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앞마당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그 시대 그 새벽에 을밀대까지 산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살 만한 사람들이었다.
을밀대 지붕 한 귀퉁이에서 몸을 움츠린 채 잠들어 있던 한 여성 노동자가 깨어났다. 사람들에게 외쳤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 우리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공농성 1인 시위였다.
미국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를 휩쓸던 세계대공황의 파도가 식민지 조선을 휩쓸던 때였다. 1929년 10월, 뉴욕 증권 시장의 주식 값이 폭락하면서 은행이 문을 닫았다. 수많은 기업이 쓰러졌다. 한쪽에는 상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썩어 가는데도 소비는 얼어붙었다. 공장이 문을 닫았다. 공장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공황은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였다. 자본가들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보통 때도 흔히 쓰던 수법을 모두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자르고, 임금을 깎고, 노동시간을 늘이고, 노동 강도를 높였다. 위기를 수용하고 순응할수록 노동자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도 풍비박살이 난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 않았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그런 싸움 가운데 하나였다.
1931년 5월 16일 평양 평원고무공장은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겠다고 알렸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5월 28일,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나도록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 노동자들은 굶어죽기로 싸우겠다고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조선인 사장이 한밤중에 일본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죽음으로써 투쟁의 불길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목 매달아 자살하려고 광목을 사서 을밀대 부근으로 올라갔다. 30여 년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았다. ‘이대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눈에 들어왔다. 저 위에 올라가 우리가 싸우는 뜻과 평원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광목을 찢어 중간을 이어 길이를 늘였다. 광목 한 쪽 끄트머리에 돌을 묶어서 지붕 한 귀퉁이로 던져 넘겼다. 기둥에다 한 쪽 끝을 묶고 밧줄처럼 타고 을밀대 지붕위로 올라갔다. 5월 말, 봄이라고는 하지만 이슬 내리는 대동강변의 새벽바람이 추웠다. 늘어진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감싸고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어 깜박 잠이 들었다. 새벽 산책 나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손짓을 하며 소란을 떨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소식을 듣고 흩어졌던 동료 노동자들도 달려왔다.
강주룡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지 이유와 각오를 밝히면서 외치고 외쳤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300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중략’부분은 원 자료에도 중략한 것)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쟁의가 해결되기 전에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밥 한술 뜨지 않고 완강히 버텼다. 검속시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 다른 공장 노동자들은 동정 태업을 벌였고, 평양노동연맹을 비롯한 노동, 사회단체에서는 적극 지원하겠다고 결의하고 응원하였다.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 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하였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 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 하고 따졌다. 회사측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가족의 생사가 달려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회사측이 임금을 깎겠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전원을 채용 하라는 요구는 이뤄내지 못하였다. 대신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나누어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쟁의가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제국주의 자본과 하수인들이 지배하는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단위 사업장의 투쟁과 성과만으로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힘들었다. 인간다운 삶을 이룰 수 없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노동자 민중이 해방되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려고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확산되었다.
6월 9일, 강주룡은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 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노동조합에 참여했던 것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1년 동안 비타협의 옥중 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시달리다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두 달 동안 앓아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 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하였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여 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강주룡의 고공농성은 온 몸으로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을 폭로하고,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파업투쟁이 평양 2300명 고무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가장 앞장서서 지키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리는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이었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으며 원칙대로 꼿꼿하게 사는 삶, 자신만이 아니라 대중의 이해를 실현하려고 앞장서는 실천,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버릴 수 없는 희망의 깃발이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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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님은 <박준성이 쓴 노동자역사 이야기> 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