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불티처럼 휘날릴 때 추리소설은 참 좋은 신경안정제 노릇을 한다. 책 속에서 범인을 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좀 도망치고 싶었다.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논리의 세계! 바닷물이 쓸려나간 백사장처럼 아름답게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 뭔가가 아주 명쾌하고 산뜻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그런 곳으로.
그런데 나는 도대체 어디서 도망치려 하고 있는 것일까? 범인을 찾기도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몸이 피곤했던 게 아니었을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무턱대고 찾아간 곳은 대학로에 있는 재능교육 학습지 노조 천막 농성장이었다. 금요일이었고, ‘비정규노동자 권리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주간 일정 가운데 하루였다.
찬바람이 손톱을 세우고 허공을 마구 갈퀴질하고 있었다. 너무 추워 웬만하면 잘 채우지 않는 지퍼를 목울대까지 지익 올렸다. 손이 시려 담배를 피우기도 힘들었다. 학습지 노조 천막 농성장 앞에는 촛불을 켜 든 오십여 명이 모였고 나는 대오 뒤쪽에 멍하니 서서 사진만 몇 장 찍었다. 그날은 천막 농성 337일째 되는 날이었다.
▲ 대우자판 노동자들의 집회 |
‘언제 여기도 다시 와서 취재를 해야 할 텐데....’ 그 생각만 머릿속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다 보니 어느새 문화제가 끝나 버렸다. 문화제 중간에 발언을 하러 나온 신용보증기금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저희들의 투쟁이 워낙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저희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좀 알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내가 가장 많이 갔고 또 가장 많은 현장 글을 써 낸 이랜드 투쟁은 일단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건만 언론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랜드 사태’가 ‘드디어 종결’되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끝내 복직하지 못한 이경옥 부위원장에게 “이랜드 끝났죠? 복직 축하 드려요!”라고 따듯이 말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경옥 부위원장은 뭐라고 말을 할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그냥 웃으며 고맙다고 그 사람에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랜드 혹은 삼성 테스코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글도 썼다. 그런데 그 글을 쓰고 나서 열흘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화도 안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두 손 놓아 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 나온 현장에서 들은 말이 “저희들의 투쟁이 워낙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저희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좀 알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였다. 현장 글쓰기를 해 보겠다고 무작정 집회나 문화제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고작 투쟁 사업장 한 곳이 사측과 타결을 보았다고 마치 세상 다 살았다는 듯 넋이 나가 방에만 틀어박혔을까? 신용보증기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했던 것이 바로 내가 쓰려고 했던 것 아니었나? 자기 삶을 자기가 되찾겠다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로 내가 써 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존심이 상했다. 오기 비슷한 것이 속에서 치받쳐 올라왔다. 난 왜 갑자기 게을러졌지? 꿈 꾸던 게 있었잖아? 하고 싶은 게 있었잖아? 그럼 왜 그걸 안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싸움들이 얼마나 많은데? 추운 밤에 천막 안에서 잠을 자는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아니면 그걸 누가 글로 쓰겠어? 시간 많고 술 잘 먹는 내가 아니면 누가? 턱없는 자존심이요 근거 없는 오만함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을 나는 콧구멍으로 찬바람을 들이마셔 가며 곱새겼고, 그 덕분인지 아닌지 뭔가를 다시 한 번 시작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고는 혼자 큭큭 웃었다.
문화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져 갔다. 강남 성모병원 비정규직 조합원 정화 누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성모에 요새 잘 못 가서 죄송하다고 하니 정화 누님은 장갑 낀 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말아요. 글을 읽으면 너무 아파.”
바람이 불어 정화 누님의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망설이기도 전에 나는 얼굴 한 가득 웃음을 지었다. 누님, 아니에요.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술을 많이 마셔서 술병이 난 거였다니까. 다시 뭔가를 해 봐야죠.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추운데 잘 들어가시라고 꾸벅 인사를 하고는 지하철역 쪽으로 향했다. 재능교육 천막 농성장에도 나는 글 하나를 빚졌다고 생각했다.
