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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포만의 횃불들이다

[기고] 미포조선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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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촛불의 온기라도 빌리고픈 차가운 밤이었다. 미포 조선 정문앞에 높이 치솟은 크레인 위에는 푸르른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하나,둘, 셋. 키재기를 하듯 나란히 떠있는 별. 어느 시인의 시처럼 별들이 좀 따뜻했으면 정말 좋으련만 어쩐지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별들은 시리도록 차가워만 보인다.

겨울 추위가 막 시작된 11월 19일 저녁, 울산 현대 미포조선 정문 앞에서 다시 촛불이 지펴졌다. 안간 힘을 쓰며 불씨를 지켜가던 고된 여인네들처럼,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다시 촛불을 하나씩 들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로 앉기 시작했다. 도로쪽으로는 이미 전경차들들 빽빽이 들어서 집회를 막고 있고 회사 정문앞으로는 직원인듯한 사람들이 막고 있다. 막고 막아도 막을 수 없는 소리, 휘몰아 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혀 오는 거센 억압에도, 동지가가 하늘 높이 올라가 넓게 퍼졌다. 사랑,영원한 사랑,너는 나의 동지.

‘어머님, 아버님, 죄송 합니다.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이 아픔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해요. 어머님...... . ’

아픔을 용서해 달라는,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아픔을 용서해 달라는,한 남자의 느리고 애틋한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집회장을 덮고 있다. 이홍우, 올해 서른 여덟살 난 젊은 노동자, 지금 정문 앞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는 미포 조선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 여기에 있을 뿐 지금 그는 여기에 없다. 지난 11월 14일 이른 아침, 그는 절박한 유언을 담은 녹음기를 가슴에 품은 채 미포 조선 공장안 건물 4층에서 목에 줄을 매달고 투신했다. 목이 부러지고 폐가 찢어지는 치명적 상처를 입은 그는 긴 수술을 마치고 지금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여보, 내 진짜 우리 아들 딸한테 너무 못난 아빠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사랑하고 앞으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들아, 딸아, 이 좋은 세상에 태어 나서 이 아빠가 못 볼 꼴을 보이고 먼저 가는 것 같다. 진짜, 가족 사랑해요..... 노동자가 억압받고 탄압 받을 때 조합에서 뭐했습니까? 조합에서 뭐 했어요. 조합에서는 이런 일 일어 나는 줄 알아요? 몰라요? 왜노동자가 아프고 힘든데 현장에서 감시 당하면서 일해야 하고 이게 현실입니까? 이게 노동 조합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

그의 목소리는 눈물에 막혀 자주 끊어지곤 한다. 미포 조선의 정규직 노동자인 그는, 지난 7월 11일 대법원으로부터 미포 조선의 노동자로 지위확인을 받은 용인 기업(미포 조선 내주 하청, 2003년 1월업체 폐업) 노동자들의 복직 요구를 하는 선전전을 벌였다.

‘이홍우 동지가 현장에서 일하다 다쳤는데도 사내 물리 치료실도 이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팀장은 니가 좋아하는 투쟁이나 하라며 비아냥거리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홍우 동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최근에 현장 조직들이 연대해서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선전전 활동을 해왔는데 그 이후로 사측의 탄압이 아주 노골적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얼마전에 정직 한달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관리자들은 활동가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휴식 시간,중식 시간이 일분이라도 넘어가면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면서 탄압을 합니다. 그리고 잔업과 특근을 아예 못하게 합니다. 사실 활동가들도 가정이 있는데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만만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잔업 특근 통제 받으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는게 현실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측의 노골적 탄압이 이홍우 동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현대 미포 조선‘현장의 소리’김순진 의장 인터뷰 中(울산노동뉴스)

[출처: 울산노동뉴스]

지난 10월 25일, 울산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를 위한 체육 대회에서 나는 미포 조선의 또 다른 정규직 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현장 투쟁을 벌인 첫날부터 바로 탄압이 들어왔고 그가 속한 현장 조직에서는 손끝을 베어내 혈서를 쓰며 현장 탄압에 맞섰다. 그의 가운데 손가락 끝은 꾹 누르면 붉은 피가 금새라도 뚝뚝 떨어질 만큼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상태였다.

