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정당한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인터뷰] 김순자 울산연대노조 과학대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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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를 만나러 가던 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대고 있었다. 이런 날에도 집회가 열릴수 있을까 걱정반 기대반으로 차를 내몰아 도착한 곳, 울주군 언양면 효정 재활원이 불과 50미터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재활원 측의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으로 투쟁 천막을 병원 앞마당에서 인근 하천 둔치로 옮겨 놓고 재활원 간병사 노동자들의 투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휴가를 내어 멀리 동구에서 이곳까지 달려와 밤을 새며 재활원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는 김순자 지부장. 쉰다섯이라는 나이가 도무지 믿기지 않을만큼 동안인 얼굴이다. 그러나 구호를 외치고 재활원측 관리인들과 맞서 싸우는 그의 모습은 오래된 나무를 보는듯하다. 흔들림 없고 오직 강단만이 있다. 그의 눈빛은 강렬하다. 무수한 비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밑둥지가 드러나도 다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 김순자 지부장은 그 세월을 견뎌냈다. 아니 이겨 냈다. 불과 사,오개월전까지만 해도 그는 풍파의 한가운데 있었다.

"입사해서 한 달 되었을 때 회식을 한다고 해서 갔는데 2시간 30분동안 밥도 못먹게 하고 가만히 기다리래. 높은 분이 오시니까 그 분이 오시기 전에 먼저 밥을 먹으면 안된다는거야. 난 대학 학장님쯤 되는 높은 분이라도 오는줄 알았지. 근데 그 높은 분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보니까 우리를 관리하는 관리 과장이네. 참 기가 막혀. 그 일을 당하고 보니 진짜 이건 아니다 싶더라"

재활원 노동자들이 병원 로비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는 동안 어두운 병원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김순자 지부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청소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꽃 심을 일 있으면 꽃 심으러 가고 학교에 뭔일이 있으면 죄다 했어. 참 자존심 상했지. 심지어는 우리들이 옷 갈아 입는 탈의실 문까지 노크도 없이 벌컥벌컥 여는거야. 여자 탈의실이라는게 여자들 옷갈아 입는 곳이쟎아. 근데 이곳을 아무나 벌컥 여는거야. 하루는 문을 열었는데 채 겉옷을 걸치지 못하고 민소매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복장 불량이라네. 참. 우리를 사람으로 안보는거지. 반말도 예사로 하고...”

[출처: 울산노동뉴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재활원쪽 직원인듯한 사람들이 나와서 로비의 의자를 끌어다가 2층 계단입구를 막는가 하더니 또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에 일어난 김순자 지부장은 껄껄 웃는다. "여기, 저기 문도 다 걸어 잠궈야지. 어, 저 쪽 문도 열려 있네" 김순자 지부장의 여유있는 대응에 약이 바짝 오른 재활원 직원들의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며 재활원 해고 노동자들은 "닭대가리리들이야, 안에서 문을 잠그면 뭐하노. 더워 죽겠네" 하며 닫힌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약이 바짝 올라 씩씩거리던 직원들이 제 스스로 풀이 죽어 돌아가 버리고는 로비는 한동안 고요하다. 말없이 피켓으로 할말을 다한 노동자들 ‘원직복직 쟁취’ “승리하는 그날까지 함께 합시다”

“이러다 너거 아프마 우야노” 김순자 지부장의 따뜻한 한마디가 간병사 노동자들의 마음을 감싼다. 아픈 사람들을 제몸같이 돌보던 간병사들. 이제는 그들이 아플까봐 걱정이다. 청소와 간병, 세상을 깨끗하게 매만지고 아픈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던 그들. 하지만 회사는 그들을 감싸안지 않았다. 아니, 싸안기는 커녕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다. 다 마신 종이컵 구겨 버리 듯,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위로 내동댕이쳐 쫓아 내버렸다.