▲ 재능교육 농성장 앞 |
다음날은 토요일, 청계 광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촛불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다섯 시부터는 종교인들이 모여 ‘범종단 촛불 기도회’를 연다고 했고 촛불 문화제는 여섯 시부터였다. 여섯 시까지 시간 맞춰 가면 되겠지 싶어 집에서 노닥거리고 있는데 이경옥 부위원장이 전화를 걸었다. “안 오고 뭐 해요? 지금 하고 있는데?”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부랴부랴 청계 광장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이었다.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이 사회를 보고 있었다. 이경옥 부위원장은 대오 맨 앞에 앉아 있었다. 다섯 시부터 전경들이 청계 광장을 가득 메우고 서 있어서 촛불 기도회는 어쩔 수 없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칼라TV 형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오 뒤쪽을 어슬렁거리다가 GM대우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을 발견했다. 뜨끔했다. GM대우를 취재해 글을 써서 넘겨야 하는 원고가 하나 있었다. 마감 날짜는 이미 한참 지났다. 지난 월요일에 GM대우 천막 농성장으로 취재를 가겠다고 이대우 비정규지회 지회장에게 말도 해 놓았건만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머뭇머뭇 하다가 용기를 내서 이대우 지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지난번 대우자동차판매지회(대우자판) 앞에서 본 후로 두 번째 만남이었다. 결국 다음날 GM대우 부평 공장 서문 앞에 있는 천막 농성장에 가기로 했다.
▲ 다음날은 토요일, 청계 광장에서 비정규직 철폐 촛불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
다음 날인 일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나는 한참 동안을 또 고민했다. 나갈까 말까. 가기 싫은 게 아니라 취재를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나 처음 가 보는 장소에는 심각할 정도로 낯가림을 하는 편이라 가운데서 연결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상하게도 취재에 애를 먹는다.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언제까지 아이처럼 굴 거냐는 욱하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GM대우 부평 공장 부지는 너무나도 넓었다. 인천 지하철 갈산역에 내려 삼십 분 정도 걷다 보니 저 앞쪽 네거리 모서리에 천막 농성장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농성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GM대우 서문은 웬만한 대학교 입구처럼 큼지막했다. 안쪽으로는 한 방향으로 쭉 뻗은 찻길이 보였다. 저기가 지난 2001년에 GM대우 노동자들이 전경들에게 두들겨 맞아 온몸이 피떡이 된 그곳일까? 7년도 더 된 그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나는 으스스 몸서리를 쳤다.
서문 왼쪽으로는 사측이 붙인 밝고 희망찬 내용의 현수막이, 오른쪽으로는 해고자 복직과 외주화 철회와 비정규지회 인정을 부르짖는 현수막이 똑같은 높이에 걸려 있었다. 공장 바깥벽에 붙어 있는 광고판을 보니 어떤 시민 단체들은 'GM대우 살리기 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GM대우가 쓰러지면 이 지역은 어떻게 될까? 저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적어도 만 명은 넘을 텐데. 가족들까지 합하면, 그리고 요 근처에서 장사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얼마나 될까? GM대우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밥줄이 걸려 있을까? 고개를 돌려 천막 농성장을 바라보니 굵직한 글씨체로 이렇게 씌어져 있었다. ‘천막농성 391일째’
GM대우 비정규지회는 2007년 9월에 세워졌고 천막 농성은 10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겨울과 봄을 거쳐 오며 점거 농성과 고공 농성, 단식 농성까지 해 봤지만 사측은 아무런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이 된 후 처음으로 방문한 사업장이 바로 GM대우라고 했다. 거기서 이명박 당선자가 길이길이 전해질 망언을 했었다. “대한민국 모든 기업이 24시간 2교대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건설회사 사장 출신다운 정말 화끈한 망언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니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이대우 지회장이 벌떡 일어나 나를 맞아 주었다. 조합원들은 셋 뿐이었다. 대우자판 노조 지도부가 오전에 연행되는 바람에 다른 조합원들은 지금 대우자판 쪽에 가 있다고 했다. 나는 놀라지도 못하고 멍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천막 안을 둘러 보니 갖은 물품들이 400일 가까이 꾸려 온 천막답게 꼼꼼히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을 왜 찾아 왔는지, 어떤 취재를 해서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지를 이대우 지회장에게 설명해 주었다. 알맹이 취재는 월요일부터 시작할 생각이어서 나는 요새 GM대우 비정규지회가 어떤 상황이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만 물어 보았다.
이미 널리 보도가 되었지만 GM대우는 일부 공장을 12월 초부터 1월 중순까지 휴업을 하겠다고 했다. 쉬는 기간은 공장마다 다르다. 짧게는 열흘, 길게는 40일. 평택 쌍용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휴업 기간에는 기본급의 70%만 지급한다. 이대우 지회장은 아마 사측이 휴업 기간이 끝나면 희망 퇴직을 강요하는 수순으로 갈 거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에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럼 비정규지회는 둘째 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나요?” 이대우 지회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 강제 휴업도 사측과 정규직 노조가 합의해 결정한 사안이었다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나가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거라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GM대우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면서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다. ‘GM대우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지회가 싸우든 말든 연대 투쟁이고 뭐고 없이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정규직 노조를 일부러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을 보며 있는 그대로를 종합해 보면 그런 식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지회장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기사들을 보니 정규직 노조가 욕을 많이 먹는 것 같던데 정말 그런가요?”
