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7월 20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양경수 분회장의 글(고 윤주형 동지와 기아차 고공농성을 둘러싼 진실)은 윤주형 열사 투쟁의 진실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으며,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고민 끝에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그것이 해고자 전원복직과 이동우 동지 조합원 인정을 위해, 노동해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열사에 대한 예의이며, 윤주형 열사의 장례투쟁에 함께 했던 백기완 선생님, 그리고 수많은 전국의 동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으로부터 외면 받았던 복직 투쟁
윤주형 열사를 포함한 화성공장 네 명의 해고자가 기아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이하 해복투)를 결성한 것은 2012년이다. 정규직 해고자와 1차 하청 해고자 두 명, 2차 3차 하청 해고자로 구성된 해복투는 처음부터 하나의 요구로 싸울 것을 결의했다. 해고된 시기가 다르고 정규직/비정규직, 1차/2차 하청으로 나뉘었으며, 조합활동으로 인한 해고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해고자, 하물며 기아차지부 조합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해고자도 있었다. 하지만 똑같이 기아자본의 탄압에 의해 해고된 노동자로서, ‘해고자 전원복직, 이동우 동지 조합원 인정’을 위해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해복투의 정당한 요구는 투쟁과정 전반에서 왜곡되거나 외면받기 일쑤였다. 해결하기 쉬운 해고자부터 순차적으로 복직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해고자 전원복직 요구는 처음부터 마치 무리한 억지 요구인양 왜곡되었다. 지부, 지회, 분회의 각급 회의와 요구안을 확정하는 대의원대회에서부터 임투가 벌어지는 치열한 공장 현장, 잠정 합의가 도출되는 교섭장에 이르기까지 해복투의 ‘조합원 인정과 전원복직’요구는 외면 받았다.
해고자들의 손을 잡아 준 것은 조합원들이었다. 조합원들은 조합 활동으로 인한 해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분보장기금조차 나오지 않는 해고자들을 후원하고 복직 투쟁에 함께 해 주었다. 연일 계속되는 퇴근장 선전과 각종 선전전에 함께 한 이들도 지부, 지회, 분회 간부가 아닌 조합원들이었다. 설움과 아픔을 달래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여준 이들 또한 조합원들이었다. 그러나 결국 해복투의 이동우 동지 조합원 인정과 전원복직 요구는 두 명 해고자의 순차적 복직이라는 합의로 갈가리 찢겨졌고, 윤주형, 이동우 동지는 복직되지 못했다. 그렇게 해복투의 요구는 민주노조 운동의 최선봉이라 불렸던 기아차지부, 지회, 분회에서 외면 받았다.
윤주형 열사의 자결, 그리고 ‘장례 투쟁’
온 희망을 걸었던 복직을 하지 못하고 맞은 2013년 1월 28일, 윤주형 열사는 우리 곁을 떠났다. 자본의 탄압, 노동조합의 외면과 고립 속에서 모든 것이 차갑다는 말을 남긴 채 자결했다. 해고는 살인이었다. 우리는 분노했고, 기아차 자본에게 열사의 죽음에 대한 사과와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살아생전 그토록 고인이 염원하던 원직복직이라도 이루자고, 한이라도 풀어서 보내자고, 해고자 신분으로 가게 하지는 말자고 요구했다. 윤주형 열사의 마지막 길을 해고자로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례과정은 장례일정과 장지 결정에서부터 처참했다. 처음부터 노동조합(지부, 지회, 분회)과 의견이 엇갈렸다. 해복투는 사측이 고인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고인의 원직복직을 받아들일 때까지 투쟁할 것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너무도 상식적인 요구였다. 최소한 이러한 요구가 실현되면 장지를 열사들이 함께 있는 마석 모란공원으로 하자 했다. 그러나 이런 요구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3일장만 치르고 장지는 수원 연화장으로 하겠다고 답해왔다.
수많은 조합원들과 연대동지들이 조문을 다녀가는 동안 다행히 노동조합은 장지를 마석 모란공원으로 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지만 고인의 원직복직 요구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더 이상의 요구는 안 된다며 처음에는 사측의 명예사원 안으로 합의를 종용했고, 그 다음에는 사망 당일을 기준으로 한 업체 재입사 안을 수용하라 했다.
원직복직에 대해 회사가 재입사 안을 고집했던 것은, 고인일지라도 자신들의 부당한 해고 탄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에 분연히 맞서야 했지만 오히려 노동조합은 더 이상의 요구는 안 된다며, 이 안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장례를 책임질 수 없다고 압박했다.
결국 해복투가 회사의 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자 노동조합은 그간의 장례비용을 정산하고 장례식장에서 떠나갔다. 조합원들과 전국의 동지들이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담아 모아준 부의함도 함께 가져갔다. 이후 노동조합(분회) 집행부는 ‘해복투가 윤주형 동지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시신장사를 하고 있다.’며 홍보물을 냈다. 고인의 원직복직만을 바랬던 해고자들의 마음은 또 한 번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고인의 소망을 풀자는 소박한 요구가 “시신장사”로 매도된 이유
장례 투쟁 기간 초기, 해복투 홍보물에 “전원복직” 문구가 들어간 적이 있다. 많은 동지들이 윤주형 열사의 생전 소망이 ‘전원복직’ 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요구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복투는 윤주형 열사를 외롭게 가게 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자책 속에서, 가시는 길이라도 하루빨리 편히 보내드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윤주형 열사만의 원직복직을 요구하기로 했다. 해고자 전원 복직이라는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수세적으로 투쟁을 정리하려 한다는 비판도 감수하며 한 결정이었다.
