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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 입은 채 늙어가는 한진중 노동자들

[기고] 최강서의 주검을 옆에서 지켜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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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자본의 막가파식 노무정책은 또 다시 한 젊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갔다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 내륙을 강타할 때 35미터 크레인 위의 한 젊은 사내는 엄청난 공포 속에 지내야 했다. 태풍 ’매미‘의 위력은 알고 있겠지만 수백 톤의 크레인을 하룻밤 사이 일곱 번이나 빙글빙글 돌렸지만 그는 견뎌 내었다. 손배가압류와 노조 탄압, 정리해고에 맞서 크레인 농성 중 129일 만에 스스로 산화한 고 김주익 열사...

10년이 흘러 똑같은 내용으로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 최강서 열사는 글을 쓰는 이 시각 한진중공업 공장 내 단결의 광장 차가운 바닥에 18일째 누워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2011년 2월 14일자로 수백여 명의 노동자를 회사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를 통보한다. 해고 통보 다음 날 한진중공업은 174억 원 규모의 주식 배당을 실시한다. 이 중 현금배당 금액이 52억 원 정도며 이 중 절반이 조남호 회장 개인에게 배당되었다. 경영진과 임원들의 연봉은 올랐다. 회사가 어렵다며 앞에서는 노동자를 해고시키고, 뒤에서는 총수와 경영진들이 돈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이런 회사를 짧게는 수 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을 다녔던 사람들이 어떻게 손 놓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햇수로 3년 동안 수주 한 건 하지 않고 오직 필리핀 수빅 조선소로 수주 물량을 돌려 영도 조선소를 축소내지 폐쇄하는 수순을 밟는 단계로 정리해고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민주노총 김진숙 지도위원이 2011년 1월 6일 몇십 년 만에 찾아온 한파를 뚫고 35미터 크레인 위로 올라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외치며 309일간 농성을 펼쳤던 것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최강서는 매일 안부 문자를 보내며 해고된 자신들을 위해 악조건의 환경이지만 함께 싸워주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항상 고마워했었다. 6월27일 행정대집행 이후 회사에서 쫓겨 나와서도 크레인을 향해 매일 백배서원 동지들이 백번의 절을 올릴 때 그들에게서 흘러내린 땀을 닦아주던 마음씨 착한 젊은 노동자였다.

국회의 권고안으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을 접고 내려 왔을 때도 누구보다 그 기쁨이 컸을 최강서였다. 다시 복직하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지내는 동안 회사 앞 천막 농성장을 거의 매일 방문하였고 도와줄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리해고 싸움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었기에 생계가 어려웠지만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1년의 기다림에 복직을 하며 좋아했고 그때의 미소와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선하다. 그러나 주말 휴일이 지나고 회사에서 다시 일할 수 있다는 부푼 설렘은 단 3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기약도 알 수 없는 강제 휴업이 발령 난 것이다. 푸른 작업복과 안전화 하나 받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두 번의 배신은 강서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가 됐으리라.

영도조선소 정상화 촉구, 민주노조 말살 정책, 158억 손배소 철회, 6개월 순환 휴직 약속 이행 촉구, 금속노조 조합원 장기휴업 철회, 민주노조 탄압 중단의 5대 요구를 가지고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해 노동조합 간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강서였다.

2012년 복수노조인 기업별 노조가 만들어진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 농성당시 노조 집행부 핵심간부들로 주축이 되어 회사의 후광을 업고 등장하기 시작한다. 근래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회사의 노무담당 000임원이 복수노조 설립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알려지기도 했다. 최강서는 특히 복수노조 설립 과정의 핵심 인물들에 대해 대단한 배신감과 분노를 표현했었다. 해고되기 전 노동조합 간부 생활을 하면서 합당하지 못한 사안들이나 내용에 대해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남들에게 손가락 질 받을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노조를 배신하고 회사에 빌붙어 노동자의 영혼을 팔아버린 그들을 회사와 마찬가지로 증오했었다.