이대우 지회장은 GM대우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노조 사무실 앞에서 구사대한테 얻어맞은 적도 있다고 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을 일부러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다른 투쟁 사업장과는 달리 이대우 지회장은 “우리는 정규직 노조에게 기대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정규직 노조 위원장 선거가 있는데 후보들 가운데 사측에서 내보낸 후보도 있다고 했다.
이제 투쟁을 시작한지 한 달 정도 된 쌍용자동차 비정규지회 사무장이 얼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대해서는 기사로 쓰지 말아달라고. 노동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만 작년 9월에 비정규지회를 세우고 어느덧 일 년을 훌쩍 넘기며 고공농성에 단식농성까지 험난한 길을 두루 거쳐 온 이대우 지회장은 그만큼 못 볼 꼴들을 많이 본 것일까? 정규직 노조를 조금도 감싸려 하지 않았다.
사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애초부터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고용한 GM대우 자본에 가장 큰 잘못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언제 기간제나 파견직이 될지 모른다는 것은 어느 사업장을 가든 이제 상식이 되지 않았나. 속사정이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안타까웠다.
작년에 해고된 비정규직 조합원들은 모두 35명. 그 중 몇 명은 원직복직을 했고 또 일부는 싸움을 접어서, 지금 함께 투쟁을 하며 천막 생활을 하고 있는 해고 조합원들은 간부들을 포함해 9명이라고 했다. 쌍용자동차 비정규 조합원들처럼 현장으로 들어갈 수는 있는지 물어봤더니 해고 조합원이 공장에 들어가면 벌금을 물린다고 했다. 노조활동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지만 6개월째 꿩 구워 먹은 소식이란다.
조합원들과 인터뷰를 해 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천막농성장에는 늘 조합원들이 있으니까 언제든 와서 편한 대로 인터뷰를 하면 된다고 했다. 가장 나이 많은 조합원이 40대인데 특이하게도 제주도에서 농민운동을 하시다가 올라온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여성 조합원도 한 명 있었다. 부품을 만드는 하청 업체에서는 여성 노동자들도 고용한다고 했다.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들에 관한 글이나 기사들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대우 지회장은 곧바로 대답했다.
“이슈가 됐을 때만 많이 와서 취재해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취재거리'가 안 되는 지방 소규모 사업장들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도록 해 주었으면 해요. 기륭이나 이랜드처럼 많이 알려진 사업장들 말고도 지방에서 진짜 힘들게 싸우고 있는 다른 투쟁 사업장들이 참 많거든요. 시그네틱스 노동자들도 7년을 싸우고 있는데.....”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지금껏 쓴 글들은 다 뭘까. 나는 무슨 글을 써 왔을까.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 가고, 쓰고 싶으면 쓰고, 쓰기 싫으면 안 쓰고, 나는 콧대 높은 자유기고가 시늉을 하고 있었을까? 처음에, 처음 현장을 다니며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글을 썼을까? 아, 그런데 처음 마음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취재 끝내고 술도 안 마신 채 집에 바로 들어와 수첩에 적힌 내용을 밤 새도록 정리하며 글을 쓰던, 그런 객기로 가득하던 나는 어디로 갔나? 잊혀져서는 안 되는 외침들이,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싸움들이 아직도 많고 많은데......
그래서 노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고공농성과 단식농성을 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자극적'으로 싸워야 글쟁이들이 몰려들 테니까. 그래야 자신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널리 알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노동자들의 싸움을 보도하는 언론 매체는 많지 않고, 투쟁 사업장을 다니는 글쟁이들도 별로 없다. 글쟁이들에게 ‘포착’되지 않는 투쟁 사업장들은 철저히 ‘묻혀진다’. 어디서 어떻게 왜 싸우고 있는지 노동자들 자신이 알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다. 서울에 올라와 양화대교에서 고공 농성과 단식 농성을 했던 콜텍/하이텍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천막을 나왔다. 이대우 지회장이 배웅해 주었다. 서문 쪽을 가리키며 저곳이 7년 전에 노동자들이 잔인하게 두들겨 맞은 곳인지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그 현장은 저쪽으로 더 가야 나온다고 했다. 그곳 아스팔트 위에는 그날 노동자들이 철철 흘리던 핏물이 아직도 묻어 있을까? 아마 찻길을 깨끗하게 다시 포장했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눈물도 상처도 핏자국도 새 아스팔트로 모조리 덮어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월요일, 나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오후에는 학원에 출근해야 했다. 천막 농성장으로 가서 인터뷰를 하자니 시간이 애매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 뜯으며 밥을 먹었다.
