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었다.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노동자 민중들과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세력과 맞서 싸우는 일에 내내 머뭇거리거나 망설였다. 힘의 역학상 사회주의를 전면화, 공론화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거나,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대체할 대안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사회주의자, 사회주의 정치세력, 사회주의 운동을 너무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번 이명박 정부와 공안세력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에 대한 기획적, 의도적 침탈은 바로 ‘어이없는 일 vs 예상된 일’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공론화 작업이 지체된 것에 대한 일종의 역사의 복수라는 측면도 함께 담고 있다.
‘아직도 사회주의냐’라는 비난과 조롱은 논외로 치더라도, 사회주의는 지난 10년 동안 진보의 그늘막에 갇혀 있었으며, 진보의 주변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었다. 진보도 힘겨운데 사회주의는 더더욱 어렵거나 안 된다는 기류가 암묵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든 운동은 현실이라는 괴물 앞에서 그저 사안별 대처를 하기에 급급했으며 그마저도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따라서 단 한 번도 현실이 된 바 없다. 사력을 다해 현실을 쫓으면 쫓을수록 현실은 신기루 마냥 하염없이 흩어지거나 사라지곤 했다. 아무리 현실을 쫓고 현실을 짝사랑해도 그 현실은 늘 우릴 비켜서거나 배반했다. 하지만 현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현실은 스스로 능동적일 수 없으며,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현실은 언제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한낱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바로 그 현실을 있게 한 데 우리 역시 한 몫 거들었다. 우리 역시 오늘의 현실을 낳게 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에 대한 탄압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이 어이없는 현실이든, 예상된 현실이든, 아니면 역사의 복수이든 간에 이미 엎어진 물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지금부터는 피차일반이며, 피차 마찬가지다. 벌어진 현실을 누가 담아낼 것이며, 누가 차지할 것인가는 정해져 있지 않다. 먼저 맞았다고 계속해서 맞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북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적용이 틀렸다는 말은 반만 맞다. ‘북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사상적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이유로 범죄시하거나 처벌을 하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촛불 집회에서 특별하게 도드라진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논리도 맥락상 위험할 수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그 연원과 관계없이 자신들을 분명한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 천명하고 있으며, 촛불 집회에서도 최선을 다해 개입하고 참여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며, 더구나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명박 정부가 공안탄압을 저지르고 있으며 공안정국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신권위주의’의 도래, 또는 ‘5, 6공’으로의 회귀라는 주장도 할 수는 있다. 특히나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까닭에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위협받고 있으며, 어느 활동가의 말마따나 이번 사건을 대하는 데 무슨 “높은 정치의식과 복잡한 사고가 필요치 않은” 것도 맞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은 ‘5, 6공’ 시대와는 너무도 다른 정세이다. 대중적 노동운동이 성립되어 있는 것은 물론 ‘진보세력’이 의회에 진출해 있고, 시민사회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비록 한국 민주주의 또는 국내 지배세력의 후진성과 폭력성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런 만큼 한국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국 사회는 이미 충분할 만큼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한 전형에 속한다. 이번 사건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가 부족해서 발생한 측면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성숙이 낳은 결과이다. 한국 사회는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 아래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과 형태를 띠고 있다. 지난 대선, 총선 과정과 결과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끝없는 갈구가 결코 인류의 미래일 수는 없다. 위기로 치닫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더 이상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도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또는 반자본 운동이 더 이상 한낱 개념이나 구호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왜 가장 현실적이며, 그것이 왜 가장 빠른 방법이며, 그것이 왜 가장 옳은 길인가를 놓고 이제 정면 승부, 정면 돌파를 해야 할 때이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고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대로 과제이다. 그렇지만 그 과제도 이제 세상 밖으로 나와서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세우고 하는 과정에서 단련시키고 다듬어가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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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택 님은 노동자의힘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