결혼한지 오년만에 얼마 안되는 퇴직금에 대출을 오천만원 얻어 집을 마련했다는 그는 점심 시간을 이용한 선전전에 함께 했다가 회사에 찍혀 특근, 연장 근무까지 모조리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잔업을 못하니 백삼십만원 정도의 급여만 받는데 대출 이자 내고 아이 양육비를 제하면 당장의 생활비도 해결하기가 벅찰 듯 했다. 그러나 그가 신문 배달을 해서라도 생활비를 충당하며 투쟁을 계속 하겠다 하니 회사에서는 이번에는 같은 반 노동자들에게도 잔업, 특근 등의 연장 근무를 하지 말라고 했다. 쉬는 시간도 일이초 간격으로 조이며 같은 반 사람들을 괴롭히니 그는 옳은 일을 하면서도 주위에 자꾸 미안해진다고 했다. 가시 밭 같은 그의 일터, 그는 이미 이 길 위에서 많은 상처가 나 있었다..

“과장, 부장, 팀장들이 네 일이 아니면서 왜 용인 기업 일에 나서냐, 다 자기들 알아서 살아간다면서 회유를 해요. 저도 이전엔 용인 기업 아저씨들 얼굴도 잘 몰랐어요. 하지만 그 분들 해고되고 오년간 쓰레기 줍고 우리 아파트에서 전단지 돌리는 일하며 먹고 살려고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 내가 다 봤어요. 그런걸 보니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가 돕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우리 부장님께 그랬어요. 만약 부장님이 해고를 당하더라도 나는 똑같이 할거다고요. 제가 열여섯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했고 여기 미포조선은 입사 육년 차인데 정말 갑갑하고 힘들어요.

밖에서 볼 때는 미포 조선이 대기업이니 안에는 다 엘리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겪어보니 중소 기업보다 더 못해요. 회사가 그렇게 만들어요. 말 잘 듣는 사람이 필요하지 일 잘하는 사람 필요 없다고, 너 하나쯤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자꾸 노동자들에게 주입해요. 관리자들이 왜 그렇게 노동자들이 번 돈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그렇게 세뇌시키는지 너무 답답해요.”

그 날, 비정규직 노동자 연대 체육 대회에는 미포 조선 정규직 노동자들이 용인 기업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 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의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일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미포 조선 노동자들의 연대 투쟁은 각별하다. 다른 대기업에 비해 미포 조선 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가 열악하고 노동조합이 현장의 노동자들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도 한몫했겠지만 미포 조선 현장의 노동자들을 만나 보니 그들에게는 사람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있었다. 정규직, 비정규직을 떠나 힘든 동료들에 대한 애틋한 인정이 살아 있었다. 껍질만 단단해진 우리 노동 운동이 잃어버리고 온 것, 미포 조선 노동자들에게는 그 마음이 살아 있었다.

지난 여름, 미포 조선 내주 하청이었던 용인 기업이 미포 조선 노동자 지위 확인 상고심에서 승소 판결이 난 며칠 뒤 나는 용인 기업 권오균 지회장을 만나러 방어진으로 갔다. 알고 지내는 분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인터뷰 요청이 많이 오지만 좀체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우리가 만난 시간도 그가 막 일을 마친, 밤 열시가 넘어 가는 늦은 시간이었다. 생업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던 그의 부탁으로 지역 신문사 기자와 함께 동행한 길이었다.

칠월 중순의 무더운 여름밤이었지만 방어진바닷가에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날, 우리를 만나러 오는 길에 야외용 자리를 가져 올려고 했다는 그의 말이 이후에도 자주 아프게 떠올랐다. 커피값 조차도 무거웠던 그의 삶은 너무나 가난했다. 그날, 차라리 자리를 깔고 바닷가에 앉아 쓴소주를 마시며 인터뷰를 했다면 마음은 좀 편했을까? 대법원의 판결로 복직의 희망이 보이긴 했지만 이미 2003년 해고 이후 지난 오년간의 삶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을 깨뜨려 놓은 뒤였다. 힘겹게 버텨온 삼십여명 용인 기업 노동자들의 삶은 이미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출처: 울산노동뉴스]

“저희 용인기업 노동자들이 평균 근속 연수가 현재까지 한 이십년 이상 되요. 초창기 미포 조선 창사와 함께 용인 기업도 성장해 왔죠. 그 당시는 노조가 안생겼을 때니까 직영이나 하청이나 형평성이 다 같을 때였죠. 지금 저 같은 경우는 현재까지 삼십년이 다 되었으니 오랜 세월 같이 일을 해오며 참 고생도 많이 했죠. 일을 하는 와중에 미포 조선 노조가 설립되고, 우리는 노조에 가입을 못했어요. 그래도 꾸준히 일을 계속해오다 우리가 일하던 수리선이 사양길에 접어 들었죠. 왜냐하면 수리선이 국내에선 3D업종이라 해서 베트남으로 넘어 가고 미포 조선은 신규 사업부로 전환을 하는 과정이고, 우리가 그 희생양이 된거죠.

