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에 담긴 비디오 속에서 21세의 여성노동자 K는 혼자서 트럭 적재함을 오르내리며, 쌓여있는 20Kg자리 비료포대 수십 개를 밭으로 '들어 내리'지 못하고 '끌어 내리'고 있었다.
▲ 혼자 비료포대를 내리고 있는 모습 |
"왜 저 많은 비료포대를 혼자서 옮겨 쌓고 있어요?"
"나, 노동자 한사람 일해요. 사장님의 어머니 하우스, 사장님의 하우스 합쳐서 12개에서 나랑 할머니(사장엄마) 둘이 일해요. 할머니는 비료 못 옮겨요."
"혼자 일해요 ? 그럼 밤에 비닐하우스에 혼자 있어요? 무서워서 어떻게 해요?"
"아니에요. 혼자 사는 거 아니에요. 나 사장님 집에 같이 살아요."
"?"
"사장님 집은 하우스에서부터 20분(약 1.5km) 걸어가면 작은 마을에 있어요. "
"... 사장님 집 커요?"
"사장님 집에 방 2개 있어요. 사장님은 외국 사람하고 결혼했어요. 아기도 있어요. 사장님 가족 방하나, 나 방하나 살아요."
"밥은요? 아침 6시에 일을 시작해서 12시에 점심 먹고, 다시 1시부터 6시까지 일한다고 했죠?"
"아침은 5시에 일어나 혼자 해먹어요. 그리고 걸어서 6시까지 비닐하우스로 가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사장님 부인이 밥해서 사장님하고 같이 먹었는데, 한 달만 그렇게 했어요. 이제 사장은 새벽에 밥 안 먹어요. 나는 집에서 나오니까 그 후에 밥 먹는지는 잘 몰라요. 점심식사도 힘들어요. 집에 가고 오는 시간만 40분 걸리니까. 한 시간 안에 음식해서 먹으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저녁식사는요?"
"저녁때도 6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집까지 걸어 와요. 사장님에게 자전거를 구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줘요. 집에 와도 사장님 가족이 먼저 밥을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그들이 밥 먹고 나서야 제가 음식을 해 먹어요."
"방은 지낼만해요?"
"내 방에 문제가 있어요. 내 방도 아니에요. 방 안에 사장님 물건들과 사장님 가족들의 짐이 많이 있거든요. 방에 잠금장치가 없어요. 한 달에 이틀이 휴일이잖아요. 그런 때는 정말 고향친구랑 놀고 싶은데, 친구를 제방으로 놀러오라고 할 수도 없어요. 지난번에 사촌언니가 멀리서 찾아왔는데, 사장이 싫은 기색이 심하고 눈치가 보여서 그냥 밖에서 놀았어요."
"......"
"선생님, 나 그곳에 사는 게 불편해요. 다른 일터로 가고 싶어요."
많은 농업노동자들이 그러하듯이 K도 노동시간이 길고 임금은 적다. 실 근로시간 대비 총임금을 따져보면 시급 3,500원 꼴이다. 2013년 최저시급은 4,860원이다. 따라서 최저임금법 위반을 주장하며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청 근로감독관들은 '긴 노동시간'을 조사할 수 없다고 발뺌하면서 노동자가 그것을 '입증할 객관적 자료'를 가져오지 않으면 주장을 도통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니, 단지 '계약당사자간 계약사항'에 불과한(?) '주거환경'의 부실함을 이유로 노동청에 진정하여 사업장변경허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K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자유가 없어요. 사장 집에 살잖아요."
맞다. 밤이고 낮이고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대안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그녀가 그 시골 마을에서 혼자서 독립된 월세방을 얻어 사는 일이 가능할까 ? 아니면 근로계약서에 ‘주거를 제공’하기로 한 사장에게,(다른 많은 노동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인적이 드문 넓은 야채밭 한가운데, 비닐하우스 안에 샌드위치 패널로 가설된 방이라도 마련해달라고 애원해야할까?
▲ 이주노동자가 일하는 비닐하우스 |
이야기 2 - 휴일
서울 과천의 한 화훼농장에서 1년 가까이 일해 온 21세 노동자 L과 P에게 한 달에 쉬는 날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참이 지나도록 ‘휴일’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농업 일을 해도 보통 한 달에 두 번은 쉬잖아요. 일요일이나 토요일에 쉬지 않았어요?”
“선생님 질문에 뭐라고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일요일에 쉬는 시간 조금 있어요.”
“뭐라고요?”
“처음 6개월간은 휴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일요일에는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일해요. 그리고 9시부터 12시까지 교회 갔다 와요. 사장님이 데리고 가요. 낮 12시부터 1시까지 밥해먹어요. 밥 먹고 1시부터 6시까지 다시 일해요. 교회 갈 때 쉬어요.”
“... 혹시 종교 있어요?”
“저는 불교신자예요. 우리나라는 불교나라잖아요.”
그들에게 지난 1년간의 근로시간을 기록해보라고 했다. 처음 4개월간은 평일과 토요일은 줄곧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1시간 동안 일을 했고, 일요일에 교회에 갔는데, 그 후 5~6개월은 그마저도 없이 줄곧 일했다.
월급은 백만 원 혹은 90만 원을 받았다. 그러니 시급 3,000원이 조금 넘을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 지내는 동안 지난 1년 동안 가 본 곳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비닐하우스 집’과 사장부부의 차에 실려 다녔던 ‘교회’가 전부란다. 그럴 것이다. 1년 동안 제대로 된 ‘휴일’이 없었던 것이다.
‘퇴직금 발생일’을 15일쯤 앞두고 갑자기 사장님이 그들을 쫓아냈다. 노동자 L이 ‘휴일이 없는데 임금이 너무 작아요’라고 사장에게 말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사장은 '다른 노동자들이 올 거야. 너희들은 가고 싶은 데로 가!' 라고 말했다.
가고 싶은 곳? 그들은 지난 1년간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비닐하우스에서 보냈다. 뭘 알아야 '가고 싶은 곳'이란 게 생기지 않겠는가? L과 P는 (‘지구인의 정류장_쉼터’가 위치한), 이주노동자로 붐비는 안산 원곡동 거리에 와서 '처. 음. 으. 로', '갑자기 들이닥친 자유(?)'의 시간을 보낸다.
만 20세인 L과 P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이 설사 '엉뚱하고(?), 촌스럽고(?) 유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행동을 한다 해도 이상하게 바라볼 게 전혀 못된다. 그들은 낯선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1년 가까이 줄곧 일만했다. 무려 3,500시간을 일했다.
‘사람’이다
노동부에 진정할 때, ‘노동자들이 사장에게 이끌려 교회에 간 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주장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L이 겸연쩍게 말했다. “제가 불교신자이긴 한데요... 교회에 가면 앉아있을 수 있고, 졸 수도 있고, 부처님이야기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 구경도 했어요. 그런데 교회 안 가게 되면서부터는 일요일에도 일만 했어요. 그 시간은 저에게는 그나마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L과 P는 노동청의 판단을 기다리며, 비슷한 처지의 수십 명의 실업자가 복작대며 사는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지내고 있다. 그들이, 예상에 없었던 이 실업기간에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 일도 안하든지, 어떤 일을 하던지 그럴 자격이 있다. 이들은 스무 살의 '사람' 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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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찬 님은 지구인의 정류장 상임 역무원입니다. 지구인의 정류장은 안산의 이주노동자 쉼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