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모든 게 단지 그 나무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 프랑스 68혁명이 정말로 파리 낭테르 대학 여자 기숙사에 남학생들을 못 들어가게 해서 일어난 거라 여기는 사람은 없듯이, 2008년 한국의 촛불시위 때 시민들이 그저 미국 산 소고기 먹는 게 불안해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구는 경찰의 과도한 폭력 때문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거리의 시민들을 시종일관 ‘약탈자(çapulcu)’나 ‘테러리스트’로 매도한 총리의 오만방자함 때문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국을 비롯한 외국 언론들은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이의 갈등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두는 사태의 원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결과 쪽에 더 가깝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과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적 거대한 흐름 속의 터키 시위
그리고 그게 경찰폭력이나 총리의 자질이나 종교 갈등 같이 그 나라의 지극히 지역적이고 특수한 측면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과 관련이 있는 거라면, 지금 우리가 새삼 지난 6월 터키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다시 한 번 복기해볼 까닭은 충분하다. 오늘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내일 ‘우리’에게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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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현 총리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과 그가 속한 정의개발당(AKP)이 처음 집권에 성공한 건 2002년의 일이었다. 당시 이슬람주의에 기반을 둔 그들의 승리는 건국의 아버지이자 근대화 개혁의 상징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전통이 국민 다수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오던 터키에서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승리의 비밀은 “어두운 90년대”를 강타했던 정치경제적인 위기에 있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터키는 1990년대 내내 쿠르드노동자당(PKK)으로 대표되는 쿠르드 독립운동 게릴라들과 치열한 내전을 치렀다. 4만 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 그 자체도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터키 사회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병영처럼 변해버렸다. 국가안보위원회를 정점으로 한 군과 각종 보안기구들은 분리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준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시민들의 삶을 하나하나 간섭하고 통제했기 때문이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약식처형이 횡행했고, 감옥은 양심적인 지식인과 학생, 노동자, 인권운동가들로 넘쳐났으며, 독립적인 노동조합들은 차례로 와해되거나 극도로 힘이 약화되었다.
그런 와중에 1994년에 이어 7년 만에 다시 쓰나미급 경제위기까지 터키를 덮쳤다. 그러나 원내 1당이던 민주좌익당(DSP)이나 터키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자 자칭 사민주의 정당인 공화인민당(CHP), 민족주의 운동당(MHP) 같은 전통적인 기존 정당들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대중의 신뢰가 거의 바닥난 상황이었기에 위기를 수습할 역량이 없었다.
주류 정당의 무능 아래 정의개발당 집권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시민들의 눈에는 이미 밑천이 훤히 드러난 기존의 유력정당들보다 이슬람주의 정의개발당이 선택 가능한 유일한 대안으로 비쳐졌다. 한번 바꿔보면 뭔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실제로 2002년 선거에서 원내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 정의개발당과 공화인민당, 단 두 당 뿐이었다는 사실이 그런 현실을 잘 대변해준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이렇듯 터키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의 유권자들은 항상 세속주의냐 이슬람주의냐의 기준만으로 표를 던진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의 큰 착각일 수 있다. 