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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브라질·그리스·불가리아·보스니아, 새로운 민주주의 광장

[기고] "우리 모두가 탁심·사라예보·상파울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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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1일 밤 그리스 정부는 긴축정책을 위해 국영 방송국 ERT를 폐쇄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 했다. 노동자는 바로 방송국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제작된 방송을 송출했고 그리스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방송국 주변에서 연대 시위를 열었다. 'ERTaksim, SMARdogan(ERT는 곧 탁심 광장이고, 사마라스는 에르도안과 같다는 뜻)'이라는 구호로 탁심 광장의 터키 시위와 연대를 표했다. [출처: facebook europeans against the political system]

터키의 봄

이스탄불의 작은 공원 철거에 반대하며 시작된 시위는 곧 터키 전국의 주요 도시와 지역으로 확산됐다. 지난 10년간 터키 정의개발당(AKP) 에르도안 정부의 승승장구는 경제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10년 간의 경험으로 터키 인민은 '경제성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공원의 파괴를 보면서 가난한 노동자, 쿠르드인들은 지난 몇년 간 자신과 이웃의 집들이 파괴된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국유재산과 공공 서비스를 팔아먹기에 정신이 팔린 에르도안 정부는 꽤 짧은 기간에 '도시 재생'이라는 명목으로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해 왔다. 게지 공원에서 철거될 위기에 놓인 나무는 가난한 노동자와 쿠르드인의 처지와 다를 게 없었다.

1950~60년대 자본주의 선진 국가의 황금기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떡고물을 던져줄 수 있었지만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강력한 권위주의적 정부와 독재가 필요했듯이 다른 많은 나라들, 특히 터키도 그랬다. 그러나 인구의 99.8%가 이슬람 신자인 나라에서 군부는 세속주의 국가의 버팀목이었다. 이슬람 성향의 정의개발당 정부는 권위주의적 경제성장-신자유주의화를 위해 군부를 동원할 수 없었다. 그들이 기댄 것은 이슬람화였다. 술의 판매와 광고를 제한하고, 공공장소의 애정표현을 금지하는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권위주의적 조치들이 잇따라 시행됐다. 젊은이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게지 공원의 나무를 통해, 가난한 노동자ㆍ쿠르드인의 처지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게 아닐까.

5월 말 시작된 터키에서의 저항은 에르도안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인구의 다수가 이슬람 신자인데다가, 에르도안 정부가 이슬람주의적인, 하지만 근본주의적 색채와는 거리가 있는 교육 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저항이 당장에 2012년 튀니지ㆍ이집트와 같은 봉기와 승리로 이어지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니 지금 터키에서의 투쟁은 민주주의의 훈련장으로서 새로운 민중의회 실험과 용기있는 개인들의 침묵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보다 공공 서비스

터키에서의 반란이 고비를 넘기도 전에 브라질에서 또 다른 시위 소식이 들려왔다. 인구 900만 명의 상파울루 시정부가 대중교통 요금 인상을 발표하자 여기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대중교통 요금을 3.0헤알(1570원)에서 3.2헤알(1670원)으로 올리려 했다. 그 자체로 우리보다 비싼 대중교통 요금이지만 최저임금(2013년 기준 378헤알, 35만원)을 고려하면 더더욱 엄청난 것이다. 상파울루에서 수천 명이 시작한 시위는 곧 리우데자네이루, 브라질리아 등 브라질의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18일에는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대한 불만은 곧 삶의 질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2003년 룰라가 대통령에서 당선되면서 시작된 노동당 정권 시대는 빈곤퇴치와 경제성장의 모범으로 꼽혔다.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 유치는 지난 10여년 간 성공의 달콤한 열매가 될 것 같았다. 1인당 국민총소득(구매력평가지수 기준)은 2003년 7280달러에서 2011년 1만1420달러로 증가했다. 그러나 인민이 느끼기엔 여전히 부족했던 것 같다. 젊은 노동자들은 "우리는 월드컵이 필요 없다" "우리는 병원과 교육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독일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 단치 본핑 코스타 산투스는 "소수는 매우 부자지만 다른 이들은 아무 것도 없다"며 최근 시위를 지지하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브라질 노동당 정부는 터키 정의개발당 정부보다는 유화적인 태도로 대중교통 요금 인상을 철회할 것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역시 다수의 최루탄을 사용하고 기마경찰을 비롯한 폭동진압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공격했다. 터키에서처럼 이 시위를 폭발시킨 것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 때문이다. 특히 취재 중인 언론인에 대한 공격은 경악을 금치 못할 잔인한 행위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확산이 아닌 권위주의적 지배의 강화와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리스, 국영방송 폐쇄? 차라리 우리가 운영할 것