밥을 달라

"첫 번째 요구는 그거였어. 일을 하는데 밥을 안주는거야. 학교에 식당도 있고 학생들도 교직원들도 다 거기서 밥을 먹는데 우리한테는 밥을 안주는거야. 일을 시키고 밥을 안주는게 말이 돼?"

김순자 지부장이 처음 일을 시작한 2003년, 학교 청소 미화원들의 임금은 하루 아홉시간 노동에 50만 원이 겨우 넘었다. 학교 식당 한끼 식대가 2000원이었으니 한 달 월급에 밥값 빼고 차비 빼면 남는게 없다. 더구나 절반 가까운 노동자들은 집안의 생계를 혼자서 꾸려 가야하는 가장들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도시락을 싸다니다가 나중엔 2만원씩 돈을 내어 우리끼리 밥을 해먹었어”

인간적인 대우를 해달라는 것, 밥을 달라는 것. 인터뷰를 하는 도중 나는 수십세기 이전, 아득한 봉건 시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듯 했다. 파리 혁명 당시 민중들의 요구가 ‘빵을 달라’가 아니었던가. 파리 민중들의 항쟁을 궁전 발코니에서 바라본 마리앙뜨와네뜨가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를 외면했던 잔혹한 왕정은 결국 단두대의 붉은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물러설 곳 없는 바닥. 그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들은 안다. 바닥은 명확하다. 치고 오를 일밖에는 다른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곳. 수백년전, 낯선 이방의 그들에게나, 2007년 오늘 이곳의 노동자들에게나, 결국 맨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사람들은 오직 하나, 단결하고 투쟁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 그 엄중한 진리를 깨달으며 잠시 마음이 젖어왔다.

“나는 학교에도 하청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어. 하청은 공장에만 있는건줄 알았거든. 하청은 노조도 하면 안되는줄 알았어.노조는 정규직만 하는건줄 알았어”

  참세상 자료사진

처음에 야간 청소일로 들어 갔다가 학교측의 일방적인 조정으로 주간 청소일로 옮기고부터 김순자 지부장에게는 본격적인 시련이 찾아왔다. 상대적으로 관리가 느슨한 야간에 비해 주간은 빈틈없는 관리 조직을 짜놓고 청소 미화원들을 달달볶아 대었다. 용역업체측 관리인, 학교측 관리인, 또 청소 미화원들중에 한명을 뽑아 감시하고 통제하게 하는 반장까지, 몇 명 안되는 청소 미화원들을 감독하기 위해 무려 4명의 관리인들이 눈을 번득이며 잠시도 그냥 놔두질 않았다.

“ 점심시간때면 하청업체 직원이 찾아와서 관리인들 말 잘들으라고 달달 볶아 대는거야. 정말 더러워서 못해 먹겠더라고. 그만 둘까도 많이 생각했지. 그래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만류를 하니 참고 또 다니고 그랬어”

그러던 어느 날, 연대노조가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그때 아는 동생이 노조를 가입해야 보호를 받을수 있다고 노조 가입을 권유했고 김순자 지부장을 포함한 열명의 노동자들은 연대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다.

“두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노조를 탈퇴했어. 아는 사람이 넣어준거니 그 사람 얼굴 보기 미안해 그만둔 동료도 있고, 또 노조 가입하면 당장 짜른다니까 오래 다니고 싶다고 그만 둔 동료도 있어”

떠나간 동료를 떠올리는 김순자 지부장의 목이 잠시 메이는듯 하다. 인터뷰 전 재활원 서지원 지부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서 지부장도 얼마전 투쟁을 접은 동지를 이야기하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함께 투쟁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함께 한다는 의미다. 그 길에서 동료를 보낸 사람들.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 그 고통이 전염되어 온다. 나도 가슴이 아리다.