근본적으로 그들도 물이 고여 썩으면 그게 세속주의든 이슬람주의든, 시아파든 수니파든 간에 싹 비워버리고 새로운 물을 채워 넣으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문화권의 유권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성향의 시민들 입장에서는 이스탄불 시장 시절(1994년-1999년)부터도 이미 립스틱을 바르지 말라거나 술을 마시지 말라는 등 시민들 삶에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려 했던 에르도안 총리와 처음 경험해보는 이슬람주의 집권세력이 영 꺼림칙하고 못 미더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그들을 믿어보는 수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게다가 첫 번째 집권 시기 동안 총리와 여당은 간통죄를 형법으로 처벌하는 방안을 도입하려다가 국민들의 반발과 유럽연합의 비판에 부딪혀 철회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이슬람주의 색채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이른바 ‘안정’과 ‘성장’에 집권세력의 역량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안정’이란 일차적으로 정치적 안정, 더 구체적으로는 군의 정치 개입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다. 터키에서 그동안 군이 차지해온 역할은 바다 건너에 위치한 이집트 군의 역할과 아주 흡사한 측면이 있는데, 바로 이슬람주의에 맞선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역사적으로 터키 군부는 1960년 첫 쿠데타 이후 아예 터키군 내부 복무법(Inner Service Act of the Turkish Armed Forces)이란 법적인 장치까지 만들어놓고 수시로 쿠데타나 쿠데타 위협을 통해 정치에 직접 개입을 해왔다. 그리고 1997년 유혈 쿠데타에 성공한 뒤에도 여대생들의 이슬람식 머리 스카프 착용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초등학생들의 종교학교 조기입학을 막기 위해 8년 의무교육제를 실시하는 등 이슬람주의의 확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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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군부에 맞서 에르도안 총리는 핵심 장성들을 사법부나 국가안보위원회 같은 핵심 권력기구로부터 점차 배제시키는 한편, 흔히 ‘망치 사건’으로 불리는 2003년의 쿠데타 음모 적발과 2011년의 극단적 세속민족주의 ‘에르게네콘(Ergenekon)’ 조직 사건 등을 통해 전직 참모총장을 비롯한 수백 명의 장교들을 체포함으로써 군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이번 6월 시위 때 과거와는 달리 터키 군부 개입설이 거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그런 일련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르도안, 시민 삶이 아닌 정권의 안정 추구
그런데 이 지점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에르도안 총리 정부가 본질적으로 추구한 ‘안정’이란 건 사실 국가나 시민들 삶의 안정이 아니라 정권의 안정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부의 무력화 대상 리스트에 비단 군부뿐만 아니라 사법부와 언론, 그리고 정권에 반대하는(혹은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세력이 총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터키는 사실상 정부가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사법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주류 언론도 거의 대부분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상태이다. 오죽하면 6월 시위 때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최루탄에 질식하고 물대포를 뒤집어쓰고 곤봉에 머리가 깨져나가며 경찰과 싸우는데도 텔레비전에서는 펭귄의 일생이나 가슴 확대수술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됐을까.
물론 그에 저항한 용기 있는 언론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모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감옥에 갇혔다. 어느 국제 언론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터키에서 수감된 언론인들의 수는 이란과 중국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6월 시위가 있기 이전에도 이미 감옥에 갇힌 학생들의 수는 수천 명에 달했고, 그 중 상당수는 테러나 국가전복음모 혐의를 뒤집어쓰고 중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신자유주의 경제 성장으로 불안정 확대
그렇다면 이 즈음에서 고개를 드는 의문 하나. 에르도안 정권이 그토록 나쁜 정권이었는데도 어떻게 2002년 이래 세 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해 11년간이나 권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을까? 게다가 2011년 선거에서는 단독으로 과반수를 득표해 국회 의석의 66%나 차지하는 등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율은 더 높아졌으니 말이다. 그 비밀은 앞서 이야기한 정의개발당의 두 번째 집권전략, 즉 ‘성장’에 있다.
