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주체들의 목소리로 운동의 과제를 밝히는 정치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정치대회는 활동가대회(9월 14일)와 문화제(9월 15일)로 진행된다. 활동가대회에서는 불안정노동철폐운동의 주체형성에 대한 세부 주제를 제출하고 그에 대한 조직위원회 및 투쟁 주체들의 발언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정치대회 조직위원회는 세 번의 기고를 통해 활동가대회에서 논의될 각 주제의 기조연설문을 제출한다.
고용불안과 열악한 노동조건, 생활 및 노동의 불안정성, 낮은 조직율과 노동권 박탈 등을 특징으로 하는 ‘불안정노동자’가 노동자 계급의 다수로 등장하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조직화가 노동운동 활성화의 중요 사안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들 중에서 많은 경우는 불안정노동자들을 투쟁과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기보다는 사회의 약자로서 배려와 돌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화하고 주체화하는 것의 의의는 단지 노동조합 조직률 향상을 위한 필요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주체화는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일방적 공격을 무력화하고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핵심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정노동자 주체화는 계급투쟁 전선 복원을 위한 핵심 지점
오늘날 대자본은 중층적인 하도급 구조를 형성하고 불안정노동자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며, 그에 따른 노동자 분할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대자본은 축적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부의 노자간 모순을 외부로 전가하여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등 불안정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자신의 수익을 획득해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노동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노동자계급 연대를 통해 대자본을 정점으로 하는 중층적 모순전가와 분할 구조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개별사업장 단위에서 형성되는 당장의 물질적 이득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기존의 조직된 노동자들이 이렇게 단기적 실리를 중심으로 투쟁에 나서게 되면, 투쟁의 성과가 노동자 계급 전반의 성과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정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모순의 집약 지점인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등의 불안정노동자가 직접 정치의 주체로, 투쟁의 주체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불안정노동자의 주체화, 조직화는 대자본의 비용과 위험의 전가, 노동자 분할 전략을 무력화하고 자본주의 노자관계의 모순을 드러내는 핵심 지점인 것이다.
노동자 계급 연대를 위한 불안정노동자 주체화
지금까지의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들은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간 연대의 확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조건이 양호한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조건이 열악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일종의 시혜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공동투쟁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기대하고 의존하는 태도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대와 의존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는 한편,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접 문제해결에 나서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의존하려고만 한다는 불만을 갖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들이 직접 문제해결의 주체로, 정치의 주체로 서지 못한 결과이다. 불안정노동자들이 주체로 조직화되어 집단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때, 정규직의 시혜적 실천이나 비정규직의 의존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주체화된 불안정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계급적 단결을 요구하게 되면, 기존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도 자신들만의 단기이익에 집착하는 협소한 시야를 벗어나 노동자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투쟁과 실천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안정노동자의 주체화는 진정한 노동자계급 연대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실험
반노조적인 정부에 의해 탄압받고 노동권이 제한되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기업단위의 협상을 통해서 권리를 확장해왔다. 그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노동권에서 배제되는 노동자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기업단위의 노동조합 활동 구조에서 노동권이 배제된 상태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조건에서 불안정노동자를 주체로 조직화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일정한 규모가 있는 사업장을 중심으로 기업단위의 노사관계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일부 실현해왔던 노동조합 운동의 방식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인 사업장 단위 조직화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지금의 현실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화는 상당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오늘날 대자본은 다단계의 하도급 위계를 형성하고 다양한 불안정노동자층을 확대하여 노동자들 간 위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위험과 비용이 연쇄적으로 생산위계의 하위로 전가되는 구조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화는 외부로의 모순 전가를 담보로 한 노사간 담합 가능성을 높인다. 사업장 단위에서의 내적 연대와 단결이 사업장 외부의 계급적 단결로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의 분할전략에 활용되기 쉬운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불안정노동자들은 하나의 사업장 단위에 머물러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화는 한계를 지닌다. 불안정노동자들은 고용 불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실직과 이직, 새로운 사업장으로의 입직을 반복하면서 빈번히 사업장을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따라 사업장 단위를 넘어선 지역적,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조건이 결정되고 있으며, 사업장 단위가 아니라 지역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개별 사업장에 국한된 운동, 작업장의 노동조건에 국한되고 있는 현재의 운동으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주체화의 성과를 내기 힘들다.
사업장 단위 조직화가 한계를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한 투쟁 사안은 사업장 단위를 넘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자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투쟁해야 할 수많은 제도적인 문제들이 중첩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청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수탈과 모순전가의 문제, 최저임금의 현실화 문제, 노동자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는 인력거래업체의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무수히 많은 과제들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첩적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집단적으로 벌이려면 단위 사업장을 넘어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단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개별 사업장을 넘어서는 포괄적 조직화 전략이 요구된다. 개별 사업장이라는 기존을 틀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제를 설정하고 개별 사업장 단위 운동의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을 조직화하고 주체를 형성해나가는 시도가 요구된다.