이것은 당연히 이기는 싸움이다

1. 밥을 달라
2. 생리 휴가를 달라
3. 초과 근무 수당을 지급하라
4. 토요일 당직 근무시 근무수당을 지급하라


“싸움을 처음 시작할 때 나는 확신이 있었어. 이것은 이기는 싸움이다. 우린 정당하니까. 어느 누가 보더라도 우린 정당하거든. 더구나 과학대 이사장이 정몽준 국회의원 아닌가? 국회의원이 누구인가. 법 만드는 사람들이잖아.그런 사람들이 법 안지키는게 말이 돼? ”

노조에 가입한 후 처음으로 생리 휴가를 쉬던 날, 김 순자 지부장은 내심 마음이 떨렸다. 청소미화원 반장은 이제 큰일났다며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엄연히 법에 있는 휴가를 쓰는건데 당연한 것이다고 마음을 크게 먹고 하루를 꿋꿋하게 버티고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다음 날 출근했다. 출근하니 예상대로 학교는 난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그가 법적인 조항을 들이대며 반박을 하자 학교쪽은 의외로 조용해졌다. 김순자 지부장의 마음 속은 승리감이 일었다. "노조에 가입하고 스스로 권리를 얻으면 되는구나" 자신감을 얻은 김순자 지부장은 다른 부당함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8시 출근해서 6시가 퇴근이야. 점심시간 한시간 빼면 9시간 근무잖아. 8시간이 기본인데 우리는 한 시간 더 근무한거니까 초과 근무 수당을 달라고 했어. 정규직들은 꼬박꼬박 초과 수당을 다 받쟎아. 못 준다고 하네. 그러면 우리는 정규직과 똑같은 시간만 근무하겠다고 했어. 토요일 당직 근무도 그래. 우리가 돌아가면서 한 달에 몇 번씩 당직을 서는데 그 수당을 한푼도 안주는거야. 우리가 당직을 안서면 누군가를 사서 당직을 세워야 하는데 그건 다 돈 아닌가?. 근데 그 돈을 왜 우리에겐 못준다는건가”

마른 나뭇잎을 비틀어 물기를 짜내듯 실질임금 60만원을 주면서 참 많이도 짜먹었다.

“이 싸움은 당연히 이길수 밖에 없는 싸움이다”

“나는 확신한다. 정당한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단호한 그의 목소리가 재활원복도에 낮게 울려 퍼졌다. 효정 재활원 간병사 노동자들의 싸움도 그러하리라. 정당한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우리를 짜르려면 과학대 정문 앞에 무덤 여덟 개를 파라

2006년 12월 경이 되자 이제 청소 미화원들도 곧 짜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미 학교는 경비 노조에 가입해 있던 경비원들 뿐만 아니라, 연대노조에 가입해 있던 식당 아줌마들을 학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해고한 전력이 있었다 .이 와중에 학생들은 학교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었다.

예상대로 2007년 1월 22일에 현 용역업체의 사장 동생이 와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계약 해지를 통보 받은 환경 미화원 노동자들은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 대학 본관 앞에서 피켓 시위에 돌입했다.

“그래도 학장님은 많이 배우신 분이니까 우리들 사정을 들으면 이해해 줄거라 생각하고 학장님을 만날 볼려고 했어. 그러나 학장실로 가는 중에 교직원들한테 떠밀려 나왔지. 우리는 문을 막고 학장 면담을 요구 했어. 두,세시간 있으니까 직원들이 연대 노조 위원장을 불러. 아, 이제 우리 학장님이 위원장을 불러 무슨 일인가 들어 볼려고 하는구나 생각하고 기다렸지. 그런데 위원장이 없는 사이 남자 직원 일곱 여덟명이 학장을 둘러싸고는 확 문밖을 빠져 나가는거라. 막아 볼려고 했지만 무슨 수로 그 힘을 당하겠나”

[출처: 울산노동뉴스]

김순자 지부장은 청소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교수와 학장을 아주 신성스러운 사람들인줄 알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성실, 창의, 봉사를 이념으로 내세운 대학, 그 대학에서는 이제 갓 스물을 넘긴 푸르른 청춘들이 미래를 꿈꾼다. 그 청춘들에게 꿈을 불어 넣고 길을 알려 주는 사람들. 진정 교수가, 학장이 그런 존재들이라면 왜 그들이 신성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장은 면담을 요구하는 환경 미화원들의 위원장을 빼돌린 뒤 부리나케 도망치듯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 환경 미화원 노동자들. 그들은 학장이 몸담고 있는 대학교 학생들의 어머니이며 이모이며 고모이며 이웃 아주머니들이다.