노동조합에도 초기부터 그러한 입장을 분명히 전달했다. 홍보물을 통해 ‘해복투의 요구는 전원복직이 아니라 윤주형 동지만의 원직복직’이라고 수차례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이를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대의원들 앞에서 김수억 해복투 위원장은 상복을 입은 채 "해고자 전원복직이 아니라 윤주형 동지의 원직복직을 요구할 뿐이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은 해복투의 요구를 왜곡했다. 그리고 윤주형 열사의 장례가 있은 지 2년, 당시 해복투의 주장은 ‘정치적 이용’이었으며 ‘시신장사’라고 호도되고 있다.
상주 몰래 고인을 염하다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가 이뤄지기도 전에 노동조합은 장례를 강행하겠다고 했다. 해복투와 조합원들, 전국에서 장례식장으로 모인 이들이 이대로는 윤주형 열사를 보낼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영안실 앞에 연좌를 했다. 고인 앞에서 물리적인 충돌만은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노동조합에 수차례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결국 많은 사람들이 연좌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인을 몰래 염습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연좌하고 있던 사람들은 염을 하러 들어가는 장례사들에게 누구의 염을 하는 것인지 확인했으나, 장례사는 윤주형 열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며 거짓말을 했다. 장례사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가. 도대체 누가 장례사에게 그런 지시를 한 것인가. 어떻게 상주인 해고자들도 모르게 관을 봉인하는 마지막 차례인 염습을 치를 수 있을까. 상주 몰래 염을 한 집행부는 결국 연좌하고 있는 사람들을 힘으로 끌어내려 했고, 연대하러 온 이들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온 몸으로 이를 막아야 했다.
연대의 힘으로 치러진 장례, 고이 잠드소서, 윤주형 열사여
노동조합이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장례식을 떠난 후 남은 우리는 고인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장례투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것만이 너무도 외롭고 아프게 세상을 떠난 열사에 대한 산자들의 최소한의 책임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장례비용도 없는 상황에서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과 전국의 동지들이 라면으로 반찬으로, 십시일반 다시 모금을 해 주었다. 윤주형 열사가 해고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원직복직’된 노동자로 모란공원에 묻히기를 함께 염원하는 많은 이들이 장례식장을 방문해 주었다.
상황을 접한 백기완 선생님까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힘을 보태시겠다고 장례식장을 방문해 주셨고, 선생님의 중재로 민주노총 비대위원장, 금속노조 위원장, 기아차지부장과의 면담이 진행되었다. 다시금 사측과의 교섭 진행을 통해 원·하청 사측의 사과를 받아냈고, 해고자가 아닌 해고된 시점에 복직된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윤주형 열사를 11일 만에 하늘로 보내드릴 수 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투쟁
‘조합원 인정과 해고자 전원복직’ 요구는 윤주형 열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금도 노동조합에서 부정당하고 외면 받고 있다. 비정규직지회에서 앞장서 투쟁하다 해고된 이동우는 여전히 기아차 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니며, 조합원들을 위해 현장투쟁을 조직하다 해고된 윤주형 열사는 자결할 때까지 노동조합으로부터 정당한 조합 활동이었음을 인정받지 못했다. 2014년 특별교섭에서 회사와 지부, 3개 분회가 합의한 ‘대법 판결에 따른다’는 합의서가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올해 노동조합은 465명 신규채용이라는, 불법파견에 면죄부를 주는 5.12 합의서를 작성했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민주노조 운동의 과거였고 현실이다. 노동계급의 단결과 노동자·민중연대를 구축하는 시발점은 왜곡이 아닌 사실에 근거한 뼈아픈 반성과 평가이며, 이를 기반으로 더 넓은 연대와 강력한 투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많은 이들이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이 이뤄지길 바라며 투쟁하고 있다.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고 있는 고공농성자(기아차 최정명, 한규협)들이 안전하게 땅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현장에서 강력한 실천투쟁과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불법파견 면죄부에 불과한 465명 신규채용 안인 5.12 합의를 폐기하고, 청소 식당 경비, 계약직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투쟁해야 한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윤주형 열사 투쟁을 왜곡한 양경수 분회장
박점규 동지가 기고했던 글은 특정인을 향한 글이 아니었다. 그 글은 기아차 만이 아니라, 지난 사내하청 10년 투쟁의 과정에서 겪었던 오류와 질곡을 반성하고 다시금 비정규직 철폐라는 계급적 단결과 실천을 해 나가자는 직언이자 바람을 담은 글이었다. 박점규 동지의 글에 대한 입장과 판단은 다를 수 있겠지만, 그에 대한 반박을 위해 윤주형 열사의 장례 투쟁을 왜곡하고 이용해서는 안 된다. 해복투와 열사대책위는 양경수 분회장에게 장례 투쟁에 대한 왜곡 중단과 이에 대한 사과를 정중히 요청한다.
추모사업회와 해복투는 윤주형 열사의 정신과 생전 투쟁의 모습처럼, 부족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 투쟁할 것이다. 노조조차 배제한 2·3차 하청과 계약직, 직영 인턴 등 기아차 공장의 모든 간접고용이 철폐되고 나아가 열사가 바랬던 노동해방이 쟁취되는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해 나갈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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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윤주형 열사 추모사업회와 기아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동지들과의 토론을 통해 작성된 글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