2001년 국가부도 직전에까지 몰릴 정도로 거덜이 난 경제를 물려받은 정의개발당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내건 신자유주의 처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충실히 이행했다. 고용유연화를 통한 대대적인 노동시장 개혁, 국영기업 및 사회공공서비스 민영화와 고금리를 통한 대대적인 해외자본 유치, 고환율과 저임금을 통한 수출확대 등등, 하나같이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정책들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터키 통계청(TUIK)에 따르면, 터키 경제는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연평균 5.2퍼센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세 배, 수출은 무려 열 배가 뛰어올랐으며, 미국과 유럽의 경제위기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해외투자자들이(주로 아랍의) 돈 가방을 들고 터키로, 터키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나라에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 집값이 올라가니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에 부푼 중산층들이 너도나도 차를 바꾸고 카드를 긁어댔다. 소비가 살아날수록 경제성장률은 더욱 높아지니까 정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빚을 내서 소비를 더 하라고 부추겼다. 이 역시도 길거리에서 초등학생에게까지 카드를 발급해주며 소비자 신용 붐을 유도했던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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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아래 성장 둔화, 실업률 증가
그렇게 정의개발당 집권 기간 동안 터키는 세계에서 1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갔다. IMF의 빚도 모두 갚았다(에르도안 정부는 이걸 자신들의 가장 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부패해도 좋으니 경제만 살려달라’면서 이명박을 찍었던 것처럼 터키 시민들의 절반도 계속적인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2011년에 집권당에게 세 번째로 나라를 맡겼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절반이었다. 성장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린 상류층과 정부가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식량과 현물, 의료혜택을 지원한 최빈곤층을 제외한 일반 노동자들이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삶은 오히려 정체되거나 후퇴했다. 수출 증대를 위해 몇 년 째 저임금에 묶여 있고, 노동시장 개혁으로 비정규직이 대거 늘어나 생활은 오히려 불안정해졌으며, 언제까지 대출과 카드로 늘어난 소비수준을 유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정규직 확대와 정부의 탄압으로 노조 조직율은 8퍼센트(민간 부문은 3퍼센트)까지 떨어져 그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도 제대로 없었다. 그런 현실은 고스란히 경제 성장의 둔화로 나타났다. 2009년 경제위기야 전 세계가 모두 겪은 거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당장 2012년 작년의 경제성장률이 2.2퍼센트로 급전직하고, 청년 실업률은 22%까지 치솟았다.
에르도안의 돌파구: 재개발, 북부 쿠르드 지역 투자 진출, 이슬람주의 지지층 결속
이제 에르도안 총리와 집권당에겐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대안이 크게 세 가지, 첫 째는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과 대형 사회기반시설 건설사업을 통한 경기 활성화였고, 둘째는 쿠르드 노동자당과의 이른바 ‘평화 프로세스’를 통한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 투자 진출(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셋째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립 구도를 이용한 지지층의 결속 다지기였다.
일단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만 보더라도, 2010년 유럽 문화수도 지정을 명분으로 2008년도부터 추진된 이른바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인해 사라진 동네와 녹지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55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술루쿨레라는 지역에 거주하던 로마(흔히 집시라고도 부른다) 주민들을 죄다 쫓아내고 동네 전체를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에서부터 시작해 타를라바, 발라트 등 오토만 제국 시대 때부터 쿠르드와 그리스, 아르메니아, 유대인들이 거주해오던 동네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형 쇼핑몰이나 고급 주택 단지를 건설했다.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 도시 재개발 사업이 이스탄불에서만 모두 50여 개, 문화수도를 만들기 위해 역사와 문화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적과 골목들이 사라져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그 밖에도 10억 달러를 들여 신 공항을 짓고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등 정부 주도의 대형 건설사업들은 가히 전 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바람에 도시는 삭막한 콘크리트 빌딩숲으로 변해버렸고, 이스탄불 북부에 남아있던 250만 그루의 나무숲도 곧 잘려나갈 예정에 있다. 이스탄불 도심 안에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은 녹색 휴식공간이었던 게지 공원을 지키기 위한 시민 50여 명의 싸움에 단시일 내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동참하고 나선 까닭에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시민들 모두의 공적인 공간을 사유화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발 드라이브를 향한 집단적인 반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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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민들의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도 에르도안 정부가 재개발 건설 사업을 밀어붙이는 데는 집권당의 권력지지 기반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경쟁세력인 공화인민당은 과거에 이스탄불을 근거로 한 세속주의 도시 엘리트들과 지식인, 군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지지를 토대로 터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을 주도해왔었다. 그러던 것이 정의개발당 집권 이후엔 흔히 ‘아나톨리아의 호랑이(Anatolian Tigers)'라 불리는 내륙지방의 신흥 자본가들과 건설업자들에게로 권력의 중심추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이들과 계급적으로는 극과 극의 위치에 있지만 정의개발당의 재분배 정책으로 일정정도 혜택을 본 극빈층 주민들이 현재 에르도안 정권의 지지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분모가 한 가지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아주 신앙심이 깊고 이슬람 교리 중에서도 보수적인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흔히들 이번 6월 시위의 배경 중 하나로 꼽는 주류 판매 및 광고 제한이나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 금지, 여성들의 낙태 금지(작년에 추진했다가 시민들의 반발로 철회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꾸란 수업을 도입하고 중학교에서 이슬람 성직자 양성과정을 부활하는 등의 일련의 보수적인 이슬람주의 정책들도 사실은 이슬람주의 그 자체보다는 지지층을 이념적으로 결속시켜 권력을 계속 지켜나가기 위한 집권 세력의 필요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판단이 맞는다면, 지금 에르도안 총리와 집권 정의개발당은 아주 불행하고도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시민들을 종교로 갈라놓고 싸우게 만드는 셈이기 때문이다.
