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법원이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서 성폭력 가해자 쪽의 일방적인 합의시도 관행에 제동을 걸어 주목된다. 그간 이번 사건의 성폭력 피해자는 가해자 쪽의 합의시도에 고통을 호소해 왔다.

서울 고등법원 형사7부(부장판사 이광범)는 13일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도피를 돕던 전국교직원노조 소속 여성 조합원을 성폭행 한 전 민주노총 간부 김 모씨에게 원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의 성폭력 피해자 지지모임은 “피해자의 의사에 중심을 둔 판결”이라며 환영의사를 밝혔다.

“성폭력 사건의 공탁은 오히려 피해자를 욕되게 할 수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모든 성범죄는 당하는 피해자 입장에서 숙고해야 한다”면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모든 행위는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피고가 술에 취한 상태여서 감형해 달라는 요구를 두고는 “원심에서 술에 취해 심신미약을 인정했지만 감경요소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술을 마신 것은 가중되는 요소에 해당되어야 한다”며 “원심의 3년은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은 상당한 금액으로 공탁을 걸었으나 성폭력 범죄에 있어 공탁은 사죄의 의미는 될 수 있겠지만, 피해자를 욕되게 할 수도 있다”면서 “성폭력 범죄는 금전배상으로 해결해선 안 되며, 피해자가 금전배상을 완강히 거부해 감형사유가 안 된다”고 양형사유를 밝혔다.

이런 재판부의 판단을 두고 성폭력 피해자 지지모임은 “무리한 합의종용과 공탁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또 다른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원심과 상고심 등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고인 김 모씨의 부인은 피해자의 직장과 집에 찾아와 합의요구를 해왔다. 지지모임은 “피해자가 피고인 쪽에 합의의사가 없음을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집과 직장에 연락도 없이 여러 차례 방문하여 대중 앞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동으로 합의를 요구해왔다”고 밝히고 “이는 피해자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피해배상을 하거나 진심어린 반성을 표현하는 행동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고 지적했다.

지지모임에 따르면 피고인 쪽의 이런 합의 요구로 피해자는 이사를 했고, 직장에서도 피고인 쪽이 나타난 이후 극심한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이렇게 피해자가 합의를 하지 않자 가해자 쪽은 지난 12일 공탁통지서를 피해자에게 등기로 보냈다. 피해자가 합의를 원하지 않자 대신 법원에 공탁금을 건 것이다.

지지모임은 “그동안 형사사건 재판에서 관행적으로 손해배상액의 공탁은 합의가 이루어진 것과 거의 동등하게 평가되어 감경적인 양형요소로 반영되었다”고 지적하고 “합의시도와 공탁제도를 성폭력 사건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지지모임은 “이번 판결을 기점으로 합의하지 않겠다는 피해자의 의사와 집과 직장에서 안심하며 살고 싶다는 피해자의 최소한 요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무리한 합의종용 관례는 사라져야 한다”고 밝혔다.

지지모임은 이어 “한국사회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 및 피해자의 맥락을 고려해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했으며, ‘이 사건으로 고통 받은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피고인이 제대로 형을 받아 책임을 질 것’을 강조했다”면서 “이번 결과가 이후 성폭력사건 판결에 있어 기준과 방향으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