포괄적인 조직화와 연대확장으로서의 산별운동
사업장 단위를 넘어서는 포괄적 조직화의 시도로서 지금까지 우리 운동은 산별노조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산별노조를 건설하고자 한 것은 개별 사업장, 개별 기업 단위로 대응하기 어려운 사안들, 개별 기업을 넘어서는 구조조정에 대응하고, 개별 사업장으로 조직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불안정노동자들을 조직화하면서 노조운동이 전체 노동자들의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산별은 냉정히 말해 건설한 것이 아니라 재편한 것이다. 개별 사업장으로 조직하기 어려운 비정규직, 중소영세사업장 불안정노동자들을 조직화하면서 조직을 확대 건설해나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조직된 노동자들을 가지고 기업별 조직을 산별 조직으로 재편한 것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사업장 단위를 넘어서려는 애초의 산별노조 건설의 문제의식은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사업장 단위의 질서는 여전히 강고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업장별 위계가 강화되고 있다. 외형적인 산별 조직화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대자본과 대공장 노동자의 이해가 핵심 의제로 다뤄지면서 노동 내 위계구조가 고착화되고 기업규모나 고용형태에 따른 노동자 분할이 심화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기업위계나 고용형태의 차이에 따른 위계와 분할을 넘어서 노동자들의 연대를 확장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산별노조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운동가능성을 창출해야 한다. 기업별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주체를 세우고 조직화를 시작해서 그 단위가 이후 기업별 시스템을 압도하게 하는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 운동의 출발은 개별사업장을 넘어서는 운동을 구체화할 수 있는 단위인 지역운동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사업장을 넘어 지역 조직화로
불안정노동자들이 하나의 사업장 단위에 머물러있지 않고 다른 사업장으로 빈번하게 이동하는 상황에서, 개별 사업장에 국한된 운동, 작업장의 노동조건에 국한되고 있는 현재의 운동으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주체화의 성과를 내기 힘들다. 오히려 개별 사업장 단위를 넘어서서 지역활동으로 운동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
사업장 단위를 넘어서는 지역 조직화와 운동은 기존의 운동으로는 할 수 없었던, 혹은 기존 운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첫째, 지역 단위의 조직화와 운동은 노동권과 생활권을 결합하는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으며, 이는 불안정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나아가 사회적 연대의 확장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운동이 될 것이다. 오늘날 저임금이 일상화되면서 특히 불안정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나친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고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며, 인간으로서의 권리 향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아가 일상화된 저임금은 보육과 교육, 의료서비스의 권리, 문화적 권리 등을 향유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더불어 생활의 권리를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 선언하고 이것의 실현을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투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그것의 출발은 ‘지역’일 수밖에 없다. 지역 차원에서 공공보육과 공공의료, 생활을 위한 권리들이 집단적으로 요구되고 형성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권 쟁취 투쟁은 단지 노동하는 자들만의 이해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안에서 살아가고 투쟁하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함께 쟁취해가는 길이다. 따라서 훨씬 보편적인 권리의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 권리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들의 공동체가 지역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만나고, 노동권을 넘어 생활권으로 우리의 권리영역을 넓혀 나갈 때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지역 단위의 조직화와 운동은 개별 사업장을 넘어 지역 차원의 노동조건 규제를 위한 투쟁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전개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하청기업에 대한 일방적인 수탈과 모순전가의 문제, 최저임금의 현실화 문제, 노동자 임금을 중간에서 착취하는 인력거래업체의 문제 등 불안정노동자들을 옥죄는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 사용주를 대상으로 하는 투쟁만이 아니라 지역 단위의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단위의 의제 설정과 투쟁은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개별 기업이 보장할 수 없다면 지자체나 지역 사용자단체가 책임져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 차원에서 일차적인 노동조건과 산업안전에 대한 관내 규준을 설정하고, 지역 사용자단체와 개별 사용자를 감시하고 강제하며, 영세사업장에서 확보할 수 없는 복지의 요구를 지역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해결할 것을 지자체와 지역 사용자단체를 대상으로 요구하고 투쟁할 수 있다.
셋째, 지역 단위의 조직화와 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문화혁신에도 기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은 기업별 노조를 기본으로 해왔으며, 산별노조의 시도 또한 기업별 위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역 중심의 조직화를 한다는 것은 기업별 형식뿐만 아니라 기존의 산별의 구획을 뛰어넘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역협약, 생활권에 대한 제기, 지역의 다양한 단체들과의 연대활동 등 지역단위 조직화와 운동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민주노조운동 또한 기존의 기업별 노조 중심의 형식과 투쟁의 틀에 맞춰서 사고하지 않고, 지역 중심의 투쟁과 조직, 지역협약이라는 새로운 운동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지역 단위 조직화와 운동은 기존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문화혁신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
공단지역 불안정노동자 전략조직화
지금까지의 관행을 뛰어넘어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주체화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철폐연대는 ‘공단지역 노동자 전략조직화’를 중요 사업으로 전개해나갈 것이다.
오늘날 하청위계의 하위에 있는 사업장들은 지역 공단별로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단지역 노동자 조직화는 공단을 중심으로 몰려있는 대자본의 영세한 하청기업 노동자들을 조직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청연쇄에 따른 모순의 집약지점인 중소영세사업장과 불안정노동자를 주체화, 조직화함으로서 대자본의 비용과 위험의 전가, 노동자 분할 전략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투쟁을 형성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공단지역 불안정노동자 조직화는 원청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노동 내 위계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줄 수 있다. 중소영세사업장 불안정노동자들이 공단을 단위로 대규모로 조직되고 주체화되면서 계급적 단결을 요구하게 되면 기존의 조직노조 운동에도 대폭적인 변화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한편, 공단지역 노동자 조직화는 사업장 단위를 넘어선 지역 차원의 공동투쟁과 운동 활성화를 의미한다. 공단지역 노동자 조직화는 공단 전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조직화를 추진하고 사업장이 아닌 지역단위의 의제를 설정하며, 기업별, 사업장별 임단협을 맺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사용자단체와 지자체를 대상으로 지역협약을 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용자 단체를 대상으로 한 지역협약을 통해 이미 하향평준화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지자체를 대상으로 노동자들의 교육과 의료, 주거와 생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단지역 노동자 조직화는 지역을 단위로 노동권과 생활권을 결합시킨 노동자 권리투쟁을 벌여나간다는 의의를 지닌다. 또한 그것은 공단을 단위로 하는 지역 차원의 집단적 노동조건 규제 투쟁이라는 새로운 실험으로서의 의의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