일어난 시민들...독재 vs. 민주주의, 획일주의 vs. 다원주의, 성장 vs. 가치의 대결
아무튼 그래서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지난 6월 터키에서 정부와 시민들 간에 펼쳐졌던 대결 국면의 본질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독재 vs. 민주주의, 획일주의 vs. 다원주의, 성장 vs. 가치의 대결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그렇게 본다면, 항상 진부하다고 느끼면서도 매번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 터키 시민들의 싸움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국지성 호우가 아니라 터키의 정치적, 사회적 기상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기후변화의 첫 출발점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그리고 역시나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 땅에서 싸워서 되찾고 또 지켜내야 할 가치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앞으로도 우리가 터키 시민들의 싸움을 계속 주시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터키 탁심 광장 시위 일지
원문:http://www.hurriyetdailynews.com/timeline-of-gezi-park-protests-.aspx?pageID=238&nID=48321&NewsCatID=341
번역: 수영(경계를 넘어)
2012. 12. 31 터키 정부, 흔히 “탁심 걷고 싶은 거리 사업”으로 알려진 이스탄불 도시 중심 재개발 계획을 논란 속에 시작. 시내 중심가로 향하는 도로를 폐쇄함.
2012. 11. 08 이스탄불의 카디르 톱바스 시장, 지금의 게지 공원 자리에 있다가 1940년 철거된 오토만 제국 시대 포병대 건물을 복원해 쇼핑몰로 개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
2013. 05. 27 불도저가 게지 공원의 나무들을 밀어 없애는 작업을 시작하자 재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탁심 연대(Taksim Solidarity)’ 활동가들이 공원으로 집결.
5. 28 이스탄불 경찰, 공원에서 평화적으로 연좌시위를 벌이던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살포하면서 해산작전을 벌임.
5.29 터키의 레제프 타이프 에르도안 총리, 시위대를 향해 “그들이 뭐라고 하건 간에 우리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그대로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발언으로 시민들의 반발을 삼.
5.30 경찰이 새벽을 기해 2차 해산작전을 전개하면서 시위대의 천막을 모두 불태움. SNS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 약 1만 여 명이 저녁에 게지 공원으로 집결.
5.31 경찰은 다시 새벽에 최루 가스와 물대포를 난사하며 대대적인 해산 작전을 벌이고 공원 주위에 바리케이드를 설치. 그 과정에서 기자 3명을 포함한 약 백 여 명의 시민들이 부상을 당함. 오후까지 시위대와 경찰의 공방전이 이어짐. 저녁 무렵이 되자 시민들의 수가 약 10만 명으로 불어났고, 베식타스와 카디쾨이, 이즈미르 등의 이스탄불 타 지역과 수도 앙카라와 이즈미르 등의 타 도시로 시위가 확산.
6.01 새벽 3시 경 수백 명의 시위대가 보스포러스 다리를 건너 탁심 광장을 향해 행진. 인근 주민들은 전등을 깜빡이거나 식기를 두들기면서 지지를 표시.
