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노동자대회가 끝나고 나는 꿈을 꾸었다.
이곳이 어딜까. 가물거리던 시야가 서서히 환하게 트이기 시작하더니 뭔가 거무칙칙한 것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을 비볐다.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막 지갑을 꺼내고 있었고 지하철 개찰구에 달린 가로 막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교통카드가 든 지갑을 얼른 버릇대로 개찰구 위에다 얹었다. 삑 소리가 나며 막대가 앞으로 밀렸다. 새까만 덩어리들이 저쪽에 한데 뭉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경들이었다.
전경? 그러고 보니 나는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 온 것이었다. 아, 여긴 지하철 서울역이구나.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개찰구 있는 곳에서부터 전경들을 마치 검은 바둑돌 쏟아 놓듯 쫙 깔아 놓았구나. 전경들은 손에 구깃구깃한 종이를 저마다 한 장씩 들고 있었다. 그 곁을 스치면서 슬며시 쳐다보니 그것은 ‘불법시위 수배자 명단’이었다. 명함 크기 반만 한 사진들이 16절지 한 장에 빼곡하게 실려 있었다. 수배 중이라는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생각났다.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인간 사냥을 하려고 이것들이 메뉴판까지 만들어 왔구나. 나는 혹시라도 그 종이에 내 얼굴이 실려 있지는 않을까, 전경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나를 잡아채 가지 않을까 가슴이 벌렁거렸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땅 위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에도 전경들은 방패를 앞에다 세운 채 표정 없는 얼굴로 무리 지어 서 있었다. 전경들 근처에는 허름한 점퍼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사람들 몇몇이 담배를 피우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동남아 관광이라도 다녀 왔는지 하나같이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운동화를 신고 있는 그들은 분명 사복 경찰들일 것이었다. 촛불집회 때 사방팔방으로 날뛰며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인 놈들이었다. 왜소한 몸집이지만 잘못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바로 그 무시무시한 놈들이었다.
땅 위로 올라오니 서울역이 보였다. 사복 경찰은 한둘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구를 하염없이 기다리는지 한 곳에 못 박혀 선 사복 경찰들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한 순간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사복 경찰들 옆을 지나가니 눈앞에 또 전경들이 까맣게 몰려 있는 게 보였다. 늙수그레한 형사들도 보였다. 정복을 입은 경찰 간부들도 있었다. 모여서 단합대회라도 하려는지 그야말로 공권력 총출동이었다.
▲ 세상에, 전경버스들은 서울역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마다 빽빽이 세워져 차도와 인도를 격리하고 있었다. |
전경버스로 만든 벽은 인도를 둘러싸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소시지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는 전경버스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세워져 있는지 궁금해졌다. 높은 건물 옥상에라도 올라가 한 번 내려다 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몸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깜짝 놀라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어, 어 하며 몸의 균형을 잡으려 애썼지만 주변에 있는 전경들과 사복 경찰들은 그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이건 꿈일까. 내 몸은 점점 높이 솟아오르더니 마침내 서울역 시계탑까지 올라갔다. 꿈이겠거니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발 디딜 곳이 없는 허공에서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세상에, 전경버스들은 서울역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마다 빽빽이 세워져 차도와 인도를 격리하고 있었다. 몇 대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전경들은 서울역 지하철 입구마다 많게는 수십 명씩, 적게는 예닐곱 명씩 방패를 앞에 세운 채 서 있었다. 수배자들을 잡기 위해 열 개가 넘는 지하철 입구들 전부에다 전경들을 심어 놓은 것이었다.
정신없이 이쪽 저쪽을 둘러보고 있는데 별안간 나는 한 전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어느새 내 두 발은 단단한 보도블록을 딛고 있었고 눈앞에는 방패를 든 전경 한 명이 입술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말이 나왔다.
“얼굴이 왠지 낯이 익네요. 우리 어디서 봤죠? 촛불집회 때 시청에서? 기륭전자 앞에서? 그것도 아니면 홈에버 상암점 앞에서? 명동성당에서? YTN 앞에서? 광화문에서? 어디서 봤더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우리들에게 중요한 건 당신들입니다.”
“.....”
“오직 당신들만이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그게 무슨.....”
