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조 47차 중앙위원회 진행방침’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전교조 내의 한 정파인 ‘참교육실천연대’(참실련) 집행위원회 이름으로 작성됐다. 정진화 전 전교조 위원장이나 정진후 현 전교조 위원장 모두 참실련 소속이다. 현 전교조 본부도 사실상 참실련 소속 또는 성향의 활동가들이 대부분 주도하고 있다. 전교조 47차 중앙위원회는 지난 4월 24일 열렸다.
전교조 성폭력 징계위원회는 지난 4월 22일 6시 30분에 4차 회의를 열고 성폭력 사건 은폐조장 혐의로 정진화 전 위원장과 손 모씨, 박 모씨를 제명했다. 그러나 한 달 열흘 뒤인 6월 30일, 성폭력 징계 재심위원회는 세 사람에게 경고 조치만 한다. 3년간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는 제명 징계가 사실상 주의를 환기하는 경고 조치로 바뀌자 전교조 안팎에서 재심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었다. 특히 재심위는 외부인사까지 참여해 만든 민주노총 성폭력 진상규명 특위 보고서의 조직적 은폐조장 행위가 없었다는 결정도 내렸다.
지지모임이 공개한 문건에는 당시 새로 구성할 예정인 재심위원회를 참실련 집행위원회가 장악하려한 구체적 과정이 있다.
문건은 위원회 위원 추천 방안으로 ‘1심 위원회에 들어가 있지 않은 지부 : 전남, 경남, 제주, 충남, 대전, 울산, 광주, 부산, 대구’로 안을 제시했다. 문건은 “서울이 조합원이 많다는 논리를 펴면 경기 역시 각 위원회에 들어가겠다는 입장을 고수해야 함. 또한 지부별 조합원수에 비례하여 배분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므로 이를 막아야 함”이라고 논의 과정도 미리 정했다.
또 중앙위 안건 중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 대한 보고 및 처리’ 안건을 두고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차분하게 보고와 질의응답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시고, 보고내용에도 불구하고 본부와 위원장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이 제기될 경우 강력한 제재와 비판을 수행한다”고 방침을 제시했다.
전교조 성폭력 징계위원회 및 징계재심위원회는 상설기구다. 징계위원회는 2년, 재심위원회는 1년 임기로 재심위원은 통상 매년 4월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한다. 올해는 지난 4월 24일 중앙위에서 재심위원 7명을 선출했다.
문제는 47차 중앙위원회 재심위원회 결정과정이 시나리오와 비슷하게 진행됐다는 데 있다. 한 전교조 중앙위원은 “그때 중앙위에서 위원들을 뽑아야 하는데 지부장들을 따로 다른 방에 모이게 해서 중앙위가 진행되는 사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문건은 “반드시 중앙위원 중에서 선출해야 하나 관례대로 정회 중 지부장들이 협의해서 위원을 추천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감”이라고 선출방침을 정해 놨다.
이 중앙위원에 따르면 당시 중앙위원회 도중 지부장들을 따로 불러 위원을 선출하려하자 몇몇 중앙위원이 문제가 있다는 식의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중앙위원은 “당시 ‘1차 징계위나 성폭력 징계위에 서울지부가 있어서 서울은 2심인 모든 재심위에서 배제됐다’는 얘길 들었다”면서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보통 서울이나 수도권이 회의에 참석하기 쉬워 이전에는 징계위원회와 재심위원회 모두 서울이 참가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참실련과는 입장이 다른 전교조 내 다른 정파인 ‘교찾사’ 성향의 활동가가 많다. 문건에 따르면 참실련 집행위원회가 참실련 소속인 정진화 전 위원장의 징계를 경감하기 위해 다른 정파가 많은 서울지부를 배제하는 재심위를 구성하려 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을 두고 엄민용 전교조 대변인은 “문건에 대해서나 47차 중앙위원회 결정과정에 대해 전혀 해 줄 수 있는 얘기가 없다”고만 밝혔다.
지지모임, “재심위 결정 원천 무효” 주장
성폭력 피해자 지지모임은 이 문건을 놓고 “성폭력징계재심위원회 결정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지지모임은 “재심위원회는 피해자와 그 피해자 대리인이 간곡하게 제대로 판결해 달라는 요구를 완벽하게 묵살한 ‘가해자의 입장에 치우친 판결’이었다”고 규정했다.
지지모임은 “참실련 집행위원회 이름의 이 문서에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보고 및 논의에 있어 피해자의 상처를 공감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게 주된 아니라 ‘위원장 탄핵안 부결 시 대응 방안’과 ‘재심위 및 각종 위원회 구성의 여러 안’ 등에 관한 세밀한 시나리오가 담겨 있었다”고 개탄했다.
지지모임은 또 “이 문서는 이미 피해자 대리인과 지지모임 제안자 이향원 대표가 정진후 위원장 각각 독대하면서 보여주고 ‘재심위원회가 문제가 있으니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달라’고 호소했다”고 밝혔다.
지지모임은 이어 “이 문건의 입수 시점부터 문건을 공개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왔다”면서 “각종 음해에도 참고 의연하게 나서려 하였지만 더 이상 우리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음을 느낀다. 지지모임 운영진들은 이 문서를 공개할 것인지에 대하여 장시간 회의를 거쳐 최종 공개를 결정했다”고 공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지지모임이 이번 문건을 공개한 배경엔 전교조 본부의 무응답에 있었다. 지지모임은 “1심의 제명과 재심의 경고 사이가 천지 차이의 결정인데 이를 평조합원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서 “어째서 조직의 권위있는 결정단위가 이렇게 상반된 결정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명을 지지모임 활동가들이 요구해도 본부는 묵묵부답이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