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숫자만큼 절망도 늘어가겠지만 절망의 숫자만큼 희망을 꿈꾸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막 스물다섯이 되고 군 입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았을 무렵에 썼던 것 같다. 그 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그때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몰랐을까? 지금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고 있을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을까?
어젯밤(월요일)에는 방에 혼자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셨다. 학원 아이들은 여전히 별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교재로 쓰는 문제집은 내가 봐도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이걸 알아서 도대체 어디다가 써먹나 싶었다. 오로지 아이들의 성적을 위해 시 몇 편을 갈기갈기 해부하고, 이게 은유법인지 직유법인지 가르쳐야 했다. 나는 떠드는 아이들에게 건성건성 조용히 하라고 했을 뿐 그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문제집에 나오는 것들은 아무리 배워도 소용이 없다. 전부 다 하찮은 것들이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놈들이나 죽어라 공부하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선생님이기에, 아이들이 수업하기 싫다고 하면 수업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발랄하게 떠들고 옆 친구랑 수다 떠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게 나는 더 좋았다. 한나라당을 찍고 노조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하는 배불뚝이 아저씨들도 옛날 어렸을 때엔 다 저랬을 거라 생각하면 우울해졌다.
그런 우울함 때문에 혼자 술을 마셨나? 다른 일도 있긴 했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막 부천에 내렸는데 전화가 왔다. 서울 서부비정규직센터 준비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선배였다. 강남 성모병원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기어이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고 했다. ‘재점거’였다. 다가올 새벽에 용역 깡패들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했다. 시계를 보니 밤 열 시였다. 성모로 달려갈까 잠깐 생각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전날 밤도 글을 쓰며 밤을 꼬박 밝혔다. 학원에 출근하기 전까지는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정리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여기까지 글을 썼는데도 내가 혼자 방구석에서 술을 마신 이유가 밝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젯밤에 또 무슨 일이 있었지?
아버지 방에 있던 감초술(소주에 감초 조각들을 넣어 만든 술. 씁쓰름하면서도 달착지근하다. 소주보다 더 독하다.)을 몰래 가져와 음악을 틀어놓고 홀짝거렸다. 요 며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TV 광고 화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콜트-콜텍/하이텍 고공농성장, 홈플러스 상암점 천막농성장, 기륭전자,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 수많은 노동자들의 얼굴 얼굴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도 몸이 피곤해서 그랬는지 금세 취해 버렸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불량배들을 때려죽이는 오락을 신나게 했다. 매번 할 때마다 똑같은 곳에서 똑같이 생긴 깡패들이 튀어나와 내가 조종하는 주인공에게 덤벼들었다. 주인공은 화려한 기술을 가졌다. 쇠파이프를 휘두를 줄도 알고 장검을 내지를 줄도 안다. 불량배들이 으아악거리며 마구 죽어 넘어지는데도 나는 점점 성질이 났다. 술을 더 마셨다. 술에 취하면 흔히 그렇듯, 내가 지금껏 해 온 일들이 하나같이 너절해 보였다. 까짓 거 글 같은 거 써서 뭐해? 어따 써먹어? 나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달콤한 꿈을 꾸었다. 눈을 뜨는 순간, 꿈이었다고 깨닫는 순간 나는 으아 울고 싶어졌다. 꿈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른 아침도 아니고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가 있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꿈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뭔지 모를 감정이 서서히 나를 사로잡아 가슴 속을 얼얼하게 만들더니 뒤늦게야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불량배들을 때려죽이는 오락을 했다. 주먹으로 치고, 날아서 발길질을 하고, 붙잡아 집어던지고, 칼로 찔렀다. 요 며칠 동안 글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랬을까? 머릿속이 죄다 졸아붙은 것 같았다. 생각이란 것을 하기가 싫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실컷 낭비했다. 화요일은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오후가 되니 잠이 왔다. 낮잠을 잤다. 눈을 뜨니 저녁 여섯 시였다. 일어나자마자 투쟁 사업장 이름들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강남성모병원과 부평 대우자동차판매지회. 각각 저녁 때 문화제를 연다고 했다. 콜트-콜텍/하이텍. 고공농성장에서 단식을 진행하고 있는 두 지회장의 몸이 몹시 안 좋은 상태라 했다. 의료진이 고공농성장에 들어가는 와중에 비닐 덮개가 찢어졌는데 한 조합원이 비닐을 수선하려고 송전탑 위에 올라가려 하자 경찰들이 에워싸 폭력을 쓰며 붙잡았다고 했다. 나는 세수를 하고 옷을 입으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을 때 비로소 생각했다. 한 번도 안 가 본 곳으로 가자. 부평으로 가자.