“우리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경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느닷없이 전경의 몸뚱이가 둘이 되었다. 둘이 된 전경은 넷이 되고 또 여덟이 되고 또 열 여섯이 되었다. 그렇게 자꾸만 증식하던 전경은 어느새 중대 하나는 족히 채울 만한 머릿수로 변해 있었다. 나는 설마 하는 기분으로 전경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전경들이 방패를 땅바닥에 쿵쿵 찧더니 나를 향해 와아 하는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져 버렸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군홧발 소리가 순식간에 나를 스쳐 지나갔다. 환영들이었을까? 눈을 떠 보니 내 몸은 다친 곳 하나 없이 말짱했다. 그런데 몸이 문제가 아니었다. 웬일인지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내 주위에는 사람들 한 떼거리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얼른 옆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갑자기 “저 새끼 잡아!” “사복이야!” “골목으로 들어간다!” 하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골목을 빠져 나와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입구로 도망쳤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곳은 어느 극장 현관이었다.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한 남자가 육상선수처럼 아까 그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언뜻 보기에도 사복 경찰 같았다.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헉헉대며 쫓아 들어갔다. 잠시 후에 사복 경찰은 자신을 붙들려는 사람들을 어깨와 허리를 마구 휘둘러 떼어내며 정말 무서운 빠르기로 다시 골목을 나와 저쪽으로 달음질쳤다. 저쪽에는 전경들 한 무리가 식식대며 서 있었다. 몇몇 전경은 등에다 산소통 비슷하게 생긴 것을 짊어지고 길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이게 뭐지? 왜 갑자기 밤이 된 거야? 여긴 서울역인가? 나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네? 하고 생각하자마자 또 금세 빗줄기가 멎었다. 사람들은 꺄아악 소리를 지르며 자꾸만 저 앞쪽으로 달아났다.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빗줄기는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각이 져 쏟아져 내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빗방울들은 시퍼런 색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물대포였다. 그럼 아까 그 산소통 비슷하게 생긴 건 휴대용 색소 분무기로구나! 나는 부리나케 등을 돌리고 물대포를 맞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따라 저 앞쪽으로 뛰었다.
얼마 가지 못해 나는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가라앉히고자 눈에 보이는 아무 건물 입구에 뛰어들어갔다.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바깥을 내다보니 물줄기는 점점 높이 솟구쳐 더 많은 사람들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시퍼런 물줄기를 맞은 사람들이 하나 둘 작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줄어들어 생긴 조그만 덩어리는 곧 푸드덕 소리를 내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이럴 수가. 그들은 새가 되어 버렸다. 머리에서 꽁지까지 아주 새파란 새였다. 거리는 곧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흩날리는 깃털로 가득 찼다. 물보라처럼 안개처럼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는 물줄기 속을 뚫고 새들은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때 내가 있는 곳으로 누군가가 바람처럼 달려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란 채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온몸에 물에 젖은 아저씨였다. 나는 그 아저씨와 잠시 어안이벙벙한 눈으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아저씨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착 붙어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저씬 누구세요?”
“안 돼. 난 아직까지는 새가 될 수 없어. 난 알아야 하겠어. 저들을 이토록 미워하도록 만드는 게 누군지.”
“.....?”
“이봐. 자네 바둑 좋아하나? 딱 보면 흰 돌과 검은 돌뿐이니 단순할 거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지. 흰 돌들과 검은 돌들이 마주하는 곳은 언제나 변한다고. 저마다 자기 모양도 시시각각으로 바꾸어 가면서 말이야.”
“.....네?”
“오늘 광복절이잖아? 집에서 쉬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지. 나와서 우리가 한 일이 뭐야? 나쁜 것 나쁘다고 외치고 좋은 것 좋다고 외쳤어. 그거밖에 안 했는데 갑자기 저 시커먼 것들이 나타났지.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미워하기 시작했어. 욕하고 조롱했어. 그런데도 내 속은 편해지지 않았지. 그제야 생각이 미친 거야. 미움이라는 건 독한 것이어서 마음에 품기 시작하면 속이 아프단 말야. 저놈들은 분명 나쁜 놈들야. 하지만 원래 저렇게 우리를 괴롭히려고 태어난 놈들은 아냐. 지금 우리는 두부 자르듯 편을 가른 채 맞서고 있지만 이건 시시한 흑백논리가 되어선 안 돼. 저놈들 중에는 위에서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쓸데 없이 우리에게 함부로 막 대하는 나쁜 놈들도 분명 있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야. 더 나쁜 놈들을 찾아내야 해.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만 내 속에 미움이 자라게 하고, 저놈들과 우리를 싸움 붙이는 그 나쁜 놈들은 대체, 누구지? 이봐, 자네는 아나?”
나는 엉겁결에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 나쁜 놈들은..... 눈에 보이나요, 안 보이나요?”
