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본사를 둔 제약회사 로슈는 2003년 이래 매년 세계 에이즈의 날인 12월 1일에 전 세계의 로슈 직원들이 걷기대회 및 모금행사를 개최하고 아프리카의 에이즈 고아들을 돕기 위해 기부금을 내고 있다. 2003년 처음 이 행사가 시작된 이래 전 세계 95개국에서 3만5천여 명의 로슈 직원들이 참여해 현재까지 약 440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37억원)의 기금을 조성하여 말라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AIDS 고아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2005년부터 로슈의 한국내 법인인 한국로슈 및 한국로슈진단의 임직원들이 걷기 대회 및 기금 조성에 참여하였다.
로슈가 에이즈와 관련이 있게 된 것은 1992년부터다. '히비드'라는 에이즈약을 1992년에 출시했고, 1995년에는 '인비라제'를 출시했다. 그런데 이 약들은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두 약은 부작용 등으로 판매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로슈는 2003년에 새로운 기전의 에이즈약 '푸제온'을 미국과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2004년 11월 연간 1천800만 원으로 보험적용이 되었다. 로슈가 2003년부터 에이즈 고아를 돕는다며 걷기 시작한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푸제온은 어디로 가고, 걷기만 할까?
푸제온은 기존의 에이즈약에 내성이 생겼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기전의 약이라는 이유로 많은 기대를 받은 만큼 비싸다. 2003년에 미국에 푸제온이 공급되기 시작했을 때 ADAP과 메디케이드는 난리가 났었다. 로슈가 미국의 HIV감염인에게 요구한 푸제온 가격은 연간 약 29,000달러이다. 미국정부는 ADAP(AIDS Drug Assistance Program)과 메디케이드(Medicaid)를 통해서 가난한 HIV감염인의 치료를 지원하고 있는데, 푸제온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각 주정부마다 로슈와 협상을 벌여 푸제온 가격을 인하하든지 지원을 줄이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한편 로슈는 2004년에 한국 보건복지가족부(이하 복지부)에 푸제온을 연간 3천200만 원에 보험적용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환율로 환산해보면 미국에 요구한 가격과 맞먹는다. 복지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연간 1천800만 원으로 보험약가를 결정하자 로슈는 약값이 싸다며 공급을 하지 않았다. 로슈는 다시 2005년에 연간 2천500만 원으로 약값을 올려달라고 신청했다가 거절당하자 2007년에 연간 2천200만 원으로 신청했다. 올해 1월 건강보험공단과 로슈가 푸제온에 대한 약가협상을 벌인 결과, 약값을 올려줄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 2004년부터 지금껏 로슈는 푸제온은 공급하지 않는 반면, 에이즈 고아를 돕기 위해 매년 청계천을 걷는다. 로슈가 기금을 보내는 말라위를 비롯한 아프리카에도 당연히(?) 푸제온은 공급되지 않고 있다.
Need가 맞지 않아서 공급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었다. 로슈가 모 언론에서 "의약품 공급에 관한 문제는 해당 국가 국민이 해당 의약품을 구매할 능력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며 "실제 푸제온의 약값이 비싸다는 점에서, 한국뿐만 아니라 경제수준이 낮은 동남아지역 국가에는 푸제온 공급이 안 되고 있다. 푸제온이 한국 환자들이 구매가능한 제품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대로라면 연간 2200만원으로 푸제온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환자들은 푸제온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냐고. 연간 2200만원을 요구하는 이유를 HIV감염인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1달이 넘도록 답변을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사장이 직접 답변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7월 1일에 우리는 로슈 사장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로슈는 '약속도 없이 막무가내로 와서 업무방해를 하면 안된다'고 했다. '사장과의 면담시간을 잡아서 전화를 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은 로슈이고, 제약회사에서 약을 공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업무가 어디있냐'고 되묻자 그제서야 로슈 사장과의 면담시간을 잡아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7월 3일에 그들이 정해준 인터콘티넨탈호텔로 가게 되었다.