2월 15일, 과학대의 졸업식이 있는 날, 이 날은 이사장인 정몽준 의원도 참석하는 날이다. 노조원들은 피켓 시위를 하기 위해 졸업식이 열리는 강당에 올라 가려고 했으나 우르르 교직원들이 달려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모든 출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그 교직원들은 대부분 대학 교직원 노조의 노조원들이다. 입구를 뚫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중 김순자 지부장은 그만 실신을 해버렸다.

이 대목을 말하는 즈음 김순자 지부장은 다시 목이 멘다. 인터뷰를 하면서 고통을 들추어 내는, 다시 가슴을 후벼 파서 아픔을 드러내는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할지 나는 잠시 회의가 들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담담하게 말을 하지만 가끔씩 붉게 젖어 오는 눈, 그리고 봉합하듯 메어 버리는 목소리, 그 섬세한 떨림을 나는 느끼고 만다. 나도 눈물이 고이고 목이 메인다. 그만 고개를 숙여 버렸다. 깊은 숨을 쉰다. 잠시 침묵.

“내가 실신을 하자 119가 왔지. 119가 오니까 어쩔수 없이 문이 뚫린거라. 그 틈을 이용해 남은 노조원들이 강당으로 올라 갔지. 언론도 전부 있는 놈들 편인거라. 그날 과학대 졸업식이라고 언론사에서도 많이 왔는데 우리를 보고도 단 한줄의 기사도 쓰질 않는거야. 사람이 실신하고 노동자들이 그렇게 시위를 하는데도 어째 언론에서는 그것을 단 한줄도 보도하질 않는지. 없는 사람 이야기는 단 한줄도 실어주질 않는게 언론이란걸 알았어.”

2월 23일, 여느 때처럼 노조원들이 학교에 출근하니 평소 옷을 갈아 입는 탈의실 문 열쇠가 다 바뀌어져 있었다. 비노조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이미 전날 노조원들을 뺀 나머지 환경 미화원들에게는 계약해지를 알리고 출근을 하지 말라고 통보를 한 상태였다. 잠긴 탈의실 문앞에는 ‘용무가 있으신 분들은 관리실로 올라 오세요’라는 안내글이 적혀 있었다. 관리실로 올라가 열쇠를 받아낸 노조원들은 탈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그날부터 탈의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 갔지. 내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2월 27일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 왔는데 탈의실이 엉망이 되어 있는거야. 탈의실 문이 다 뜯겨 나가고 캐비넷이고 뭐고 엉망이 되어 있는거야.

문이고 뭐고 엉망이 된 탈의실에 스티로폼 몇 개를 세워 겨우 가려 놓고 농성을 계속했지. 그런데 하루는 밥을 먹고 있는데 직원들이 와서 밥상을 발로 걷어 차는 일이 벌어졌지. 이때 우리 동료 하나는 직원들의 구둣발에 발이 짓이겨서 많이 다쳤어. 동료가 다치는걸 보니 정말 사람이 돌겠더라.

내가 그랬지. 너희들이 우릴 쫓아 내려면 차라리 과학대 정문앞에 무덤 여덟 개를 파라고. 순한 사람들을 점점 독사로 만들어 가는거라”

그저 열심히 일할수 있기만을 바란 순박한 아주머니들, 한 집안의 생계를 짊어진 무거운 무게에도 일터에서는 늘 씩씩하고 밝았던 아주머니들, 일 한만큼 받고 인간적 대우만을 원했던 소박한 그들.