“자네 지금 스무 고개 하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넨 눈으로만 보나? 본다는 건 또 뭐야? 바둑 둘 줄 몰라? 자넨 바둑을 눈으로 두나, 손으로 두나, 머리로 두나, 마음으로 두나?”
“.....글쎄요.”
“모르겠지? 나도 몰라. 하지만 우리는 바둑을 둘 수는 있지. 나쁜 놈들도 똑같아. 그냥 알 수 있는 거야. 난 이제부터 그놈들을 찾으러 갈 거야.”
물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새들은 끼루룩 소리를 내며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가로등에서 나오는 불빛을 넘어 건물 위쪽으로 날아오른 새들은 더 이상 파랗지 않고 검게 보였다.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다 새가 된 걸까요?”
“어디론가 날아갔겠지. 괜찮아. 언젠간 다시 돌아올 거야. 하룻밤 자고 나면 저들은 다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새가 되었다는 기억을 잊지 않고만 있는다면 다시 돌아오겠지. 뭔가를 잊지 않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
“누구나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할 권리가 있지. 하지만 깊어야 해. 밑바닥이든 천장이든 끝까지 밀고 가 봐야 한다구. 세상엔 흰 돌과 검은 돌만 있는 게 아니야. 마주한다고 해도 이쪽과 저쪽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지. 나는 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어.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네. 무엇이 나쁜 건지는 알고 있지만 누가 나쁜 건지는 알 수 없었지..... 그럼 난 가 보겠어. 근데 왜 하필이면 파란색일까? 눈물나게스리.....”
아저씨는 어느 틈에 다른 쪽 골목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전경들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리엔 살수차도 전경들도 파랑새들도 없이, 물에 젖어 더 검어진 아스팔트 위에 굴러다니는 비닐봉지와 신문지들 뿐이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꿈이라면 어서 깨어나고 싶었다. 지하철 역을 찾으며 내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시장 바닥 같이 우꾼한 분위기가 느닷없이 나를 감쌌다. 앞에 펼쳐진 길 양쪽에는 천막들이 길게 두 줄을 이루며 세워져 있었고 천막에서는 갖가지 술안주 냄새가 흘러나왔다.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도 뒤에서도 계속 나를 밀치며 지나갔다. 나도 뒷사람에 밀려 다른 사람들에게 어깨를 부딪혀 가며 앞으로 조금씩 걸어갔다. 전해투 후원 주점이라고 쓰인 천막 안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병학씨! 뭐하세요? 이리 오셔서 한 잔 하세요! 요새 저희한테 너무 소홀하신 거 아니에요?”
고개를 돌렸다. 강남 성모병원 비정규직 조합원들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 화요일에 갔던 게 마지막이었구나. 강남 성모도 그렇고, 요새 현장에 통 가보지를 못했네. 왜 그랬을까? 왜.....나는 성모병원 조합원들을 보면서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콜트/콜텍, 하이텍 후원 주점이 보였다.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후원 주점도 있었다. 전철연에서 차린 주점도 있었다. 따듯한 김이 오르는 안주를 썰고 있는 사람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다. 술잔을 꺾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웃고 있었다.
이랜드일반노조 주점이 보였다. 그 앞에서 이경옥 부위원장님을 만났다. 나는 잘됐구나 싶어서 그동안 평소에 생각해 온 것들을 말씀드렸다.
“현장 이야기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노동자 글쓰기 모임 같은 걸 만들어 볼까 해요. 직접 조합원들에게 청탁을 해서, 한 줄도 좋고 한 장도 좋으니 그냥 일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써 달라구 하는 거죠. 이랜드 일반노조에는 노래패도 있고 몸짓패도 있지만 글패가 없잖아요. 강남 성모에도 투쟁 일기를 매일 쓰신다는 분이 있고.... 사업장들마다 몇 분씩이라도 함께 하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는 모임을 좀 만들어 봤으면 좋겠어요. 어느 정도 성과물이 모이면 참세상을 통해 공개를 하든지, 아니면 문집을 만들든지.....”
“좋은 생각이네. 그런데 제가 조합원들에게 글까지 쓰라고 하기는 좀 무리일 것 같아요.”
“아, 그건 뭐 제가 따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모아야죠. 일단 한 번 해보려구요.”
다시 걷다 보니 책을 파는 곳에 이르렀다. 삶이보이는창과 작은책이 있었다.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계속 걸어가니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쇠로 된 막대와 나무판자들을 잔뜩 늘어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 무대를 해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경버스들은 아직도 군데군데 보였다. 전경들도, 사복 경찰들도 분명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찬바람이 외투 속으로 파고들어와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덥게 하기 위해 나는 무작정 앞으로 빠르게 걸었다.
