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시, 현대 중공업 경비들이 쏘아댄 거센 물줄기에 한바탕 폭우라도 쏟아진 듯 온통 젖은 땅을 밟고 젖은 몸으로 차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경주에서, 대구에서 승용차로 혹은 대형 버스를 대여해서 영남 노동자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시 그들이 떠나온 도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친 물줄기의 공격에 그나마 온기를 피워 올리던 장작불도 꺼져버리고 동조 단식단의 노상 숙소도 망가져 버렸다. 간간이 타들어가던 담뱃불 말고는 온기라곤 찿아볼 수 없는 어두운 굴뚝 아래서 사람들이 헤어지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 참가한 사람들을 찿아 다니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다시 현대 중공업 경비들이 물을 쏘아 대고 있다. 취재 수첩이 다 젖어 버렸다. 채 젖지 않은 다른 종이를 꺼내 기록을 해보려 했지만 수성펜이라 쓰는 동시에 바로 다 번져 지워진다. 녹취기도 카메라도 제 구실을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젖어 버렸다. 할 수 없다. 더 이상 젖지 않는 유일한 기록수단, 나의 뇌만이 젖지 않았다. 아니다, 집회 참여 느낌을 묻는 나의 말에 그저 먹먹하다고만 한 노동자의 말처럼 나도 너무 먹먹하다. 먹먹한 뇌, 무엇을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을까?
▲ 우리 어찌 따뜻한 잠자리에 편히 잠들 수 있을까 |
이 글을 쓰는 지금, 서울로 간 사람들은 무사히 도착했을까? 집회를 마치고 차로 고작 삼십분정도 걸리는 집까지 오는 동안 나는 차안에서 얼마나 한기에 떨었던가. 두터운 솜파카는 깊이 물을 빨아들여 속옷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서울까지 갈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젖은 옷 때문에 몸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한 며칠, 호되게 감기 몸살 할 일이 뻔하다. 경비대들이 던진 쇠조각에 깨져버린 카메라 렌즈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기자의 얼굴이 눈에 어린다. 얼굴을 맞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던 주변 사람들의 위로는 그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주변의 위로에도 깨진 카메라만 하염없이 만지던 그의 손길은 안타깝다. 경비대들에게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며 호송차에 실려 병원으로 간 노동자의 피는 멎었을까? 물폭탄에 젖고 이리저리 난장판이 되어버린 노상에서 오늘 밤은 어떻게 동조 철야 단식을 이어갈 것인가? 노상에다가 바닥까지 젖어버렸고 주변은 온통 물바다다. 또 얼마나 추운 밤이 이어질 것인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 젖은 몸을 말리고 깨진 카메라를 다시 수리하는 동안 세월은 갈 것이다. 병원을 다니며 깨진 머리를 치료하고 약을 먹는 동안 상처는 아물고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질 것이다. 우리가 굴뚝 앞을 돌아 나갈 때 까마득한 굴뚝위에서는 새처럼 날개를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높이 손을 들어 흔드는 네 개의 날개. 새라면 날수라도 있으련만...... 스물 여섯날이 지났다. 우리가 길을 가고 차를 타고 밥을 먹는 동안 모이처럼 작은 초콜렛과 물을 나눠 마시며 동선없는 공간에서 둥글게 둥글게 맴도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도 그곳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나는 불편하다
뜨거운 라면국물을 훌훌 마시고 담배 한대 피웠으면 좋겠다는, 굴뚝에서 전해진 이영도 전 수석 본부장의 편지글을 읽고 난 후 난 라면을 먹질 못한다.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큰아들이 소포로 보낸 라면 한 박스가 굴뚝 앞 노상 숙소에 놓여 있는걸 봐버렸다. 오래도록 라면을 먹지 못할 것 같다. 만삭의 아내. 먼발치에서라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부른 배를 안고 집회장에 나왔다는 노동자 김순진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불편하다. 성한 내 몸이 불편하고 엄마, 아빠에게 응석 부리는 내 아이들이 불편하고 따뜻한 잠자리가 불편하다.