그 꿈들이 쫓겨나고 감금 당하고 짓밟혔다. 그러나 그 끔찍한 시련 속에서 그들은 강철로 단련되어 갔다.

그들에겐 지식만 있을 뿐, 우리에겐 지혜가 있다

3월이 되자 학교측에서는 이제 개강인데 면학 분위기를 해치니 농성을 그만두라고 했다. 그러나 환경 미화원 노조원들은 학생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내용을 담아 대자보를 붙이고 계속 투쟁을 했다.

3월 7일, 환경 미화원 노조원 8명과 연대 투쟁을 온 노동자 몇 명만이 농성장을 지키고 있을 때 학교측은 직원 7,80명을 투입해서 노조원들을 강제로 본관밖으로 끌어 냈다. 3월,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차가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날, 투쟁의 장소인 지하 탈의실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아주머니들이 얼마나 처참한 투쟁을 벌여야 했는지를, 머리채가 잡히고 속옷이 찢겨 나가고 마침내는 맨몸뚱이 목숨 하나로 맞서야 했다는 것을. 직원들의 무참한 욕설과 폭력앞에 몸 하나로 맞서야 했다는 것을.

그러나 김순자 지부장은 그날의 싸움을 말하지 않는다. 나도 묻질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함께 나눈 아픔이다. 환경 미화원 노동자들이 폭력앞에 무참하게 노출된 날, 그 날은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여성의 날을 쟁취한만큼이나 여성의 날을 지켜 나가는 것은 어렵다. 얼마나 많은 피를 더 먹어야 하나.

“첫날은 천막도 없이 날밤을 샜어. 다음날, 본관 앞에 천막을 쳤어. 나는 확신했어.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 학교측 사람들은 사람 탈만 썼지 사람이 아니었어. 우리는 그저 다시 일 할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는데 사람으론 도저히 할수 없는 짓을 우리한테 한거라. 그들이 너무 너무 잘못했기 때문에 나는 이 싸움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갖고 했어”

김순자 지부장에게는 과학대 학생들과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다. 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김순자 지부장에게는 그들이 자식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학생들로 인한 아픔이 있다. 환경 미화원 노조원들을 감금하던 사람들 중에는 울산대 교직원 노조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도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이야기 했지. 너거들, 우리 편이 되어 달라는 소리는 안할게. 그래도 학교 편은 들지 마라. 학교가 잘못하고 있다는거 알쟎아. 그냥 이편저편도 들지 말고 딱 가운데, 중립만 해달라고, 근데 안된다 카네. 와 안되노 하니 그렇게 하면 취직이 안된다 카네”

씁쓸하다. 교육은 교사의 수준을 벗어 나지 못한다는 말이 새삼 와 닿는다. 노동자 탄압에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학교. 그 학교의 요구에 순응하는 학생들, 진리를 보는 눈도 가치관도 정의도 모두 캠퍼스 아스팔트 바닥속에 파묻어 버린 곳. 진정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가.

“하루는 교수님이 우리한테 와서 종이 한 장을 주는거라. 배움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우리를 잘 이해하고 격려하는 글이 적혀 있는 줄 알고 보니까 투쟁하지 말라는 호소문이 적혀 있네. 대학 교수가 그래.”

처음 과학대에 들어와서는 학장과 교수들이 신적인 존재로만 보였다는 김순자 지부장, 그러나 이제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비록 배운 것은 없어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 그러나 배움이 넘치는 그들은 세상 이치를 모른다. 그들에게는 초라한 지식만이 있을뿐이지만 나에게는 당당한 지혜가 있다.”