인천 지하철을 갈아타고 갈산역에서 내렸다. 나는 그냥 GM대우 공장으로 가면 되는 줄 알았다. 한참동안 GM대우 공장 부근을 헤매다가 결국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니 전경 버스들이 쫙 깔린 곳은 저쪽 고속도로 입구쯤에 있는 대우자동차판매(줄여 대우자판)라고 했다. GM대우와는 아예 법인이 다르다고 했다.
대우자판 앞에 이르니 정문 옆에 붙어있는 창고 비슷해 보이는 낮은 건물 옥상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촛불을 켜 들고 있었다. 정문 앞은 흉물스러운 전경 버스가 턱하니 가로막고 있고 전경 버스가 있는 바로 옆 도로에서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 대우자판 앞에 이르니 정문 옆에 붙어있는 창고 비슷해 보이는 낮은 건물 옥상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촛불을 켜 들고 있었다. |
나는 쭈뼛쭈뼛 맨 뒤로 가서 앉았다. 오긴 왔는데 대우자판 노동자들이 무얼 어떻게 왜 싸우고 있는지 하나도 몰랐다. 그제야 나도 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문화제에서 만난 아는 사람에게 물어 보니 지금 콜트-콜텍과 공동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하이텍 노동자들과 비슷한 사정이라고 했다. 다른 회사를 하나 만들어 노동자들을 그쪽으로 대기발령 시켜 버렸다고 했다. GM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달리 대우자판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라 했다. 옥상에서 촛불을 켜 들고 있는 노동자들은 본사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대우자판 노동자들이었다.
지민주 씨와 이혜규 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화여대 몸짓패 ‘투혼’이 몸짓 공연도 보여 주었다. 노동자들이 직접 나와서 노래 공연을 하기도 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눈앞에 보여지는 것들을 보고 귓가에 들려오는 것들을 들었다.
▲ 옥상에서 촛불을 켜 들고 있는 노동자들은 본사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대우자판 노동자들이었다. |
속이 좋지 않았다. 어젯밤에 마신 술 탓인가? 마음도 좋지 않았다. 간밤에 꾸었던 꿈 탓이겠지. 어쩌면 당분간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얼마 전에도 그랬으면서 또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 너무 쉬웠다. 가는 곳마다 현장이었고 오는 사람들마다 연대 단위였다. 쓰는 글마다 참세상에 올라갔다. 온종일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게 사람이라지만 그처럼 쉽게 말하기에는 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든 같이 싸우는 연대 단위들이든 저마다 많이 힘들어했다. 고민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나 혼자서만 이렇게 쉽게 말하고 쉽게 글을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했다. 내가 알고 있는 서울 지역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만 돌아다니기에도 힘이 부쳤다. 하지만 한두 번 가 보아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글 몇 편 달랑 쓰고 입 닦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것은 둘째 문제고 우선 노동자들의 싸움에 꾸준히 함께 하는 것이 중요했다. TV에 나오는 무슨 ‘맛집 기행’도 아니고, 두 번 갈 것을 세 번 가고 세 번 갈 것을 네 번 가는 성의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하지만 내 몸뚱이는 하나인데 투쟁 사업장들은 많았다. 내가 게을러서일까? 오늘처럼 오락이나 하고 뒹굴던 시간에 대학로 재능교육 천막농성장이라도 한 번 갔어야 했나?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투쟁 사업장들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려고 할까? 마침 한 노동자가 앞으로 나와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내게 지금처럼 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모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았지, 나는 요새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는 미래가 없는 놈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닌다.
한동안 아무 글도 쓰지 못하고 술만 마시고 다녔을 무렵,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술 취해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저는 지금도 마음만 달리 먹으면 이런 생활 때려치울 수 있어요. 글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고시 공부 하면 되잖아요. 아니면 좀 더 큰 학원에 취직을 하든지. 저는 그게 가장 무서워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거. 노동자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노동자들은 그럴 수 없다구요.”
