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개인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이영미(가명) 씨의 기고글입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이영미 씨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다룬 일기를 미디어 참세상에 기고해 주셨습니다. 이 글은 파산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빚과 파산으로 이어지는 공고한 고리가 어떻게 한 개인을 돈에 의한 파산과 더불어 관계의 파산을 통해 고립시키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글을 기고해 주신 이영미씨는 글을 전달하며 "소설같이 암울한 현실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제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저와 같은 상황의 다른 사람들이 돈에 의해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설상가상,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
2002.11.23.
동생이 집을 나갔다는 다급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울러 동생이 남기고 간 어마한 빚 소식까지.. 빚을 독촉하는 각 카드회사와 은행 등쌀에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온 가족 얼굴이 사색이 된다.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행여 가출한 동생 소식일까 수화기를 들면 여지없이 ‘언제까지 얼마를 넣어야한다. 기일까지 입금 안 하면 무조건 법적 소송 들어간다’그 놈의 법 소리에 다들 새가슴이 된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동안 말이 없다. 여기저기 손벌릴 수 있는 모든 곳의 돈을 끌어들여 급한 불이나마 끄고 산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 내 카드까지.. 한번에 700만원씩 뽑을 수 있는 현금서비스,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1,000만원이 나오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이때는 몰랐었나보다. 그것이 파산을 위한 지름길이었음을...- 현금서비스, 대출 등도 이미 다 쓴 상태이다. 소식 한 장 없는 동생이 원망스럽다. 군에서 제대하고 10년이 넘게 결근 하루 없이 성실한 녀석이었다. 좀 잘 살아보겠다고 큰 마음 먹고 굴삭기 한대를 구입했다. 이젠 걱정 없다고, 부자는 아닐지라도 아쉬운 소리 없이 잘 살거라 믿었건만.. 왜 하필 산에 공사하러 갔었을까? 굴삭기와 함께 산비탈을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 차는 완전히 박살났지만 약간의 타박상 외엔 괜찮다고 했다. 산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보험도 없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이대로 포기하기 힘들었다. 무리하게 돈을 끌어들여 중고차를 구입했다. 아마 그게 화근이었나 보다. 혼자서 끙끙대며 불어나는 빚더미가 감당이 안 되었던 거지.. 아마도 무서웠던 거지..일본에 가서 돈 많이 벌어온다고 비행기를 탔다고 동생 친구가 소식을 전했다. 어디서 밥이나 먹고 있는지... 짓눌러오는 압박 속에도 동생이 걱정되는걸 보면.. 이래서 물보다 피가 진한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2003.04.14
작년 초에 선을 봤던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동안 연락이 안 돼서 궁금했다고.. 우리 집 형편을 간략히 이야기하고 다음 인연을 기원해주었다. 사랑이고 결혼이고 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 하찮은 고민거리고 전락해버렸다. 차비를 뺀 월급 전부를 카드대금 메우는데 밀어 넣고 있다. 하루의 연체에 한도가 갑자기 200만원씩 300만원씩 내려간다. 가족카드 합치면 한 달에 1,000만원 이상 한도가 내려가는 것이니 그 차액을 메우기 위해서는 내가 한 달에 1,000만원 이상 벌어야한다는 건데.. 무슨 짓을 해야 그런 벌이가 가능한 걸까? 하루하루 살얼음 걷듯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내 발걸음이 힘겹다.
인권선언은 우리 집에 없다
2003.05.09
어제가 어버이날이지만 흔한 꽃 한 송이 없다. 돈 아깝다고 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부모님, 단돈 1,000원이라도 빚 갚아야한다는 독한 딸인 나.. 나는 이제 사람인걸 포기하고 사나보다..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하는 감정이 없는 듯 하다. 아무 생각없이 전화 오는 은행에, 있는 돈 입금시킨다. 돈이 없으면 다음달 월급에 준다고 메모해 놓는다. 다음달 월급은 그렇게 저당 잡혀있다.
먹을 것이 부실한 것일까? 아버지, 어머니의 혈색 좋던 통통한 뺨은.. 거무스레한 걱정으로 홀쭉하다. 직장 식당의 남은 반찬이라도 챙겨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후쯤에 어머니는 S카드로부터 독촉 전화를 받았다. ‘며칠만 기다리면 돈을 마련해주겠다. 조금만 기다려주셔요.’사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엔 이제는 말라버린 울음이 맺혀있다. 앳띤 목소리의 직원은“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됩니까? 돈을 썼으면 줘야죠”뾰족한 음성이 수화기 밖 내 귀에도 선명히 들렸다. 하얗다 못해 회색으로 변해 가는 어머니 안색에 슬며시 아파트 마당에 나왔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만으로 존중되어야하며..’시작되는 인권 선언은 우리 집에는 없다. 돈 없는 자에겐 인간의 존엄성조차도 없다.
2003.06.10
동생이 돌아오면 좀 나아질 꺼라 생각했다. 그래도 중장비 기사인데.. 월급쟁이 노릇하더라도 나보다 벌이가 좋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동생은 지금 수술중이다. 출퇴근 기름 값도 아껴보자는 마음에 1평 남짓한 고시원을 얻어 자장면 배달하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그냥 앞차 뒷 범퍼에 부딪혔으면 작은 접촉사고에서 끝날 것을.. 사고 났을 때 물어 줘야 할 돈걱정에 무리하게 핸들을 꺾다가 다리뼈가 박살이 났다. 아픈 동생 걱정보다 병원비가 걱정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머니는 동생이 없는 곳에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며 어디 청산가루 구할 곳이 없냐며 설움을 쏟아낸다. 나 역시 어머니 말씀에 흔쾌히...