투쟁속에 만난 이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진한 사람들

“나는 오십 평생을 너무 이기적으로만 살았어. 누가 나에게 얼마 부조를 하면 나도 얼마하고 이런 식으로 말야. 그러나 투쟁을 해보니 부모, 형제보다 더 한 사람들이 있다는걸 알았어. 하루는 어떤 노동자가 와서 뭐가 제일 필요하냐고 묻길래 돈이 제일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 사람 자기가 가진 돈 중 택시비 만원만 빼고 사십 팔만원을 몽땅 주더라. 또 돼지 저금통을 들고 온 단체도 있고, 라면에다가 다른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다 챙겨 오고, 부모, 형제라도 그렇게 못해”

투쟁을 하면서 마치 딴나라, 딴 세상에 와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김순자 지부장.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얼었던 물이 녹듯이 가슴이 조금씩 녹아 들었다. 투쟁 속에 열심히 살아온 삶도 아니면서 나는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많이 담을 쌓고 살아왔다. 김순자 지부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그때 느꼈던 따스한 동지애가 다시 느껴졌다. 붕어빵이 식을까봐 외투안에 꼭꼭 안고와서 수배중인 선배에게 내밀던 일. 등록금도 못내던 가난한 선배가 나를 위해 책을 몇권이나 사주던 일. 아, 얼마나 가슴 따뜻했던 기억들인가.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와도 헤쳐 나가고 쓰러지지 않을 힘을 다졌다. 그러나 지금, 나는 왜 이런가. 냉소하고 의심하고 팔장끼고 한발짝 물러서서 관망하고.

사랑하다가 상처 좀 받으면 어떤가. 무엇이 두려워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가. 인터뷰를 하면서 역으로 나 자신을 인터뷰 당하는 역습.

“육,칠년 청소시킨 놈들은 단칼에 우리를 자르는데 함께 싸우러 온 노동자들하고는 이,삼일만에 형제보다도 더 가까워지더라.”

김순자 지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늘 마음밖으로 떠돌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소중한 사람들, 나는 왜 좀더 일찍 그들을 보듬지 못했을까. 마음이 따뜻해진다.

처음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때 김순자 지부장과 재활원의 서지원 지부장, 연대 노조의 김덕상 위원장이 달려 나와 반갑게 맞아준 일이 떠오른다. 작가라고 하지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초라한 작가에게, 단 한번도 그들의 투쟁에 함께 하지 않았던 나에게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마디라도 더 꼼꼼하게 알려 주고자 하던 사람들. 그 사랑에 용기를 얻어 나는 담대한 취재를 하고 글을 쓸 용기를 가진다. 변화의 시작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노동 운동, 잘못되었다

내가 김순자 지부장을 처음 만나건 홈에버 집회장이었다. 과격한 정치 구호 하나 제대로 터지지 않는 집회장에서 내 귀를 번쩍 열리게 하는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87년 대투쟁은 민주 노조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 20년간 무엇을 했습니까? 대기업 노조가 잘했다면 오늘 비정규직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대기업 노동자가 뭉치면 삼사만인데 그 숫자면 홈에버 투쟁 끝장낼수 있습니다”

나는 이 글에서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탓하진 않겠다. 그들 또한 노동자이며 언제든지 정리 해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걸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의 피를 담보로 쟁취한 민주화 투쟁, 그 거대한 투쟁을 등에 업고 건설된 민주 노조가 또 다른 민중들의 절박한 요구인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외면한 일은 두고 두고 역사의 물음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김순자 지부장의 발언은 대기업 노조의 실책을 꼬집는 따가운 말이었다.

“우리 노동 운동, 87년 이후 20년이 흘렀지만 잘못 되었어. 그 결과가 비정규직 보호법을 만들었어”

그 사이 몇 번이나 재활원 직원들이 들락거리더니 마침내 선풍기마저 꺼버렸다. 더운 습기가 가득찬 복도, 김순자 지부장의 말이 서늘하게 울려 퍼진다.