내가 잘 따르는 선배 한 명이 있는데 언젠가 내 말을 듣고는 이런 말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선택? 노동자들이 다른 데 갈 곳이 없어서 지금 여기서 싸우고 있는 것 같니? 여기 아니면 일할 곳이 정말 없을까? 여기를 나가면 당장 굶어 죽어서 노동자들이 지금도 힘들게 투쟁하고 있는 것 같아? 아니야. 이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문제다. 노동자들 여기 말고도 일할 곳은 많아. 일자리는 또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노동자들이 굳이 현장을 지키며 끝까지 복직하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뭐겠니? 못 나가겠다는 거 아냐. 기분 더럽고 치사해서 안 나가겠다는 거 아냐. 열심히 일했는데도 회사에서 그따위로 대우해 주니 성질나서 못 견디겠다는 거 아냐. 끝까지 싸워서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야 말겠다는 거 아냐.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야. 너도, 지금은 술 먹고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네가 고시 공부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정말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선택은 네가 하는 거겠지만 선택 자체는 어차피 수단일 뿐이야. 너는 선택을 목적으로 삼는, 선택하기 위한 삶을 사는 그런 녀석이었니? 네 자존심이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으려 할 거다.”
정말 그럴까? 내 자존심이 내 삶을 모양 짓게 될까? 나는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들과는 절대로 한데 어울려 지낼 수 없는 심지 굳은 녀석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장은 많고 많은데 언젠가는 나도 지치지 않을까? 지치든 엄살이든 아무튼 픽 쓰러져 버리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러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안하고 깨끗하고 기품 있는 삶 쪽으로 훌쩍 도망쳐 버리지나 않을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뒹굴뒹굴 놀면서 오락이나 했던 것처럼.
하루 이틀 해 본 생각도 아니고,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내 식대로 사는 게 중요했다. 다른 누구도 내 삶에 끼어들 수 없다. 그게 부모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지금껏 그렇게 살아가고 있긴 한데 나는 문득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누가 나 보고 이렇게 살라고 했나. 내 삶이지만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휑뎅그렁한 공터처럼 머릿속이 텅 빈 상태로 문화제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앉아 있기 허리가 아프면 일어나서 사진을 찍었다. 투쟁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사진을 찍을 때는 찍는 쪽과 찍히는 쪽이 서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도록 찍어야 한다고 늘 후배는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사진기를 들이대는 순간 나는 구경꾼이요 그쪽은 당사자들이라는 선을 긋는 것처럼 될까봐 걱정스럽기만 하다. 사실 나는 원래부터 사진 찍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원고에 사진이 들어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나서 동생 사진기를 빌려 찍고 다니고 있는 것이 전부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후리는 강력한 사진 한 장의 힘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에게 그런 것은 꼭 속임수 같다. 눈 깜박할 순간을 붙잡아 정지시켜 놓고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나랑은 잘 안 맞는 듯해서, 나는 뭐든지 글로 묘사하고 언어로 표현하려 애 쓴다. 하긴 어찌 보면 글쓰기라는 것도 글쓴이의 눈으로 포착한 순간을 붙잡아 정지시켜 놓은 것일 수도 있다. 굳이 복잡하게 이야기할 것 없이, 사진 찍기가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한 것일지 모른다.
사진을 찍기 전에도 나는 투쟁 사업장에서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노동자들의 싸움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바깥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 사업장으로 들어가 취직을 하지 않는 이상, 노동자들과 동일한 입장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런데 사진기라는 구체적인 물건이 노동자들과 나 사이에 있게 되니, 꼭 내가 바깥 사람이라는 걸 조그마한 사진기가 적나라하게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기자나 사진작가라면 모를까 나는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내가 쓰는 글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자료로 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사진은 운동선수가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시합 전에 무릎에 차는 보호대와 같은 것이었다. 운동선수는 공을 따라갈 뿐 경기 중에 무릎 보호대를 신경 쓰지는 않는다.
본사 안 옥상에 모여 있는 대우자판 노동자들과 함께 '철의 노동자'를 부르며 문화제가 끝났다. 나는 문화제에 와 있던 콜트-콜텍 조합원들에게 다가가 고공농성장 쪽은 좀 어떤지 물어보았다. 두 지회장은 여전히 몸이 안 좋고 송전탑 주변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쫙 깔렸다고 했다. 추운 밤바람이 찢어진 비닐 틈을 파고들어 고공농성장은 무척이나 추울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마치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어를 써 넣고 엔터키를 치는 것처럼, 내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머릿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들을 헤집어 보았다. 없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슬며시 물러났다. 답답했다.