▲ 푸제온 공급과 약값에 관한 환자, 시민사회단체와의 면담에 나온 로슈 사장과 임원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그런데 정작 로슈는 그동안 여러 차례 언론에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답변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 답변을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뭐야 이거. 답변을 줄 생각도 없으면서 기다리라며 시간 잡아먹고, 아예 무시할 작정이었단 말이야? 그래서 언론에 밝힌 그 입장이 로슈의 입장 맞느냐고 물었더니 "오보"란다. 의약품의 공급여부 결정은 '구매력'에 따른다고 말한 적 없고 'needs'에 따른다고 말했단다.
전 세계적으로 4천만 명이 넘는 HIV감염인이 살아가고 있다. 에이즈분포지도는 전 세계 빈곤지도라고 할 만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 전 세계 HIV감염인의 90%가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HIV감염인이 살고 있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는 needs가 더 많은데 왜 공급안하냐, 로슈가 말하는 needs는 뭐냐"고 물었다. needs는 그런 게 아니란다. 그럼 '한국로슈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과 건강을 지키면서 성장해 온 기업'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까닭이 뭔가? 우리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막대한 세제혜택과 공적자금을 지원받아서 만든 약을 팔기위해 생명존중, 기업윤리를 등에 업지만 정작 환자의 needs는 안중에도 없다는 점이다.
투명한 거(transparency)? 논리적인 거(logic)? 우리도 완전 좋아해!
로슈는 그 자리에서 푸제온이 공급되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 약가제도가 "logic"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로슈 뿐만 아니라 그동안 미국정부와 초국적제약회사들은 한국의 약가제도, 건강보험제도의 '불투명성' 때문에 한국의 환자들이 신약을 원하지만 먹을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다국적제약협회는 복지부가 약제비를 절감시키겠다고 2006년에 약제비적정화방안을 발표하자 반대기자회견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 우리야말로 투명한 거(transparency), 논리적인 거(logic) 대환영이다.
그동안 로슈가 푸제온의 '연구개발비가 많이 들었고, 생산과정이 복잡하여 고비용이 소요되며, 연간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푸제온의 약값을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해 왔다. 연구개발비와 생산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얘기하고, 우리가 왜 1년에 2천200만 원을 내야만 하는지 우리를 납득시켜보라고 했다. 로슈 사장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2가지 자료를 던져주었다. 하나는 세계은행에서 소득에 따라 전 세계 국가를 3부류로 분류한 자료와 2008년도 건강보험 재정현황표이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고소득국가로 분류되어있고, 건강보험재정이 바닥나지 않았으니 선진 7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일본)의 가격을 기준삼아 약값을 정해야한단다. 2천200만 원도 많이 봐 준 것이란다.
로슈는 세계은행의 국가분류표에 따라 미국직원들과 한국직원들에게 똑같은 연봉을 주는지 묻고 싶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인데 2만 달러가 넘는 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건강보험재정이 몇 년째 적자상태여서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메워서 간신히 유지를 하고 있고, 매년 보험료를 몇 % 올려야 건강보험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 우리사정이라 치더라도 로슈와 브리스톨마이어스큅(BMS)야말로 약값의 근거로 들먹였던 연구개발비와 생산비용을 대지 않으니 '불투명'하고 'logic'이 없는 게 아닌가? 참, 면담할 때 기자들 있으면 면담안하겠다고 기자들 나가라고 한 것도 '투명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왜 자꾸 자본주의를 혐오하게 만드니?
로슈가 한국의 약가제도에는 logic이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봐도 그렇다. 유시민 전 장관이 한미FTA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던 약제비적정화방안은 약값기준도 없이 제약회사가 부르는 약값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고, 제약회사가 공급거부를 해도 대책이 없는 제도이다.
