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슬픈 시대의 비겁한 자들

[기고] 기자회견이 왜 집회인지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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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법, 용산 그리고 비겁한 판사들

이명박 시대가 되면서 비겁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더 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며칠 전 미디어법을 심의 판결한 헌법재판소 판사들을 보라. 야당 의원들이 제기한 국회 통과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모두 위법이라고 제대로 판결을 했다. 그런데 정작 전체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비겁하게 발을 뺌으로 결국은 앞의 위법 사항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건 그럴 듯한 궤변의 수준도 못 되는 말 그대로 비겁한 행동이다. 비겁한 행동을 하는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노골적인 외압에 굴복하거나 알아서 기는 행위이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나름대로 읽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양심과 지조를 저버리고 부당 권력의 시녀를 자처하는 것이다. 일제시대 지식인들의 훼절과 친일도 다 그렇게 시작된 게 아닌가.

사법부의 비겁한 행위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합리나 친절을 가장하는 경우다. 용산 참사와 관련된 재판의 경우다. 재판장은 노무현 시절 공안 사건을 소신있게 판결한 판사답게 재판을 하며 마치 피고인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진지하게 심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검찰이 수사 기록 3000쪽의 제출을 거부했을 때도 제출토록 결정하는 등 다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꺾이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제출을 거부하는 검찰에 아무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겨우 ‘불이익을 주겠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비겁한 행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변호사의 요구에 따라 김석기 등을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재판과정에서의 절차적 적극성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 철거민 측 변호인들을 비롯한 피고들, 증인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김석기를 비롯한 경찰 간부나 그 위의 개입을 입증할 증인들의 증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핵심 증인이 출석하지 않는다거나 증거 제출이 미흡해 판단이 어려우면 재판 기일을 늦추어서라도 제대로 판단하고 판결하는 것이 당당한 태도이다. 그러나 비겁해 지기 시작한 재판부는 법정 기일을 핑계로 졸속 판결을 감행했다.

3000쪽을 제출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엄포는 엄포로 끝났다. 판결 요지 설명의 모두에 ‘아쉽다’는 한마디로 넘어갔다. 재판장은 판결문을 읽으며 내내 비통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많았던 철거민 측 증인이나 증거는 모두 배척하고 검찰의 주장은 100% 인용하는 소위 유신 3공 시절 검사의 공소장을 판결문이라 제목을 바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다만 유신 시절 판사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고압적이고 뻔뻔했다 라면 지금의 판사들은 마치 고민하고 고뇌하는 듯, 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열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지난 민주화 10년, 겨우 겨우 가지기 시작했던 법관의 독립성과 양심이 이명박 시대에 다시 훼절되고 있는 모습이다.

청와대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용산 유가족들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은 억울한 단체나 개인들이 청와대에 항의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할 때 사용되는 장소이다.

나는 지난 달 30일 용산 재판 판결과 미디어법 관련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항의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다시 경찰에 불법 연행되어 도봉경찰서 유치장에 처박혔다. 청와대 인근 청운동사무소 앞은 억울한 단체나 개인들이 청와대에 항의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할 때 사용되는 장소이다. 청와대 정문 앞 분수대 광장이 있고 거기는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을 비롯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하는 곳인데 유독 표현의 자유에 의한 특정한 의견 표현은 불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농성도 벌이는 것이고 경찰도 허용해 왔다. 그런데 유독 용산 문제만은 그곳에 접근도 못했다.

그날도 유족들과 함께 범대위 대표들은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그곳으로 가던 중 효자동 입구 대로에서부터 이유 없이 경찰의 제재를 당했다. 천신망고 끝에 그곳에 도착해 가까스로 기자회견을 했다. 경찰이 집회라고 주장하는 구호도 외치지 않고 겨우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기자들의 사진촬영을 위해 우리의 의사를 구호로 축약해 주먹을 뻗으며 크게 외쳤다. 그 때 아니나 다를까 경찰의 경고가 있었다. 우리는 상관없이 기자회견이 끝났으므로 해산했다. 기자회견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 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우리 단식농성자 대표 4명은 인도에 나란히 앉아 이명박 정권에 항의하는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잡혀왔다. 주변에 있던 세 사람도 함께 모두 일곱 명이 도봉경찰서로 체포 연행 구금 된 것이다.

체포적부심을 신청하다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우리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민변의 김승교 변호사와 의논하여 체포적부심을 신청하기로 했다. 체포의 부당함을 구제 받기 위해 마련된 체포적부심은 제도상의 한계 등으로 거의 활용이 되지 않는 법이다. 불법 체포가 되었다고 판단 될 때 변호사의 조력을 받아 법원에 적부심 신청을 해야 하고 그 적부심도 24시간 안에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어서 결국은 법적 구금시간인 48시간을 실제로 다 채우게 된다거나 만약 기각이 되면 재판시간은 구금 시간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실제 구금 시간이 연장되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일곱 명이 구태여 체포적부심을 신청한 것은 우리가 비록 48시간을 넘겨 영창을 살더라도 우리의 행위가 정말 체포요건이 되는지 판단 받고 싶었다. 기자회견과 집회의 차이, 그리고 기자회견이든 집회든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마구잡이 연행, 구금하는 경찰의 과잉 불법 체포에 대해 법원은 어떤 판단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그동안 억울한 체포에 대해 체포적부심을 신청하면 검찰은 적부심이 이뤄지기 전에 비겁하게도 석방해버림으로 실제 적부심을 무력화 시킨다. 그래서 실제 적부심이 이뤄지는 사례는 크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용산범대위 대표자들이 부담을 안고 도전을 해봤다. 왜냐면 이것은 앞으로의 용산 투쟁이나 다른 문제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적부심 재판을 받으러 가는 길은 멀었다. 비 내리는 시월의 마지막 날 주말 오후 길은 막혔지만 길가의 은행나무 가로수 잎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닭장차에 탄 우리는 모두 착잡했다.