“자식같은 아이들은 구사대로 와서 우리를 막고 어미같은 우리들은 투쟁을 하고, 그 아이들이나 우리나 모두 하청업체 직원들이 아닌가. 참 답답하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것 같아”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나또한 어지럽다. 언제부터 노동자가 이렇게 갈기갈기 찢겨 나누어져 있었나. 정규직, 비정규직, 투쟁하는 용역업체 노동자,막으러 온 용역업체 노동자, 어미 같은 투사들, 자식 같은 구사대들. 아버지는 정규직, 아들은 비정규직.

그러나 그 어지러움 속에서도 한가지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힘든 청소일 속에서 얻은 휴가, 퍼붓는 비를 함께 맞으며 같은 노동자로, 여성으로, 효정 재활원 노동자들의 해고 철회를 위해 금쪽같은 휴가를 연대 투쟁으로 보내는 김순자 지부장, 홈에버 노동자들, 그리고 삼성 에스디아이 비정규직 노동자들... . 그리고 또 함께하는 수많은 그들. 그들이 이 길을 밝히리라. 이 길을 뒤틀어 바로가게 하리라.

투쟁은 과학대 담장안에 있지 않다

“투쟁을 하다보니 이 투쟁의 맨 위에는 정몽준이 있다는걸 알았어.그 사람이 이사장이잖아. 게다가 국회의원이지. 국회의원이 이러면 되는가. 그래서 나는 정몽준이와 싸울 것이다고 했지”

노동자들이 정몽준 사무실로 찾아가니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20여명의 경비들이 사무실을 꽁꽁 봉쇄하고 있었다. 한 두 명씩 따로따로 계단을 올라간 노동자들은 마침내 정몽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정몽준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다. 이후 김순자 지부장은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과학대 환경 미화원 해고의 부당함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처음에는 과학대 안의 싸움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세상의 한가운데서 노동자들은 싸우고 있었다. 비정규직 해고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과학대 안의 싸움만도 아니라는걸 노동자들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비정규직 토론회가 있을 때 국회에 가서 내가 그랬지. 최저 생활비는 백 삼 십만 원인데 최저 임금은 왜 거기에 훨씬 못미치냐고, 이건 우리 보고 알아서 싸워 따내라는 이야기 아닌가. 이 나라는 노동자들이 투쟁하게끔 만드는 나라야. 이러면서 무슨 아이를 더 낳아라고 한단 말인가? 이게 무슨 복지 국가인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산골짜기를 흘러 마침내 바다에 닿고야 마는 물줄기가 떠오른다. 좁은 골짜기를 벗어나면 지류를 타고 흘러온 수많은 하천들과 만나 마침내 큰강에 이른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지구를 덮는다. 수많은 생명을 품고 에너지를 생성한다. 그에게서는 이미 아득한 골짜기를 흘러 나오던 좁의 물의 기억은 없다. 투쟁이라는 거센 물살을 타고 그는 이미 세상의 한가운데 서있다.

“박동지!” 인터뷰 도중 재활원 로비로 들어온 한 노동자를 보더니 김순자 지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동지라는 말. 이미 내 입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그 뜨거운 단어가 쉰다섯 아주머니의 입에서 흘러 나온다. 그 말은 뜨겁다. 따뜻하다. 그가 부른 동지는 정말 뜨거운 동지애가 송진처럼 흘러나오는 그런 동지일 것이다.

살며, 투쟁하며

“나이 쉰 넘긴 여자들이 할수있는 일이란게 뻔해. 식당일, 간병일, 청소일. 다른 일은 할게 없어. 대형 할인점도 삼 사십 대때나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그 일을 그만 두라고 하면 우린 정말 갈데가 없어. 이건 생존을 건 절박한 문제야. ”

