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사회국가는 1982년대부터 1998년까지 보수정권에 의해, 1998년부터 2009년 까지 사민당 정권(2005-2009년은 기민/기사 연합이 주도하였으나 슈뢰더 정권이 추진했던 아젠다 2010이 그대로 유지됨)에 의해 서서히 그 연대의 원칙이 최소화되면서 사회복지정책이 축소되어왔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까지 사회복지 확대가 당의 주된 노선이었던 사민당의 우경화는 사민당 스스로 복지국가를 해체시키게 하는 우를 범하게 했다.
우경화된 사민당 스스로가 거부하지 못했던 ‘신자유주의의 외적 강제(neoliberalistische Sachzwang)'로 진행되었던 일련의 개혁조치의 결과로 인해 독일 시민들은 노동조건과 임금수준은 더욱 악화되고, 삶의 질은 하향화 되었으며, 사회보험을 통한 사회급여 역시 최소화되거나 민영화되었다. 사민당 지지자들은 그래도 보수당보다는 사민당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11년 만에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기대였다는 점이 공론화되었다. 사민당의 최대 실책은 사회복지의 축소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지자들의 정치적 기대와 희망을 짓밟았다는 점이다.
새로이 형성된 흑황연정의 연정협약서(Koalitonsvertrag)가 공개되면서 독일 사회는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싸였다. 논란의 중심에는 세제 개혁과 의료개혁이 자리하고 있다. 세제개혁의 주된 내용은 소득세를 2011년부터 뚜렷하게 축소하여 해마다 2,400만 유로를 감세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의료개혁의 내용으로는 기업의 보험료부담을 경감하며 동시에 모든 가입자에게 정액제(Kopfpauschale, flat-rate System) 원칙을 도입해서 보험료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세제개혁의 경우 소득세의 축소로 득을 볼 대상은 고소득자이고, 그 결과 국가 수입이 축소되어 국가는 복지정책에 대한 긴축재정을 강화하여 시민들과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갈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더욱더 복지의 민영화를 가속화 시킬 전망이 높다. 의료개혁의 경우 독일이 126년 동안 유지해 오던 사회보험에 대한 노사간의 균등 책임원칙을 해체하면서 결국 가입자 및 시민 개인의 책임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러한 개혁에 대해 보수주의적인 조세 전문가, 보수당 내 사회정책 담당자들 역시도 상당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흑황연정의 한 주체인 자민당(FDP)에 대해 선거운동을 후원하던 집단들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연정협약서가 체결된 배경이 짐작된다. 자민당의 주요 정치 지지세력들은 의사, 치과의사, 민간보험회사, 약사, 제약회사, 민간병원자본과 같은 의료계 인사와 변호사와 같은 고소득 전문가 집단이다. 전자의 경우 공적 시스템의 역할이 아직 강한 독일의 의료시스템을 최대한 시장화하여 의료자체를 상품화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민당은 이들로부터 적극적인 정치지원 자금을 받아왔고 자민당의 의료정책의 주요 로비스트들 역시 이들로 구성된다. 더욱이 흑황연정에서 보건부장관이 자민당의 필립 뢰슬러(Philipp Rösler)라는 점이다. 그는 의료개혁을 제안하면서 신자유주의에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경쟁’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미 사민당 정권에서 수용했던 질병금고조합의 경쟁원리에서 얻었던 결과는 가입자에 대한 이층화 전략이었다. 즉 위험이 높은 그룹(소득이 낮고 질환위험율이 높은 대상자)과 위험이 낮은 그룹(소득이 안정적이고 젊고, 건강한 대상자)으로 보험 가입자들이 분류되어 이미 시민들로부터 원성을 사왔다. 자유주의자들의 일관된 시장화 논리는 자유와 경쟁을 통해 보다 좋은 서비스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독일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보다 좋은 서비스’가 아니라 ‘보다 안정적이고 보장성 높은’ 공적 의료시스템이다.
이러한 시민들의 기본적 요구는 당분간 연방 의회 내에서 관철되기 힘들어 보인다. 연방의회의 총 의석수 622석 중 집권여당의 의석수는 332석이고 야당 모두의 의석수는 290석이다. 한국과 같이 야당의 의석수를 모두 합해도 여당의 의석수를 견제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일수록 노동조합 및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이 더욱 중요하다고 베어하임과 펠트-프리츠는 말했다. 사민당과의 불편한 동거를 노동조합은 평가하고 정리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을 위한 노동정책과 사회정책을 위해 투쟁해야 할 시기라고 밝혔다.
좌파당과 베르디가 공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시민보험(Bürgerversicherung)은 이미 독일노총인 DGB의 모델로 제안된 바 있다. 시민보험은 보수 및 자유주의자들이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약화시키려는 시도에 대응해서 제안되었다. 시민보험은 재정확대를 통해 기존 사회보험의 원리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한다. 현재까지 고소득자, 불노소득자, 공무원 등은 공적 의료보험체계로 흡수하는 강제적 규정이 없었다. 사회보험이 민간보험과 다른 큰 차이는 납부한 보험료와 상관없이 동일한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누구나 그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의료보험 개혁은 꾸준히 보험 급여를 통한 혜택을 줄여왔고 보험료 재정형성에 있어 자본의 책임부분을 축소시키려는 꾸준한 시도가 진행되어 왔다. 결국 사회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시민일수록 의료부분에서도 불평등한 조건에 놓이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의료보험의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위에 언급된 대상자들을 강제적으로 사회보험으로 가입시켜야만 한다. 또한 이들이 보험료 부과기준은 소득뿐만 아니라 재산에도 부과기준을 적용하여 의료보험제도를 통한 실질적이고 수직적인 소득 재분배 기능을 확대를 목적으로 한다. 이제까지 독일의 사회보험은 직종 및 직업에 따라 또는 지역에 따라 모두 다른 금고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치인과 고소득자로부터 불안정고용층에 이르는 시민까지 단일 체계내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보험개혁에서 사회적 약자가 점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도록 개악되어왔다. 그러나 시민보험에서는 보험의 수입구조에서는 소득과 재산에 따른 누진률을 강력하게 적용하는 반면, 보험 급여에서는 보험료 수준과 관계없이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고 본인부담부분을 폐지하려고 한다.
더불어 좌파당은 실업자와 빈곤층을 위한 '필요지향적 최저보장(bedarfsorientierte Mindestsicherung)'을 요구하고 있는데 월 860유로(약150만원미만)의 사회적 급여가 최저 임금도입(시간당 10유로)과 함께 도입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사회복지 정치는 더 많은 시장화를 통한 복지의 재상품화 및 민영화를 위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사회복지 정치는 ‘사회적 연대 가치’의 복원을 통한 사회보험의 공적 기능 강화와 불안정 고용층 및 빈곤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노동연계복지의 전략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다층화와 사회계층의 다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정책 모형은 비단 독일의 경우뿐만 아니라 지구적 차원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에 고전적 사회복지 모델이 가지고 있었던 가치의 복원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극대화된 시장에 대응하고 새로운 계급지형과 계층지형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 전략의 발전이 요구된다. 독일의 좌파당 역시 가치의 복원수준에서 멈춘다면 사민당이 겪었던 오류를 반복할 수 있다. 더욱 왼쪽으로 가는 것 역시도 이 시대의 요구일 수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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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회공공연구소의 이슈페이퍼로 작성된 것입니다. 작성자인 제갈현숙 님의 제안으로 연속기고로 싣게 되었습니다.
제갈현숙 님은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