계속 걷던 나는 어느새 어떤 커다란 방에 들어와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사방이 하얀 벽으로 막혀 있는 방이었다. 저쪽 앞에 서 있는 여자 한 명이 보였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온 건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덩이들이 떨어졌다. 나는 바람처럼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달려 나가니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뒤얽힌 야산이었다. 저 앞에 낭떠러지가 보였다. 나는 힘껏 발구르기를 해서 낭떠러지로 뛰어 내렸다. 땅바닥으로 곧바로 곤두박질칠 줄 알았던 나는 마치 낙하산이라도 매달고 있는 듯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았다. 낭떠러지 중턱에도 풀과 나무가 잔뜩 자라 있었다. 나뭇가지와 풀잎이 가라앉고 있는 내 얼굴을 스쳐갔다. 그녀를 안은 채 흙바닥에 등짝부터 닿았다. 나도 그녀도 다친 곳 하나 없었다.
그녀가 누군지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우리 주위로 검은 헬멧을 쓴 전경들이 몰려왔다. 전경들은 이곳이 접근금지구역이라고 말했다. 전경들 몇몇이 내가 분명 여자를 범하기 위해 이런 으슥한 곳까지 데리고 왔을 거라 재깔거리며 킥킥 웃었다. 나는 화를 내면서 욕을 했다. 옆을 보니 그녀는 어느새 전경들 한 무더기에 둘러싸여 저쪽으로 가고 있었다. 쫓아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나는 어느 방 입구에 서 있었고 방안에는 주홍색 옷을 입은 까까머리 젊은이들이 가득 모여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홍색 옷 무더기 속에서 그녀가 보였다. 너무 멀리 있었다. 나는 어서 나오라고 부르짖었다. 그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나랑 같이 가야 한다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잡았다. 돌아보니 위아래 군복을 갖춰 입은 남자였다. 자기가 중대장이라고 했다. 나는 저 안에 있는 여자는 저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제발 좀 나오게 해달라고 빌었다. 중대장은 웃으며 나에게 쪽지 한 장을 보여 주었다. 그 쪽지에는 그녀의 글씨로(그녀의 글씨라는 것을 나는 아무 근거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범하기 위해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는 내용의 각서가 쓰여 있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지며 쪽지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있는 쪽을 쳐다보자 그녀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이 눈과 코와 입의 윤곽만이 있는 얼굴이었다. 사랑이든 증오든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럴 수가..... 중대장이 말했다. 어렸을 때 고생 같은 거 안 하고 컸지? 그러니까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러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곳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나는 중대장을 향해 소리쳤다. 이건 사실이 아니야. 중대장은 그저 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대문 같은 곳을 지나치니 다시 서울 거리 한복판이었다. 밤이었다. 부르릉거리며 달리는 자동차들 소리만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무엇 때문인지 모를 아픈 감정들이 속에서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미움일까? 증오일까? 파랑새들 사이에서 만났던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미움이라는 건 독한 것이어서 마음에 품기 시작하면 속이 아프단 말야. 가슴 속에서부터 묵직한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가슴을 힘껏 눌렀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귀에 리시버를 꽂고 히죽거리는 사복 경찰들과, 언제나 시키는 대로 할 뿐인 전경들과, 역시 언제나 시키는 대로 하는 주제에 전경들을 입안의 혀처럼 부리는 간부들과..... 그 모든 나쁜 놈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더 깊이 들어가야 된다고 했다. 그들을 미워하기 전에 왜 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까를 먼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이석행 위원장 한 명을 잡기 위해 수천 명을 동원하는 그 힘은 누구에게서 나올까. 어디에서 나올까. 나는 증오로, 그들은 폭력으로 맞서는 이 상황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이라는 걸까. 내 마음 속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 너무나도 눈부신 빛에 나는 눈을 감았다.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눈을 뜨니 나는 누워 있었고 사방은 아주 환했다. 내 방이었다. |
순간 귓가에서 빠앙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너무나도 눈부신 빛에 나는 눈을 감았다.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눈을 뜨니 나는 누워 있었고 사방은 아주 환했다. 내 방이었다. 침대 위에는 여느 때처럼 책과 음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을 비비니 손끝에 눈곱이 묻어났다. 나는 윗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창밖에서는 햇살이 눈부시도록 들이쳐 왔다.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다 꿈이었나.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아팠다. 꿈속에서 만난 그녀는 누굴까. 왜 그녀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을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나는 햇살 속에 우두커니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