최강서의 죽음 이후 별다른 대응이 없었던 복수노조가 회사를 대변하는 수준의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고인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 민주노조인 한진중공업 지회와 함께 공동으로 해결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었다. 일고의 가치가 없었다. 2003년 당시 손배가압류와 정리해고 철회 노조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산화했던 김주익, 곽재규 열사들의 추모 기간 중 열사들에 대한 모욕과 민주노조에 대한 비판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한 그들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복수노조에서 최강서를 비롯해 민주노조 간부들에게 폭력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를 했던 그들인데 무슨 낯짝으로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최강서의 죽음이 오늘로 58일째를 맞이한다

최강서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서의 41일 동안 회사와 복수노조는 단 한 차례의 조문도 없었으며 유가족의 동태를 살피기에 급급했고 거기에 유가족에게 최강서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며 최강서의 죽음은 생활고에 의한 죽음이라고 하며 최강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광고를 신문에 싣는 작태를 보였다. 이에 유가족은 굉장히 격분하였으나 그 후로도 회사의 성의 있는 태도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유가족들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회사 앞에 차려진 최강서의 분향소로 주검을 이동하기로 하였다. 합법적 절차에 의해 행진 중이던 집회대오와 합류하였고, 진행과정에서 경찰은 운구에 최루액을 뿌리고 유가족임을 알고도 고인의 아버님을 폭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해 회사 안으로 들어왔건만 회사는 출입문을 미리 준비해 놓은 절단기로 잘랐다는 허위사실과 ‘시신을 볼모로 하는 투쟁이라’는 몰상식한 문구를 쓰면서 유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회사의 아바타 역할을 하는 복수노조 역시 보도자료와 언론의 인터뷰까지 하며 한 몫을 하였다.

이런 과정들을 겪으며, 회사 측에게 수 차례 협상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회사는 최강서의 주검을 탈취하기 위해 회사 내 전장 공장에 용역깡패 30여 명을 숨겼다가 들통이나 망신을 당해야했다. 이런 짓거리를 서슴지 않는 회사인데 어떻게 믿을 것이며, 최강서의 주검을 회사 밖으로 이동하면 협상을 하겠다고 언론에 브리핑까지 하던 회사가 돌연 입장을 바꿔 회사 관리 범위에 벗어나는 지역으로 주검을 옮기면 협상하겠다고 한다. 다시 처음에 있던 장례식장으로 옮겨가라는 주장이었다.

41일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코배기 한번 보이지 않던 회사가 최강서의 주검을 다시 옮겨 간다고 해서 교섭을 하겠는가? 당장의 상황을 만회해보려는 꼼수에 불과한 것이라 판단해 유가족들조차 거부했었다. 이 와중에 경찰의 고위 간부가 회사와 노조 측 협상의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며 중재에 나섰지만 회사 측은 또다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틀어버렸다. 오죽하면 중재에 나섰던 경찰마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화가 났었다고 한다.

최강서 열사 주검을 지키는 사수대 동지들

최강서 주검이 공장안으로 들어오고 5일 정도는 노조사무실에 비상식량으로 있던 컵라면만으로 끼니를 때웠다. 식사 반입이 되지 않아서이다. 식사 반입금지뿐 아니라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막기 위한 드라이아이스 반입마저 금지시켰다. 다급했던 유가족과 조합원들은 경찰에게 드라이아이스만이라도 들여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무게가 30kg 정도 되는 드라이아이스를 정문이 아닌 6미터 높이의 담장을 통해 넘겨받아야 했다. 최강서의 주검이 공장안으로 들어오고 수 일이 지난 뒤 긴급구제요건에 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이루어졌고, 국가인권위가 다녀간 후 비로서 최소한의 음식 반입과 함께 드라이아이스의 조건 없는 반입이 이루어졌다.

현재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씩 관 뚜껑을 열어 드라이아이스를 채워 넣고 있으며, 관을 감싸고 있는 압축 스티로폼 틀 사이에도 드라이아이스를 채우고 있다. 냉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함이지만 날씨가 점점 따뜻해져 가니 걱정이 점점 늘어간다. 한번 채울 때 마다 6박스(180kg) 정도 소비가 된다. 이런 과정들을 지켜보는 최강서의 부인과 누나의 심경은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하고 있다.