과거에는 내주 하청은 원청에서 거의 다 흡수를 하고, 우리는 회사의 필요에 의해서 계속 내주 하청으로 있었는데 외주로 전환하라 하니까 우리도 원청으로 흡수를 해달라, 마지막까지 고생을 하고 직영이 못하는 일 우리가 다 했으니까 미포 조선으로 흡수를 해달라고, 사장을 만날려고 해도 못 만나게 하고, 회사의 요구는 우리더러 내주에서 외주 하청으로 전환을 하라 그러는데 우리는 그 말을 안들었어요. 우리는 직영으로 전환해야 한다, 오랜 세월 미포 조선과 함께 했으니 직영으로 전환해 달라고 하니까, 한 일년 육개월 일을 안시키더라고요. 나와서 고생한지가 오년 육개월인데 회사에서 억압받던 시절까지 합하면 한 칠,팔년은 고생한 것 같아요. 결국 새로운 사장이 부임해 오면서 우리를 해고 시켰죠. 물량을 안주기도 해보고 도저히 말을 안들으니까 자체적으로 폐업하는 식으로 유도시키더라구요.

그 당시 저희가 법적 자료를 준비했죠. 우리가 이렇게 물러설 순 없다 그래서 저희가 그 당시 이런 사례들에 대해 대법원 판례도 찿아 보고 존속관계가 뭔가 하는 것도 알아보고, 회사에 오래 있다 보니 중간 관리자들하고도 잘 알고 하니 대화도 해봤어요. 그래도 회사 통치권자가 그런 방침이 서버리니까 뭐라 말을 못해요. 조직사회니까. 우리 용인기업이 상도 많이 받고 참 열심히 한 업체인데 버릴 때는 이렇게 냉정하게 하는지, 우리 동지들이 다 나이가 들어 귀도 먹고 몸도 아프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는데 회사에서 냉정하게 그럴 때는 앞이 캄캄하더라구요. 최대한 사장 면담 좀 해보겠다고 떼도 써보고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질 않다가 이천 삼년 일월부로 해고가 되었죠. 해고가 되어도 우리는 회사 앞에서 열심히 투쟁을 했어요. 정몽준 사무실, 회사 정문 앞에서도 투쟁을 하고 박일수 열사 투쟁때 거기서도 많이 했죠. 저는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 한번 잡았다가 가처분 신청 받고 없는 와중에 벌금까지 내고......

[출처: 울산노동뉴스]

다행히 대법원 판결은 이렇게 났지만 그 당시 우리 서류를 보면 인사권 문제라든가 누가 봐도 증거가 많은데도 지법이나 고법이나 심지어 노동위에서도 인정을 안해줄 때 대한민국 법은 정말 가진 자들의 법인가, 심지어 중앙 노동위에 갔더니만 판결문을 회사에는 하루 전에 주고 우리한테는 당일 날 주고 법이 너무 가진 자들의 입장에만 서니까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우리가 불법 파견 아니면 위장 도급인데 처음엔 노동부에서도 인정을 안했죠. 나중에 재조사해서 불법 파견으로 판정 났죠. 이런게 대법원까지 와서 이렇게 밝혀진다는게 육년이란 세월이 너무 아프죠. 그동안 우리 반원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가정 파탄으로 이혼한 집도 있고 술중독이 되고 우울증이 와서 지금도 약물 치료를 받고 있고 이런것 보면 이건 완전히 한 가정이 기업의 횡포에 무너지는게 한순간이죠. 그나마 저희는 삼십 명이 똘똘 뭉쳐서 지금까지 온게 좋은 결과가 나서 다행이죠”

열쇠 판매, 건설 공사장 노동일, 전단지 배포등 안해본 일 없이 고생하며 살아온 동료들의 이야기를 하는 권오균 지회장 또한 큰 아들이 다니던 대학을 중퇴했고 작은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군에 입대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고통의 책임을 미포조선 원청에 물어야 한다고 했다.

“회사 앞에 보면 이런 글이 있어요. 내가 잘되면 가정이 잘되고 가정이 잘되면 기업이 잘되고 기업이 잘되면 나라가 잘된다는데 그런데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어요. 내가 잘못되어야 기업이 잘되는 세상이니....... .”