그렇기에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고향인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트로이카[유럽연합 EU, 유럽중앙은행 ECB, 국제통화기금 IMF]로부터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긴축정책 압박을 받고 있던 그리스 정부의 안토니스 사마라스 총리는 11일 밤 그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국영 방송국 ERT의 폐쇄와 노동자 2656명의 해고를 결정했다. 그리스 시민들은 12일 유럽에서 유일하게 국영 방송이 없는 아침을 맞았다. 이 과정에서 신민당의 지도자인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연정을 구성한 다른 정당들과의 사전 논의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과두지배 내에서도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고된 2656명의 노동자는 그 즉시 방송국을 점거하고 노동자들의 통제하에 만들어진 방송을 인터넷 생중계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은 정부의 공격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방어하기 위해 방송국 밖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아니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방송국인 ERT의 한 스튜디오 창문에는 이런 글이 붙어있다.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약속은 애초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는 지 모르겠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공산주의 체제로 불리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이행하며 도입된 민주주의가 동유럽에서 겪은 실패를 살펴보면 이러한 의심은 확신이 된다. 불과 5주 전 총선을 치른 불가리아 정부는 부패한 정치인이자 언론의 실력자인 델리안 피브스키를 국가안보부의 수장으로 임명하면서 시민의 거대한 저항에 휩싸였다. 피브스키는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은 적이 있고, 마피아와도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시민들은 그를 '마피아'라고 비난하며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5월 총선은 2월 전기요금 인상에 반대한 거대한 대중시위의 결과였다. 2003년 이후 민영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전기 공급도 외국계 기업으로 넘어가버렸다. 2012년 7월 전기요금을 13% 인상한 결과 겨울철 난방을 위한 전기요금은 노동자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다. 실업자 모니카 바살레바는 "내가 구하는 일자리는 금료가 200~350달러인데 전기료는 135달러 넘게 내야 한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인들은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가리아 인민의 삶의 질 향상에는 관심이 없음을 부패 정치인 피브스키의 국가안보 수장 임명을 통해 드러냈다. 불가리아 인민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린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가리아에 책임질 정치인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지난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과반에 미치지 못한 옛 여당 유럽발전시민당(GERB)은 정부 구성을 포기했다. 제2당인 불가리아사회당(BSP)이 다른 당과 함께 정부를 구성했지만 이번 국가안보 수장 임명으로 불거진 시위로 교착상태에 빠진 것이다. 특히 피브스키의 임명은 불과 15분여 만에 그 어떤 토론도 없이 의회에서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부패한 정치인과 범죄자들을 대표할 뿐인 의회는 더이상 시민의 의사를 '대의'하는 기구가 아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은 소피아의 거리에서 의회의 해산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불가리아 인민의 저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게오르기 마리노프는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 24년 간의 부패와 무능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무능한 정치인들이 시민의 분열을 바라다

민주주의, 법과 제도의 실패는 말 그대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보스니아에서는 한 아이가 목숨을 잃었다. 3월에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무슬림 가족에게서 태어난 베리나 하미도비크는 긴급한 치료가 필요했다. 보스니아에선 치료가 불가능했다. 치료를 위해서는 세르비아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치료를 위한 국경 통과가 불가능했다. 신생아의 사회보장 번호 등록을 위한 시민권 법이 지난 겨울 그 기한이 만료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민권 법은 여전히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수천 명의 아이들이 등록되지 못한 채 없는 존재 취급 받고 있다. 베리나의 가족은 대중의 관심 덕에 간신히 '특별한' 증명서를 발급받았지만 오랜 내전과 갈등으로 편견에 가득찬 인종차별적 국경관리 공무원의 제지 때문에 결국 시간을 놓쳤다. 베리나의 시간은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사라예보의 거리로 뛰쳐나와 의회를 봉쇄했다. 새 시민권 법이 통과되기까지 하원의원들의 출입을 허용치 않겠다는 기세였다. 결국 총리는 창문을 통해 도망처야만 했다.

보스니아의 주요 세 정당은 1995년 끝난 내전에 그 정체성의 뿌리를 갖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의 종교적·민족적 갈등이 주요 원인인 것처럼 보여진다. 실제로 새 법률이 통과되지 못한 데는 세르비아계가 새로운 시민권에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을 포함하자고 주장하고 있고 다수파인 보스니아계는 종교적·민족적 정체성과 상관 없는 임의의 번호를 부여하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기에는 유럽연합 개발차관과, 세계은행·외국인 투자자의 호혜를 기대하며 인민을 분열시키길 원하는 정치인들의 책략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JMBG 운동은 이러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했다. 결국 보스니아에서도 '의회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공명하는 저항, 광장에 미래가 싹트다

이 모든 사건들이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말이다. 로어매그(ROARMAG.org)의 편집자 제롬 로스는 이를 '공명하는 저항'이라고 부른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저항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로 각각의 저항에서 서로의 투쟁을 지지하고 고무하는 구호와 팻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탁심·사라예보·상파울루다(We are all Taksim, Sarajevo, Sao Paulo)".

시작은 튀니지였다. 2008년 경제위기, 그 이전부터 시작된 투기꾼들의 국제 곡물 투기로 인한 곡물가 상승으로 시작된 경제적 저항은 처음부터 권위주의적 지배에 대한 반란과 결합됐다. 그것은 이제 보다 보편적인 민주주의적 권리에 대한 요구로 성장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지난 10여 년 간의 경제성장의 끝에서 벌어진 현재의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서 민주주의적 원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원칙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것을 최근 폭로하고 있다. 세계 곳곳의 연이은 투쟁들에서 그 상징으로 각각의 광장이 부상되고 있는 것은 그 무엇보다 의미심장하다. 그리스의 신타그마, 이집트의 타흐리르, 터키의 탁심... '광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출발점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