▲ 이영도 전 수석 본부장이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라면 한그릇, 큰아들이 소포로 아빠에게 보낸 라면은 결국 굴뚝에 닿지 못했다 |
영남 노동자 대회에 참가한 나이가 지긋한 한 여성 노동자가 말씀하신다. ‘지금 저 곳에 있는 노동자들 나이가 얼마쯤이냐, 옷은 따뜻하게 입고 있느냐, 글뚝이 너무 높아. 100미터라는데.... .’ 굴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분이 한말씀 더 하신다. ‘저 집 부모는 자식이 저렇게 있는데 어떻게 따뜻한 잠을 자겠나’
그들이 굴뚝위에 올라간 후 끝없는 자기 검열이 시작되고 있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행복은 정말 자유인지 행복인지. 왜 같은 시간, 비슷한 공간을 이웃하며 사는 동안 누군가는 굴뚝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고 누군가는 더운 밥을 먹고 따뜻한 잠을 자는가. 누군가는 가족을 굴뚝위에 두고 눈물조차 말라버린 팍팍한 삶을 견뎌 내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뒹굴며 행복한 하루를 보내도 되는건가. 내 삶은 과연 정당한 건가. 오늘 하루를 살아낸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이 고통스런 검열이 지나면 정화될 건가. 맑은 얼굴로 세상을 투명하게 응시할 수 있을 건가. 끝없는 물음의 연속이다. 더 큰 적을 물리치기 전에 내 안의 적들과 싸우는 일. 나를 부수고 나를 세우는 일. 삶의 영원한 숙제이다.
우물에 대한 기억
오후 다섯시, 영남 노동자 대회 본대회를 마치고 동구 현대 중공업까지 행진을 한 시위대열이 굴뚝 앞으로 모여 들고 있다. 굴뚝 아래에 모인 사람들이 가득할 때 갑자기 현대 중공업 경비대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막아서는 사람들을 향해 발길질과 몽둥이가 날아 든다. 순식간이다. 바닥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다시 날아드는 발길질. 헬멧으로 꽁꽁 숨긴 그 얼굴은 무슨 눈빛을 담고 있을까? 사람들이 쓰러지는 사이 반대편에서는 여러 번을 잇대어 묶은 긴 줄이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쓰러지면서까지 경비들로부터 지키려 했던 줄. 굴뚝위의 두 사람이 내린 줄이 땅에 가까워 오고 있다. 누군가 줄을 당겨 황급히 물품이 든 봉투를 줄에 묶고 있다. 다시 줄이 위로 당겨지고 있다.
어린 시절,동네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어린 아이가 빠져 죽었다고도 하고 밤이면 그 슬픈 영혼이 내뱉는 울음 소리가 우물을 덮은 널빤지를 밀고 새어 나온다는 깊은 우물. 우물이 담고 있는 어둠에도 불구하고 물맛은 달고 시원했다. 우물에 달린 나무 두레박은 내 손에까지 돌아 올 기회가 없었다. 해가지는 순간까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다니며 부지런히 물을 길어 올리던 두레박. 튼튼한 밧줄을 매단 그 두레박의 줄이 어느 날인가 깊은 우물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렸다. 두레박은 우물과 한 몸이 되었다.
그 후, 난 아버지가 깡통의 양쪽에 구멍을 내서 밧줄을 걸어 만들어 준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깡통이 우물에 닿았을 때의 그 마찰력과 보이지 않는 우물 속을 휘휘 저어 깡통 가득 물을 담았을 때의 충만감을 잊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스르르 줄이 우물 속으로 흘러 들어가 몇 번이나 더 두레박을 놓쳤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두레박을 만들어 다시 우물을 퍼올리곤 했다. 우물 속에 잠긴 수많은 두레박들, 한때는 희망을 길어 올리던 그 빛나던 연장들이 어느 순간 줄이 풀려 깊은 물속에 침잠했지만 또 누군가의 두레박에 의해 건져 올려지기도 했다. 놓친줄 알았던 두레박을 우물속에서 다시 건져 올리던 날, 우물속엔 정말 어린 생명이 살고 있어서 이 두레박을 우리에게 돌려 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듯 거세게 달려드는 물줄기 |
중공업 경비들이 쏘아대는 미친듯한 물줄기가 필사적으로 줄에다가 물품을 묶는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듯 퍼붓는다. 물품을 무사히 굴뚝위로 보내기 위해 사람들이 몇겹을 둘러싸고 있다. 물품 공급을 위한 밧줄을 보호하려 몇겹을 둘러선 사람들을 향해 경비들이 칼날같은 물폭탄을 퍼붓는다. 아래에서 줄을 잡고 위에서 당기는 식으로 세 번이나 물건을 올려 보냈다. 중간에 경비들이 휘두른 낚시대에 밧줄이 걸렸지만 팽팽한 밧줄은 곧 낚싯줄을 끊어 버렸다. 밧줄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이 나는 굴뚝위를 올려다 보았다. 그 옛날 깊은 우물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던, 두레박을 건져 올리던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깊은 우물 속의 물이었을까? 굴뚝위의 그들이 당기고 있는 것은 밧줄이 아니라 우리들의 간절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 밧줄을 타고 물품이 올라가는 사진 밑글은 '그들이 길어 올린건 우리의 간절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출처: 울산노동뉴스] |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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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식 르포작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글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