10월 25일, 비정규직 연대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는 운동장에서 다시 권오균 지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한창 족구가 진행 중인 경기장 한가운데서 그는 심판을 보고 있었다. 여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와 용인 기업 노동자들은 이전에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지금은 복직 투쟁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나고 삼개월이 넘었죠. 고등법원에 파기 환송 되고 난 후 저희 동료들이 전부 하던 일들을 그만 뒀죠. 지금 스물 다섯명 정도다 결합하고 있는데, 회사의 의도는 파기 환송된 재판을 계속 시간을 끌려는 거죠. 이미 육년 동안 충분히 오십여 차례 준비 서면이 오고가고 공방을 했고 결국 고등 법원으로 파기 환송된 것을 다시 초기화시킬려고 그런 식으로 회사에서 시간을 끌려고 해요. 재판이 다시 부산 고등법원으로 오자 회사에서는 다시 인맥과 자본을 동원해서 부산에서 알아주는 변호인단을 꾸렸고 고법에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출처: 울산노동뉴스]

회사에서, 저 사람들이 요구하는게 이런식으로 해서 최소한 고법 재판에서 임금이라도 깎을려고, 그리고 우리 용인 동지들 정년이 당시에 오십 오세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끌어 정년을 넘는 인원을 열명정도 더 줄일려고, 최소한 그 정도를 얻을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우리 동지들이 생계를 포기하고 아침, 저녁으로 문현관 삼거리에서 출근 투쟁을 계속하면서 지역 사회에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하고 있어요. 지금 회사에서 준비 서면이라고 내는데 그게 뭐냐면 증인을 받아 달라, 예전에 용인 기업에 있다가 지금 미포에서 외주 하청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두 분이 그런 분이 계신데 1차,2차,3차까지 내세우면서 이분들을 회사측 증인으로 받아 달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 분들이 두 번까지 서면으로 이렇게 해줬는데 이젠 아예 증인으로 내세울려고 하니까 얼마나 곤혹스러우시겠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프레젠테이션이라고, 영상물로 다시 모든 것을 초기화해서 답변을 하겠다고 하고, 또 하나는 다시 현장 조사를 하자는거예요. 이미 현장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서 자꾸 시간을 끌려고 하고 있어요. 고등법원에서 3차 심리가 10월 31일날 열려요. 그래서 우리 동지들이 다음주부터 1인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3차 심리를 봐서 서울 쪽에, 현대 그룹은 사실 정몽준 속에 다 속하거든요. 미포의 현 사장, 실세라고 해도 우리 용인 기업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없어요. 사건이 너무 크니까. 그래서 서울로 가서 정몽준 사무실과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요.

현장 안에서는 지금 세 개의 현장 조직이 우리 용인을 위해 움직여 주고 있어요. 현장의 소리 김순진 동지가 이 문제를 현장에 알려 내다가 엊그저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요, 여러 가지 현장 조직을 탄압을 하고 용인기업 사태에 나서지 말라고, 우리는 금속 노조와 더불어 지금 이 문제를 알리고 지금 또 당, 민주 노동당도 이 문제에 대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고 이 싸움은 대법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가지 않을까, 하여튼 우리는 촛불 문화제도 열고 투쟁도 하면서 사회에 이 문제를 알리는데 고법에서 이 문제를 하루 속히 종결해 주길 바래요. 우리 동지들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요. 생계 문제가 걱정이고 또 집사람이 암투병중인 동지도 있고 우울증, 알콜 중독, 또 따님이 학원을 다니면서 생계비를 벌어 아빠를 좀 도울려고 하다가 화상을 입었어요.

어떤, 말도 못할 어려운 환경에 우리가 처하고 이걸 빨리 매듭 지을려고 하는데 지역 사회에서 이걸 받아 안고 좀 도와 주셨으면 해요. 대법 판결이 났는데도 회사는 끝까지 자기들 의도대로 끌고 갈려고 하는 그런 의도를 사전에 막을 방법을 찿고 있는데, 금속이나 지역 본부에서도 이 문제를 우리 용인 문제로만 보지 말고 이걸 비정규직 투쟁의 대표적 사례로 함께 막아낼 수 있는 그런 모색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예상대로 고등법원의 판결은 12월로, 다시 내년으로 점점 더 미루어지고 있다. 그사이 미포 조선 노동자들이 정직을 당하고 탄압을 받고 마침내 한 젊은 노동자가 삶의 벼랑 끝에서 몸을 날렸다. 그의 가슴속에는 회사를 향해 ‘올라 오지 마’라는 마지막 절규가 담긴 녹음기가 담겨 있었다. 목숨을 건 마지막 절규마저 외면당한 채 그는 폭포처럼 피를 쏟아내며 쓰려졌다. 1차,2차 수술을 마치고 3차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노동조합은, 노조 위원장은 단 한번의 발걸음도 하질 않았다. 노동자들은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이 배신을, 이 분노를 잊지 않을 것이다. 미포만의 바람이 차갑다. 너무 추운 겨울이다.
덧붙이는 말

서해식 르포작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글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울산노동뉴스와 동시게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