2003.11.20.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동생과 나는 '신용회복지원'에 서류를 냈다. 서류 접수를 위해 임시사무소를 찾아 갔을때 강당밖에 대기한 사람들의 수에 입이 벌어진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이네들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까? 하여간 이 서류 접수로 인해 나와 동생명의의 빚은 당분간은 독촉 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아버지, 어머니 명의의 빚은 급한 대로 집을 팔기로 했다. 시집가기 전에 두분 사실 집이라도 단장한다고 싫다는 부모님 설득해서 작년에 리모델링 했던 집이다. 새집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띄며 쓸고 닦고 했었는데.. 집을 팔더라도 저당 잡힌 금액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 그래도 반송이 부산에서는 집 값이 싸다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 집을 계약했다. 500만원을 뺀 나머지 금액은 모두 입금시켜줬는데도 빚은 여전하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오는 길에 우리 옛집이 있다. 다른 누군가의 행복한 가정이 되고 있을까? 마음이 시리다...
나는 TV에 나오는 도덕적 해이자
2004.03.02
신복위의 결정에 따라 나는 매달 120만원씩 불입하기로 했다. 아울러 어머니가 카드대금 갚아 넣는다고 빌려 쓴 사채도 매달 120만원씩 주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돈 빌려준 아주머니를 찾아가 생전 처음으로 남한테 무릎꿇고 빌었다. 한 가족의 목숨 살려달라고... 딱하게 되었다며 이자는 두고 원금만이라도 갚으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 은행도 이런 호소가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입금증을 모아 계산해보면 K은행의 경우는 360만원 입금에 원금이 65만원이 갚아졌다. S카드사의 경우는 240만원 입금에 원금 73만원이 감해졌다. 그네들은 알고 나 있을까? 600만원이면...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일년 생활비라는 사실을.. 그 돈을 갚기 위해 어떤 생활을 감수하며 사는지를.. 궁핍한 생활에 아끼고 또 아끼고..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빚은 여전히 제자리이다. 이런 빚잔치의 끝은 있는 걸까?
2004.07.14
아침에 눈을 뜨면 알싸한 담배냄새만 남기고 아버지는 안 계신다. 고혈압에 당뇨에 전립선염, 녹내장, 혈액장애.. 이게 우리 아버지께서 안고 사는 병명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 쓰러질 듯 들어오셔서 다음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나가신다. 늙은 몸이라도 자식한테 보탬이 되고 싶다 신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무슨 일이라도 하시겠단다. 우리 어머니는 고혈압, 만성신장병, 악성천식, 관절염.. 어릴 때부터 하신 고생 탓일까? 성한 곳이 없다. 그래도 아는 사람 소개로 간혹 파출부로 나간다. 동생은 한 달에 10만원 더 준다는 소리에 매일 야간 근무이다. 밤 5시부터 새벽 5시가 정해진 근무 시간이다. 낮에 쉬어야함에도 간혹 대리기사로 나가기도 한다. 나는 겸업이 금지되어 있다. 나가서 더 벌어올 수 없어 지출을 줄었다. 차 한 잔 값이라도 줄이기 위해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직장에서 각종 모임이 불참하기 위해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간혹 TV보는 것이 유일한 문화활동이다. 직장과 집을 오가는 차비가 유일한 지출이다. 우리 가족은.. 모두 '도덕적 해이' 상태에 빠져있나 보다. 간혹 쓸데없는 공사나 잘못된 사업으로 낭비되는 세금.. 모씨와 모씨를 둘러싼 뇌물과 비리들.. 그 돈들이면 400만이 넘는 신용불량자들이 다시 희망을 찾고 사람답게 살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는 나도 도덕적 해이자인가보다.
2004.11.05
전화독촉에 노이로제 증세가 보이는 어머니 때문에 전화번호를 바꾼지도 꽤 됐다. 해당은행이나 카드사에 신고해야하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 때문에 요즘은 한방씩 큰 펀치를 맞는다. 소식이나 통보 없이 일시불에 모두 갚아내라는 것이다. 법적 소송도 이제 별로 두렵지 않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있을까? 이미 가구며 가전 집기에는 딱지가 붙어있는지 오래다. 더 이상 십 원의 돈을 빌릴 곳도 없다.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하건만, 오늘도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죽는 게 낫다고 설움을 토해낸다.
신뢰를, 인간다움을 잃어버린다는 것
2005.02.23
쥐어짜듯 설을 보낸 지 엊그제 같건만 벌써 보름이다. 마른 나물이라도 몇 가지 장만해야 할텐데.. 우두커니 베란다에 서서 가려진 하늘로 보이지 않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제발 빚 좀 갚게 해달라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 시간을 달라고.. 그 시간이 되도록 짧기를, 또한 그 시간동안 우리 부모님 여전히 저의 곁에 계시기를 빌어봤다. 작년에도 이 소원을 빌었고 올해도 이 소원을 빌고 있으면 내년도 아마 똑같을 것 같다. 이 소원을 빌어야하는 해가 너무 길어질까 걱정이다. 나는 이제는 안다. 나는, 잘못된 금융정책과 은행의 탐욕, 나의 무지가 만들어낸 시대의 합작품이다. 아마 그동안 걸어온 시간을 되돌려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동생의 빚 독촉 전화는 처음부터 무시할 것이다. 아마 그렇게 갚으려고 애만 쓰지 않았던들 돈을 잃지도.. 집을 잃지도.. 신뢰를 잃지도.. 인간다움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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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가명) 씨는 파산지원연대를 통해 이 글을 기고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