판사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진 법의 정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가 이렇게도 힘든가.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졸지에 주말 계획을 망쳐버린 우리 일곱과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도봉경찰서 호송 경찰과 10여 명도 얼굴에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서초동 중앙지법에 도착해 지루하게 기다려 적부심 심리가 시작되었다. 법에 따라 모두 따로 해야 한단다. 나는 맨 먼저 법정에 섰다. 판사는 친절했다. 경찰이 보내준 현장 사진을 일일이 컴퓨터를 이용해 화면에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가 하면, 쟁점이 생기면 즉석에서 대법원 판례까지 검색해 띄워주고, 말도 자유롭게 하게 하는 등 외형으로는 거의 심리가 현대화, 민주화 된 듯 한 느낌이었다.

문제는 법관들의 법에 대한 태도였다. 법의 취지는 어디로 가고 오로지 그 형식적 문구에 매여 있는 태도가 너무 답답했다. 집시법은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와 시위를 적극적으로 보호함으로 그 기본권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법 정신의 최후 보루인 법관마저 끊임없이 제재하고 억제해 위축시키는 쪽으로 생각하고 태도를 취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그 폐쇄된 조문 중심의 폐쇄된 법치주의에 실망을 넘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루하게 개개인에 대한 심리가 모두 끝나고 한 시간 반 쯤 지나 판결 내용이 내려왔다. 판결문을 보지 못해 구체적 언급이 어려우나 기자회견을 집회로 인정하고 참여정도에 따라 판단한 내용 같았다. 기자회견과 농성 주변에 있었던 단순 참가자 3명은 석방, 적극 참여자 가운데 목사님 한 분 석방, 나머지 집회 및 시위 전력이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단식농성자 3명에 대해서만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이다.

비겁했다. 심리과정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현행 집시법에 의하면 기자회견이 비록 집시법의 금지 범주에 든다 하더라도 폭력이나 현저히 공공질서를 해칠 행위가 아니면 구속 사유가 아니기 때문에 체포 구금할 필요가 없다. 위법행위가 있으면 간단히 인적사항을 확인한 후 소환조사 하면 된다. 경찰은 현장 채증사진 한 장으로도 얼마나 많은 촛불 시민들을 소환 조사해 입건하지 않았나.

더더욱 비겁한 것은 같은 행위에 대해 차별 대응하는 것이다. 행위 내용이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자. 똑같은 행위를 한 것을 조사과정에서의 태도나 직업, 전력 등을 문제 삼아 차별 대응하는 것은 경찰, 검찰, 법원 모두의 과도한 자의적 판단 범위다. 법원이 중형을 선고할 때 유사한 범죄 행위의 전과나 또는 다른 사회에 대한 선행 등을 고려해 형량을 가감하는 것은 법관의 법과 양심에 따른 재량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행범의 체포 구금에 적용될 때는 이뿐 놈은 봐주고 미운 놈은 때려 잡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힘센 놈, 돈 많은 놈, 권력 있는 놈은 잡혀가지 않고 가난하고 억울하고 아는 게 모자라는 사람만 별것도 아닌 일에 무조건 잡혀가 체포, 연행, 입감, 구속 상태에서 자기 방어도 제대로 못하는 사이에 억울한 벌금을 물고 옥살이를 하는 것이다.

왜 명확한 답을 하지 않는가

이번에 우리는 법원에 집시법의 범위와 체포, 구금의 부당성에 대해 그 원칙과 실제 적용의 문제점을 온 몸을 던져 제기했다. 그런데 법원은 엉뚱하게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판결을 내렸다. 마치 헌법재판소의 판결처럼.

도대체 무엇인가. 기자회견은 집회인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지 않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농성은 체포의 대상인가. 왜 명확한 답을 하지 않는가. 법적으로는 문제없는데 그 중 기분 나쁜 놈은 체포해도 괜찮다는 것이 이번 적부심 판결인 것 같다. 이건 검찰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언제부터 검찰이 법원의 위에 있었나. 이런 의문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이명박 체제 이후 새로운 권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권력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 독재 체제가 구축되고 있다. 그에 발 맞추어 법원은, 아니 법관들은 비겁해지고 있다.

단식 일주일 째, 철창 안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마음이 바깥에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우울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퇴행하는 모습에 슬프다. 나는 슬프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또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