드라이아이스만으로 최강서 주검의 훼손을 막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본다. 기온이 올라 갈수록 드라이아이스의 교체 주기도 그만큼 빨라진다. 이에 냉동 탑차 반입을 요구했으나 묵살되었다. 회사와 경찰은 냉동탑차 반입에 대해 최강서의 주검을 냉동 탑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에 인권위나 경찰에게 냉동 탑차 이동이 두려우면 차량 반입 후 바퀴와 핸들, 그리고 키까지 뽑아가라고 했지만 회사와 경찰에게 정중히 거절당했다.

한편 최강서의 죽음 이후 노동조합 출입을 막고 출근하려는 지회 간부마저 출입을 통제시켰다. 현장의 조합원들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들 한다. 생활고로 인해 대부분 복수노조로 넘어간 상태이지만 잠깐씩 만나 현장의 분위기를 물어보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누가 감시하고 있는지 눈치를 볼 정도이다. 현장은 더욱 감시가 심해 20여 명의 한진 지회 조합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서를 올리는 등... 노-노 분리를 철저하게 시행하는 듯하다. 약 400여 명의 현장 직원이 출근하고 있으며 협력업체 직원과 관리직을 포함 약 800여 명 이상이 출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복수노조 위원장이라는 작자는 설 명절 전에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금속노조 30여 명은 시신을 놓고 회사를 무단 점거해 1400여 명의 전체 직원들이 일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주검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는 사이 회사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비롯한 다섯 명을 경찰에 고소해 경찰 검찰 법원의 신속한 결정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국가 중요시설 기물 파손 혐의로 검거하겠다고 한다. 체포 영장이 발부된 그들이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밀려가던 중 회사로 통하는 쪽문 하나가 열려 최강서의 주검을 긴급히 옮길 수밖에 없었건만 경찰은 자신들의 과잉 진압을 무마하려고 시설물 보호 요청에 따른 경찰의 잘못을 면해보려고 불법시위로 몰아가며 지도부에게 덮어씌우려는 그들의 합작품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2003년 김주익 열사가 죽고 나서 85호 크레인을 올려다볼 수 없었다. 그 크레인을 지날 때 마다 가슴 한켠에는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묻어난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 크레인에 다시 올랐을 때 2003년에 대한 트라우마는 극도에 달했다. 희망버스와 함께 달려와 연대해주고 트위터를 통한 소통에 의해 309일만에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한진중공업 지회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또 다시 서울상경투쟁을 시작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박근혜 당선자의 집 앞과 인수위원회 정부 청사 그리고 회사 안팎에서 최강서 열사의 사태해결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있다. 슬퍼도 슬퍼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그들이다. 수십 년 회사를 다니며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동료가 네 명째이다. 상복을 입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검은 머리와 수염이 어느새 희끗희끗해진 늙은 노동자로 변했다. 동생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애처롭기만 하다.

짧게는 수백 일에서 많게는 수천 일을 길바닥에서 철탑에서 굴다리에서 한겨울 차가운 바람과 눈을 맞으며 삼복더위에 땀에 절어가며 그렇게 그렇게 악질 자본들과 싸우고 있다. 한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 노동 현안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에 이 문제를 풀어야한다는 것이 절대 다수의 의견이었다. 국민 대통합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당선된 박근혜는 이번 기회에 노동 현안을 풀고 가지 못한다면 향후 5년 동안의 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금력, 권력, 총과 칼, 방패로 무장한 그들과 벌거벗은 채로 언제 벼랑 끝으로 밀려날까 두려움에 떨며 저항하는 우리들의 현실... 정론직필은 언론의 사명감이다. 이런 언론이 썩는 것은 그 무엇보다 악취가 심하다. 총칼보다 강하다는 펜은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서서 구부러져버린지 오래다. 유신 독재에서도 살아남았고 군사정부에서도 살아남았고 IMF를 극복하며 버텨온 우리의 민중들이다. 힘들다고 해서 죽기보다 살아서 싸워 노동자가 대접받는 세상을 보았으면 한다.

최강서 열사 산화 58일차. 그의 주검을 옆에서 지켜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