약제비적정화방안 시행 후 첫 사례였던 백혈병치료제 '스프라이셀'의 약값이 연간 4천만 원으로 결정되었다. 스프라이셀을 판매하는 제약회사 BMS는 1년 치 약값으로 5천만 원을 요구했다. 5천만 원이 누구에게는 전세값이고, 누구에게는 5~10년간 허리 졸라매가며 저축한 돈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평생 손에 쥐어보지 못한 돈일 것이다. 복지부는 5천만 원을 두고 10%를 인하할지 20%를 인하할지를 저울질 하였다. 5천만 원이든 4천만 원이든 환자들과 건강보험이 감당할 수 없는 '살인적' 가격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자생명을 놓고 4천만 원, 5천만 원 판돈을 거는 노름판이나 다름없는 약값결정과정에 대해 환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약값을 정하는지' 묻자 돌아온 답은 "약값은 오직 신(神)만이 알 뿐"이라는 것.
실제 약가협상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건강보험공단 실무자들이 제약회사가 요구한 약값에 대해 인하의 필요성을 제기할 때 제약회사가 공급을 거부할 경우를 우려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며, 스프라이셀의 경우 역시 BMS가 공급을 거부할까봐 연간 4천만 원의 약값 비싸다는걸 알면서도 받아들였다. 푸제온, 스프라이셀의 사례는 '특별'한 예가 아니라 의약품관련 법과 제도에 내재되어 있는 결함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자 '대표'적 사례이다. 어떤 약을 얼마에 공급할지를 제약회사가 정한 범위 내에서 선택하는 방식은 건강보험재정을 위협하는 순간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제약회사의 횡포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약값기준을 정하고 공급대책을 마련하여 약이 환자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 투명하고(transparency) 논리적인 것(logic)을 담보하는 길이다.
그런데 복지부는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시장경쟁 논리에 의해서 정부가 의약품의 공급을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든 것을 돈을 주고 사야한다지만 사람목숨마저 사야한다면 어느 누가 그걸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가 이런 거면 정말 아니다란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든다.
로슈가 할 수 있는 것
'한국로슈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과 건강을 지키면서 성장해 온 기업'이라고 계속 말하고 싶으면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푸제온 약값으로 1년에 2천200만 원을 꼭 받아야겠다면 그 돈을 못 내고 죽어가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에이즈환자를 위해 특허권을 환자들에게 넘기는 거다. 2004년에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에이즈환자를 위해 에이즈 약에 대한 라이센스를 자발적으로 양도한 것처럼, 2004년에 BMS가 태국의 에이즈환자를 위해 에이즈 약 '바이덱스'에 대한 특허권을 줘서 훨씬 싼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그리고 2006년에 GSK가 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에이즈 약 '콤비드(한국에서는 컴비비어)'의 특정제형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한 것처럼.
로슈 사장은 면담자리에서 "특허권을 양도해도 푸제온과 똑같은 약을 만들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비웃었다. '연구개발비가 많이 들었고, 생산과정이 복잡하다'고 줄곧 말해왔는데 다른 회사가 푸제온과 똑같은 약을 뚝딱 만들어버리면 자존심이 많이 상하겠지.
그게 싫으면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365일 내내 '마라톤대회'를 하는 것이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일 걸어서 37억 원을 기부했는데, 그 돈이면 고작 168명에게 푸제온을 1년동안만 줄 수 있을 뿐이다. 대한에이즈학회가 추정한 바에 따르면 2007년 12월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생존 감염인 4천343명중 약 1천 명이 에이즈약을 투약중이며, 이들 중 88~138명이 치료에 실패하여 푸제온과 같은 약이 필요하단다. 그러면 전 세계 4천만 명의 HIV감염인 중 최소 100만 명의 환자에게 푸제온이 필요하단 얘긴데, 이들을 살리려면 연간 22조원이 필요하다. 로슈가 365일 내내 걷는다면 2천700억 원이다. 연간 22조원를 만들려면 전 세계 로슈 직원들이 365일 내내 걷되, 지금까지보다 81배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가능하다. 로슈야 365일 내내 눈썹 휘날리도록 뛰어보던가 아니면 업종을 변경해야겠다. 살인전문회사로.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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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란 님은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