 희생당했지 않냐”고 맞받아치자, 전 원장은 “그러면 내수가 꺼졌을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정치권의 온당한 태도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경기부양이란 일정부류의 국민을 체계적으로 파괴하여 그 이윤으로 나머지의 일정 부류의 자본가, 채권자들을 살리는 행위,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경기부양을 해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잘못되어 있으며 이제까지 모든 경제관료들의 지상과제가 되어 왔던 총량만을 늘리는 경제정책은(선장주의 경제정책) 더 이상 무의미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무의미함을 넘어서서 민중을 사실상 사지로 내몰고 그 반대급부로 자본가와 돈 있고 힘있는 자만을 살찌우는 정책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민중이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자신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쟁취하여야만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저는 다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진정 민중의 눈물을 닦아 줄자는 있는가?
없다. 자신이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누구도 눈물을 대신 닦아주지는 않는다. 자살과 음험한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 대신에 당당히 일어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여야만 눈물은 거두어 질 수 있다.
금융피해자 특별기획 '파산을 선언하자'
1회 들어가며 - 소개
2회 무리한 내수 경기 육성책과 카드 남발, 금융정책 실패
3회 파산을 말한다 : 대전 수련회 취재 기사
4회 파산에 이르는 길 : 금융피해자 기고
5회 누가 이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말하는가 : 자본의 도덕적 해이론 비판
6회 금융피해와 빈곤의 덫
7회 금융피해자들이 놓인 인권 사각 지대
8회 금융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정책의 허와 실
9회 파산과 개인회생, 그 시작과 끝
10회 돌고 도는 신용정보, 나의 정보를 보여줘
11회 파산선언, 반자본 시민불복종 운동이 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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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넷 공동체에서 '스파르다쿠스'를 치시면 금융피해자파산지원연대가 운영하는 페이지가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