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 국회 앞을 지나던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서있는 나를 흘끔 쳐다본다. 검붉게 그을린 얼굴의 노동자들이 하는 1인 시위가 아닌 법률가라는 사람이 국회 앞에 떡허니 서 있으니 좀 이상한가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법이 사람을 죽이고 있느니 사람 살리는 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피켓. 그것을 들고 1시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건만 관심있게 보고 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우리가 살리자고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미 우리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고 우리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지만 그만한 대우는 커녕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그래서 삶 자체가 불안한 비정규직 노동자다. 언제 짤릴지 몰라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살아가는 내 가족이고 내 동료고, 나 자신이다.
내 주변만 봐도 장시간 노동과 차별로 인해 지치고 고단한, 거기다 항상적 고용불안에 우울증까지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거리만 나오면 노동자는 없다.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뭔가 얘기를 해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가. 모두 평생 고용이 보장된 철밥통 정규직인가. 아니면 잘 먹고 잘사는 고소득 자영업자인가 아니면 대기업 경영주인가. 우리나라 경제활동 인구 중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 즉 노동자는 전체의 반이 넘는다. 그 중 비정규직 노동자가 또 반 이상을 차지한다.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도 노동자를 한 두 명 쯤 가족이나 친구로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내 부모와 내 자식이 비정규직으로 설움속에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건 뭘 말하는 것인가. 비정규노동자와 관련한 법. 비정규직노동자를 죽이고 있는 법의 문제가 내 가족과 친구의 문제라는 것.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라는 것 아닌가.
서로 연결된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 뉴타운으로 돈을 벌었다면 서울 밖으로 쫓겨나간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의 연봉이 오르면 그 동료 누군가의 연봉은 떨어진다. 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같은 방식으로 연결된다.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보장과 임금보장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불안과 저임금에서 나온다. 어떤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줄이면서까지 정규직노동자의 처우를 거져 챙겨주겠는가. 정규직 노동자가 차별과 고용불안에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냥 한번 믿어보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악법폐지를 주장하며 투쟁할 때 힘을 보태자. 그 투쟁에 연대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글이라도 쓰자. 그것도 어렵다면 멀리서나마 연대의 마음이라도 갖자. 그들의 주장을 따지기보다 그냥 한번 믿어보자.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비정규직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 고용불안에 떨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 지금보다는 좀 더 행복한 세상으로 바뀌어 가지 않을까.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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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훈 님은 '노무법인 현장' 노무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