학원 수업을 마치니 저녁 여덟 시였다. 지금이라도 천막 농성장에 갈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아서 차라리 다음날 길거리 선전전에 가 보기로 했다. 날은 어두웠고 바람은 차가웠다. 그
냥 집에 가려다가 아무래도 뭔가 아쉬워서 그 근처에 사는 후배를 전화로 불러냈다. 저녁을 사달라고 했다. 후배는 나 같이 후배를 뜯어먹는 개념 없는 선배는 처음 봤다며 투덜거리고는 은행에 돈을 뽑으러 갔다.
볶음밥을 먹으면서 소주를 한 병 시켰다. 군대를 마치고 지난 가을에 복학한 후배는 다음날 1교시에 쪽지 시험을 봐야 한다며 술을 마시지 않았다. “너 아직도 벼락치기로 공부하냐?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봐야지.” “<한국문학통사> 쓴 사람이 정말 미워요. 왜 그런 책을 써서 사람을 고생시키나?” 후배가 듣는 수업은 ‘고전문학사’였다.
볶음밥 먹으며, 나는 술도 곁들여 먹으며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형, 요새 뭐하고 살아요?”
“그냥 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글 쓰고…… 네가 아는 그대로지.”
“왜 학원 하나 더 안 해요? 돈 벌어야 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지금도 시간이 많지가 않아서. 이상하게도 여유가 없네. 벌긴 벌어야 할 텐데.”
“지금 그렇게 사는 거 좋아요?”
“.....”
“딴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난 그냥 형이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나 그게 궁금해서.”
“행복? 행복이란 뭘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까? 아니, ‘어떻게 해야’라는 단서가 붙는 걸로 봐서 행복이란 것에는 꼭 조건이 따라 붙어야 할까? 그냥 지속되는 상태로는 행복은 느껴질 수 없는 건가? 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있지.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다행히도 나는 집이 있거든. 물론 우리 부모님 명의지만. 내 주변에는 한 달에 이백만 원 이상 벌지 않으면 생활이 안 되는 사람도 있어. 나보다 훨씬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야 괜찮은 거지. 아직은 버틸 수 있으니까 이러고 살지.”
“행복이 뭐 별 거예요? 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한다고 자랑스럽게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 수 있고, 그러면서 사는 게 행복한 거 아닌가? 형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형을 보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그래?”
“형이 원래 좀 우울한 사람인 건 아는데......”
“행복? 행복이라..... 나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사람은 어떻게 돼야 행복해질까? 아니, 그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그럼 나는 어떨 때 행복을 느낄까? 나는 행복이라는 것을 느낀 적이 있을까? 그런데 도대체 뭘 행복이라 불러야 하지? 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도 가끔 그런 질문을 나에게 던져보거든?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 내게 행복이란 뭘까? 그런데 말야. 답이 안 나와. 돈 많이 벌어 예쁜 여자랑 결혼하고 좋은 집 사면 행복해질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 근데 나는 아니야. 너는 어떤데?”
“방금 말했잖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지 뭐.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해요. 최소한의 생계는 이어야 하니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일은 돈이 별로 안 들어. 글 쓰는 데에는 펜이랑 종이만 있으면 되거든. 그걸 하려고 돈을 모을 필요는 없어. 너 말대로 중요한 건 생계지. 글은 쓰면 되는데 밥은 어떻게 먹을까? 뭘 먹고 살까? 솔직히 나도 내 미래가 불안하긴 하지. 아직은 이십대니까 이러고 사는 건지도 몰라. 서른 넘어서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나 요새 자주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형은 꿈이 뭔데?”
“꿈? 글쎄, 원고료 받아서 밥 벌어먹고 사는 거? 근데 그게 이루어질 리가 있냐? 우리나라에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냥 저도 요새 그런 고민을 해서 그래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임용고사는 봐야 되는데.....”
“어쩔 수 없지. 사람 사는 게 어려워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죽는 게 뭔지 알아?”
“......”
“꿈이 가장 먼저 죽어. 어떻게든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생계, 그거 중요하지. 사는 게 자꾸 어려워지니까 대학생들이 두 가지 길밖에 선택하지 못하는 거야.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만 하거나, 아니면 거리로 나가 투사가 되거나.”
“안 그런 때가 있었나 뭐.”