주의를 둘러보니 정말 그렇다. 오늘 이 재활원의 간병사 노동자들, 청소 미화원인 김순자 지부장. 그들은 7,80년대의 살인적 저임금 정책에 청춘을 감금당한 사람들이며 돈 한푼 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에 생의 대부분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건장한 자식들을 길러내어 나라의 노동력을 지켜가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피해가고 싶어하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 그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 훈장을 백번 주어도 마땅찮을 그들의 삶에 그 누가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가. 받들어 모셔도 아까운 그들의 몸을 그 누가 밤이슬 내리는 노상 천막으로 내모는가. 무더운 재활원 로비. 피켓을 들고 말없이 앉아있는 간병사 노동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살아오면서 한 일이라곤 한평생 새빠지게 일한 것 뿐.그들의 몸에서는 순하게 살아온 초식 동물의 향기가 난다. 그러나 그 누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달려들어 저들을 할퀴고 물어뜯는 살육의 역사를 쓰려고 하는가.

“태어날 때부터 정규직, 비정규직 따로 있었나. 사람은 다 똑같은거 아닌가. 하지만 이 사회는 가난한 사람,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하질 않는다. **도 없는게 왜 까부냐 이런 식이야”

재활원 밖으로는 어느 새 어둠이 내리고 있다. 이 어둠이 좀 더 짙어지면 간병사 노동자들은 오늘도 면담을 이루지 못하고 저 차가운 천막 바닥으로 돌아갈 것이다. 밤안개를 이불 삼아 오늘 하루도 천막에서 고단한 몸을 뉘일 것이다. ‘여기는 우리가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소중한 곳이다’ 재활원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의 글귀가 허공을 맴도는 모기 소리처럼 앵앵거린다. 아주머니들의 사랑과 행복, 그것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저 산의 운무가 걷히면 밝은 햇살처럼 성큼 다가와 줄 것인가.

"우리에겐 우리 식의 투쟁 방법이 있는것 같아. 단식, 삭발같은 것을 오십 넘은 아줌마들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우리의 투쟁 방법이 너무 남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백번의 투쟁 속에는 백가지 향기가 있을 것이다. ‘아프지 말라’는 말한마디가 진실한 연대가 될 수 있다는걸 나는 이곳에서 느꼈다.

긴 투쟁을 거쳐 마침내 과학대는 환경 미화원 노동자들의 투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청업체가 바뀌어도 아주머니들의 고용은 승계되며 초과 근무 수당등 미지급 임금에 대해서 지불 약속을 했다. 그러나 김순자 지부장의 가슴에는 아직도 무거운 한이 있다

[출처: 울산노동뉴스]

“협상할 때 우리에게 폭력을 쓴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자기들 체면도 있고하니 좀 봐달라고 해. 다 마무리되면 사과를 할거라고. 당연히 사과는 할 줄 알았어. 근데 아직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했어. 그게 가슴에 남아”

그것은 마음의 상처다. 욕설과 폭력. 사과를 한다고 해서 그 상처가 누그러질까만은 사과조차 하질 않고 있으니 그 아픔은 살을 벤듯 아플 것이다. 학교측의 이런 태도는 여차하면 언제라도 다시 밟아버리겠다는 경고일 것이다. 노동자가 언제나 단결하고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김순자 지부장도 먼 길을 달려 이곳에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재활원을 돌아 나오는 길. 재활원측의 관리인들이 병원 정문 입구에 모여 있다. 로비쪽에서 나오는 나를 힐끗거리며 쳐다 보다가 뭔가 시비를 걸며 다가올듯 하다. 길을 막을듯 하던 그들은 끝내 나를 막지 못한다.

천막 농성장으로 향하는 길. 나는 분명한 진리를 떠올리며 잠시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이 싸움이 이길거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싸웠다. 왜, 우리는 정당하니까. 정당한 사람은 확신이 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거는거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싸움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이 되기 마련이다”
덧붙이는 말

서분숙 님은 2006년 전태일문학상을 받았고, 울산에서 비정규직 교사로 일하고 있다. 울산 '노동자배움터'에서 노동자들의 삶을 이야기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