에르도안 총리 정부는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복원한 병영 건물에 쇼핑몰이 아닌 박물관을 들이겠다고 발표. 그러나 시위는 전국 40여 개 이상의 도시로 확산. 오후가 되자 경찰이 공원에서 철수하고 공원은 시위대의 차지가 됨. 총리 공관 주변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의 충돌이 계속, 전국적으로는 67개 도시 235곳에서 시위가 진행돼 1,730명이 체포되고 5천여 명이 부상.
6.2 에르도안 총리, 나흘간의 북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며 시위대의 요구를 일축하는 발언을 내놔. 압둘라 귈 대통령은 야당과 만난 자리에서 시위대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받았다며 자제를 촉구. 첫 번째 사망자 발생.
6.3 안타키야에서 22세의 야당 청년당원이 두 번째로 사망.
6.4 뷜렌트 아린치 부총리가 공권력 남용에 대해 사과하면서 그때까지 경찰 244명과 시위대 60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 그러나 터키의사노조는 부상자가 4,177명 부상에 달한다고 반박. 동부 툰첼리에서 격렬한 시위, 시리아에 인접한 남부 안타키야에서는 군대까지 나서서 시위대 해산. 이즈미르에서는 트위터에 올린 글을 문제 삼아 경찰이 29명을 체포.
6.5 탁심연대 대표단 6명과 부총리 면담. 앙카라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은 시위대 한 명 뇌사 판정 받음.
6.6 아다나에서 시위대를 뒤쫓던 경찰 서장이 다리 아래로 떨어져 사망. 에르도안 총리의 방문을 맞아 튀니지 시민들이 항의 시위를 벌임.
6.7 정의개발당 지지자들 수천 명이 4일 간의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에르도안 총리를 환영하러 공항에 운집.
6.8 탁심 광장 인근에 수십만 명이 집결해 시위를 벌임.
6.9 앙카라와 아다나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에 격렬한 공방전 벌어져.
6.10 에르도안 총리, 시위대에 맞서 더욱 더 강력한 조치를 예고하며 “이 사태를 끝내는 것뿐만 아니라 반드시 테러리스트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지게 할 것”이라 공언.
6.11 탁심 광장에서의 열흘간의 소강상태를 끝내고 터키 경찰이 초강경 작전을 벌이면서 광장으로 진입. 아침부터 밤까지 충돌이 계속 이어져. 정부는 더 이상 시위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
6.12 시위에 대한 지지 표시로 독일 피아니스트와 터키 음악가가 탁심 광장에서 합동 콘서트를 개최. 에르도안 총리는 시위대 대표자 11명과 면담을 가진 뒤 게지 공원 철거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칠 가능성을 시사.
6.13 “자기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라”는 이스탄불 시장의 발언에 분노한 엄마들이 “인간사슬”을 만들어 시위에 합류. 탁심연대 대표단과 총리의 두 번째 면담 직후 정부는 법원의 결정이 나올 때까지 게지 공원 철거를 중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
6.14 정부 산하의 보건부는 게지 공원에서 임시 진료소를 운영한 혐의로 이스탄불 의약협회에 대한 조사에 착수. 터키 보건의사노조는 다친 사람을 돕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의무라고 반박.
6.15 경찰이 최루가스와 물대포를 사용해 게지공원에서 시위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천막과 현수막 등의 시위용품을 모두 압류.
6.16 에르도안 총리가 이스탄불 시내에 모인 수십 만 명의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동안 시위대들은 탁심 광장과 게지 공원 재진입을 시도하며 하루 종일 경찰과 공방전을 벌임.
6.17 이스탄불 도심에서 행위예술가 에르뎀 귄뒤즈가 8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침묵시위를 진행.
6.18 귄뒤즈의 침묵시위에 영감을 받은 침묵시위가 터키 전역으로 확산. 대테러부대가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일부 시민들의 집을 급습.
6.19 사흘 째 침묵시위가 이어짐.
6.20 경찰이 이즈미르 시내 광장에 설치된 농성 천막을 구역에 설치된 농성장 철거, 30명 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