“내가 예전에 학생회 활동하던 시절에도 툭하면 선배들이 물어봤어. 너 나중에 졸업하면 어쩌려고 그래? 미래는 생각 안 해? 뭐 하고 먹고 살 거야? 너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존권만 외치면 어떡하려고? 물론 나는 할 말이 없었지. 물론 생계, 중요해.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전부가 아닌 경우가 있어. 중요하긴 하지만 전부가 아닌 거야. 다른 꿈이 있고 다른 희망이 있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생계라는 게 오로지 전부인 것처럼, 가장 중요한 것처럼 말해. 물론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왜 생계라는 것으로만, 돈이라는 것으로만 내 안부를 묻는 거야? 다르게 물어볼 수도 있잖아? 요새 무슨 생각하며 사니,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니, 무슨 음악을 좋아하고 책은 뭘 읽었니,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나?”
“아니, 형, 나는 그런 뜻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그냥 형이 어떻게 삶을 꾸려갈 건지 궁금해서......”
“알아 임마. 꼭 그런 놈들 있잖아. 동창회 같은 데 가면 번듯하게 차려 입고 나와서 ‘너 요새 뭐해? 돈은 벌어? 아직도 그러고 살아?’ 이렇게 깐죽대는 놈들. 너는 그건 아니잖아. 근데 말이야. 나는 그런 질문들이 참 싫어. 뭐 해서 벌어먹고 사는지, 단지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삶을 단번에 훑어 보려는 질문들..... 그런 질문들은 예의가 아니야.”
“알았어요. 조심할게.”
“너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행복? 나 정도면 행복한 건가? 사지 멀쩡하고, 밥 잘 먹고 다니고, 입을 옷 있고, 잠잘 집 있고...... 그럼 행복은 자기가 자기를 따져봤을 때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나면 의무적으로 느껴야 하는 건가?”
“그럼 형은 행복이란 것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글쎄, 지속되지 않는, 그냥 반짝 하고 말아 버린 행복도 행복일까? 연애할 때 느꼈던 것들을 행복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긴 있었지. 그걸 다 부질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닌데, 그냥 그래.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느낌도 없어. 글을 쓸 때, 나는 글을 쓸 때 행복할까? 행복하다고 하기엔 너무 힘들고, 너무 힘들다고 말하기에는 또 너무 좋은데……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기분이잖아.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거고,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한 거고…… 그런데 그 기분이 과연 어디서 오느냐 이거야. 내 속에서 올까? 아니면 바깥에서 올까? 행복은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온다고 어떤 시인이 말하긴 했지만......”
어느새 나는 술 한 병을 다 비웠다. 담배 한 대씩을 태우고 후배가 일어나 계산을 했다. 나는 옷을 입고 식당 바깥으로 나왔다. 술기운 탓에 볼이 달아올라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별나게 차가웠다.
후배랑 헤어지고 나는 지하철역까지 터덜터덜 걸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 현장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밥 먹고 술 마시고 있는 중에도 세상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겠지.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행복? 행복이라..... 그러고 보니 나는 스물다섯 살쯤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고민을 잊어버리는 순간 나는 끝장난다는 거야. 행복이라고 말하는 순간 행복은 허구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완성되지 않는 한 나의 행복도 완성되어서는 안 돼.
너무 각이 지고 모가 난 생각이었을까? 고작 삼년 전에 쓴 건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완성되지 않는 한 나의 행복도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일까. 아니면, 나는 내가 했던 말조차 벌써 따라잡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인간의 행복이란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크기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개인의 행복과 집단의 행복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게 될 때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야 할 텐데. 비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가 완전히 없어지면 나는 행복해질까? 아니, 그때 가면 또 다른 문젯거리가 생겨나겠지. 나는 또 한숨 쉬며 고민을 할 테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마구 짓밟히고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탄압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행복을 말하고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이른 일일까? 행복은 늘 미래 시제일 수밖에 없을까? 정말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완성되지 않으면 나의 행복이란 것도 없는 것일까? 아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동지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투쟁 사업장이라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이 말을 마음으로 이해하기엔 나는 아직 어린 것일까? 아니면 쓸데 없이 생각만 많은 것일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자기 삶을 지켜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다. 또 어딘가에는 그런 노동자들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바라보며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다. 나의 몫은 글을 쓰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말이 정말 맞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글을 쓰면 나는 행복해질까? 내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내 글에 담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게 된다면, 나도 행복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만져볼 수 있게 될까?
앞쪽으로 나 있는 골목길은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고민들을 나 혼자서 끝까지 안고 가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