인천 지하철을 타고 부천으로 되짚어 오는데 십오 년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과 인기를 겨루던 듀스의 노래 가사 한 줄이 떠올랐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저 멀리서 누가 날 부르고 있어'
어렸을 적엔 생각없이 들었던 가요가 이제 와서 희한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정말 나는 누굴까? 뭐하는 놈일까? 내가 있는 여기는 어딜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내게 말했었다. "네가 그렇게 노동자들을 위하는 글을 쓰고 싶다면, 글 쓰지 말고 노동자가 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게 할 수 있어?"
나 역시 나 자신에게 종종 물었다. "넌 대체 글 쓰는 게 먼저냐, 아니면 현장에 가 함께 하는 것이 먼저냐?"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는데요. 꿈이 너무 달콤해서. 잠을 깨 눈을 떴을 때 정말 속눈썹이라도 몽땅 뽑아 억지로라도 울고 싶었는데요. 나는 속으로 열심히 변명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변명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았지만, 그 대신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었다.
GM대우 비정규지회도 한 번 가봐야 할 텐데. 결국 강남 성모병원 로비에는 오늘 못 가 봤군. 좀 있으면 이랜드 파업 500일 문화제지. 기륭은 상황이 어떨까. 콜트-콜텍/하이텍은? 코스콤은? KTX는? 동희 오토는? 재능교육은? 아이고, 이게 다 뭐냐. 나는 도리질을 쳤다.
부천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없이 새까맸지만 어둡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위가 워낙 밝아서 그랬을 것이다. 별 하나 없는 컴컴한 먹빛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내가 스물다섯 살 시절에 썼던 문장 하나를 겨우겨우 기억해 냈다. '희망의 숫자만큼 절망도 늘어가겠지만 절망의 숫자만큼 희망을 꿈꾸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읽었던 백무산 시인의 시집에서도 간신히 한 줄을 불러올 수 있었다. '꿈꾸지 않는 자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스물다섯. 세상 모든 것이 스승이라 생각하고,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하찮다고 생각하던 시절. 그때 나는 절망의 숫자만큼 희망을 꿈꾸겠다고 썼다. 그 어렵고 귀중한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해 버렸다. 그때는 절망이 나 혼자만의 절망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 혼자서만 희망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적어도 나 자신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몇 개 사소한 걱정거리들을 제하면, 내 속에 있는 절망들은 이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절망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서 품는 희망은 너무나 공허했다. 내가 가진 두 손과 두 발과 심장과 뇌만으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나는 다른 이들의 절망에서 나의 절망을 보았다. 다른 이들의 희망에서 나는 나의 희망을 보았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절망의 숫자만큼 희망을 꿈꾸겠다는 것은 내가 출발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아주 오랜 후에 내가 도착해야 하는 자리일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절망들, 더 많은 희망들과 만나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누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절망의 숫자만큼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될까?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집에 와서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라는 노래를 인터넷으로 찾아 보았다. 꽃다지가 아주 예전에 부른 노래라고 했다. 조호상 시인의 시에 가락을 붙인 노래라는데 노래 가사는 짧았지만 시는 길었다. 제목도 노래 제목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이 시를 거듭 읽으며 생각했다. 왜 그런 길로 가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나도 떳떳이 대답할 무언가를 준비해 두어야겠다고.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조호상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일러 주지 않았네
어쩌면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길
어쩌면 내가 가다가 다 가지 못할 길
누가 가라 하지 않았네
그러나 떨쳐 한 걸음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길
이 길을 가라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네
그러나 또 한 걸음
아무도 아무도 나를
싸움의 한복판으로
가라 하지 않았네
그러나 한 걸음
누구도 말리지 못할 길
아무도 이리로 가라고 권하지 않았네
아무도 나를
푸른 하늘
붉은 해만 타오르는
이 길로
가라 하지 않았네
그리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여기
적들의 목전에 와 있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새에
그러나 나는
여기까지 왔네
갑자기 환히 트여 눈이 부신 꽃무더기
그날이 보이는 길목에
어느새 나는 다다랐네
눈물고개 넘고
노동자의 길을 걸어
싸움의 세상을 가로질러
누가 나더러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단지 세상이 나를 이리로 보냈을 뿐
삶이 나를 이 길로 보냈을 뿐
흘러넘치는 세상의 길
노동계급의 가슴팍으로
한 걸음씩 딛고 왔을 뿐
한땀 한땀 적들의 사슬을 끊고
어느 순간
한꺼번에 흘러넘쳐
쓸어버리기 위해
여기까지 몰려왔을 뿐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는 않았네
누가 나를 이 길로 가라 하지는 않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