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본에 사는 갑부인데 으리으리한 거실, 편안해 보이는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있다. 그 때 집사라 불리는 또 다른 남성이 만지기에도 아까워 보이는 아리따운 꽃 접시에 김을 한 장 대령한다. 느긋하게 앉아있던 그 남성, 눈 게슴츠레 감고 그 김을 야금야금 음미하며 먹는다.
저 김이 과연 무엇이길래 저토록 황홀한 표정으로 먹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번뜩 번뜩거리는 그 김은 우리가 매일 집에서 밥에 돌돌 말아먹는 평범한 김이 아니라 ‘금으로 만든 김’이다. 금이 몸에 좋다는 소식을 들은 갑부가 특별히 주문제작하여 매일 한 장씩 그렇게 오르가즘에 취하듯 느끼한 표정으로 입에서 살살 녹이고 있는 것이다.
변변한 금 목걸이나 반지 하나 없는 나에게 ‘금‘은 간혹 돈 좀 버는 선배에게 딸려 횟집에 들어갔을 때 맘씨 좋은 주인장 아저씨가 내어주는 ’금가루를 탄 술‘ 서비스 한 잔 정도였다고나 할까. 알딸딸한 술기운에 취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몸에 좋다는 금 술 한잔 더 달라고 할 때까지 내게 금은 그저 약간은 신기하고 약간은 비린 듯한 술 한 잔이었을 뿐이었다. 때로는 금 김을 먹으며 기름이 줄줄 흐르던 그를 생각나게 하는 그 무엇.
그러던 어느 날 그처럼 별 볼일 없어보이던 ‘금’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들어왔다. 금값이 매일 매일 천정부지로 치솟는다고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그 즈음, 내 가슴에 들어온 그 비수는 사실 금이 아니라 금보다 비싼 약 스프라이셀이었다. 이 약을 생산하는 미국계 초국적 제약회사 BMS(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는 스프라이셀의 하루 약값을 금 한돈 값이 훌쩍 넘는 14만원을 요구하며 환자들의 생명을 흥정하기 시작하였다. 글리벡이라는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백혈병 환자들은 이 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 하루 약값 14만원이면 한달 400만원, 1년이면 5,000만원이 넘어가게 된다. 이 돈은, 재개발지역 달동네 구석퉁이에서 살고 있는 내 집 전세값과 맞먹는다. 매년 나의 사랑스런 보금자리를 제약자본에게 넘겨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다 문득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았다. 정부는 ‘적정한 약값을 투명하게 산정’하기 위하여 2006년부터 약제비적정화방안을 시행하였다. 약제비적정화방안이 내 보기에 비록 한미 FTA 때문에 너덜너덜 추레한 걸레가 되었을지라도, 당시 보건복지부는 여전히 깨끗한 행주라고 주장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걸레로는 나의 신성한 밥상을 닦아서는 안 된다는 진실을 정부는 제대로 증명해 주었다.
보험자의 대표, 건강보험공단은 BMS사와 약가 협상에 들어갔다. 공단은 BMS사가 요구한 약값의 약 20%를 깎는 수준을 제시했으나 이빨이 먹혔을 리가 없다. 그런데 왜 20%였을까.
‘이에는 이, 귀에는 귀‘라는 속담이 문득 떠올랐음이 틀림없다. BMS사가 개발·생산 비용이나 원가, 한국 환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 등에 대한 적절한 기준 없이 터무니없이 약값을 들이미니 공단 또한 아무런 기준도 없이 20% 정도 배팅을 해본 것이다. 실제 보건복지부는 약가를 협상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합리적인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당당하게 실토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이라는 공식을 뼛속 깊이 파묻고 사는 제약자본으로서 공단의 근거 없음에 어디 입 다물고 ’날 잡아잡슈‘ 할 수가 있었겠는가. 당연히 지난 1월 14일, 공단과 BMS사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스프라이셀은 기존 약제에 내성이 생긴 백혈병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필수약제이다. 보건복지부는 약제비적정화방안을 시행하며 필수약제에 대해서는 ‘직권등재’하겠다는 어려운 말로 머리를 어지럽혔다. 쉽게 말하자면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약은 복지부가 책임을 가지고 보험급여도 해주고, 공급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프라이셀은 복지부로 넘어갔고, 드디어 복지부는 서슴지 않고 해댔던 그 어려운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복지부는 또 다시 그 이름도 어려운 ‘약제급여조정위원회’라는 곳에서 스프라이셀 약값을 조정하겠다고 하였다.
3월 14일 1차 조정위원회에서 BMS는 여전히 높은 가격을 고수하며 조정을 결렬시켰다. 복지부는 그 어려운 말들을 너무 당당히, 또한 너무 자주 해왔던 죄가 있는 바, 4월 11일 2차 조정위원회를 열기로 하였다.
도대체 여전히 콧대 높은 BMS사를 어떻게 ‘조정’할지 궁금해서 복지부에 물었다. ‘너네 무슨 기준으로 약가를 조정할래?’ 그랬더니 복지부 답변이 이랬다. ‘우리가 굳이 기준을 정하지 않아도 14명의 조정위원님들께서 다 알아서 잘 할 거’란다.
그래서 2차 조정위원회에 환자·시민사회 단체들이 들어가서 물었다. ‘위원님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가격으로 약값이 결정되어야 하는디요. 무슨 기준으로 조정하실랍니까?’ 그랬더니 우리의 위원님이 답하셨다. ‘기준 없습니다요. 글고 적정한 약값은 신만이 아실꺼구만요~’
이제 4월 28일 3차 조정위원회를 앞두고 있다. 복지부도, 조정위원들도 다들 모른다는 기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는 기준으로 이번에는 반드시 조정을 하겠다고 한다. 달동네 내 보금자리가 무너지는 것 같고, 그 위에 버티고 있는 하늘도 무너질 것만 같다.
그러나 나에게도 애용하는 속담은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
그 구멍을 얼마 전 만났던 정보과 형사에게서 보았다. 며칠 전 정보과 형사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오셨나. 날을 가득 세운 나에게 형사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땡글땡글 물었다. ‘스프라이셀이 머시다요?‘ 원수 같은 이 금 알약을 가슴에 품고 살던 나는 그이가 정보과 형사라는 것도 잊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날카롭게 세웠던 날을 접어 뭉실뭉실하게 만들었다. 그이가 떠나면서 했던 말, ’이거 이거 제약회사 땜시 환자만 죽으라는 소리네요. 정부는 암껏도 안하고... 먼 이런 시상이 다 있다요.‘
바로 그 말이 3차 조정위원회를 앞둔 나에게 볕이 드는 구멍이다. 그렇다. 지금의 현실은 온 몸으로 현 체제를 지키고 있는 정보과 형사마저도 분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정보과 형사도 분노하는 이 현실, 우리도 조금 더 분노하자. 이 사회에서 절대 가능하지 않는 꿈이라고 지레 포기하지 말고 우리 조금 더 분노하자. 그래서 아픈 사람들이 제약자본의 독점 때문에, 정부의 무능함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지 않도록, 그렇게 조금 더 치열하게 살아보자.
- 덧붙이는 말
-
강아라 님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