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가 쪽 빠진 목소리로 이인근 콜텍 지회장이 답했다. 지난 2월 1일 금요일 아침 8시쯤, 부평 콜트 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콜텍악기 해고자들 4명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경찰과 용역들에게 사지가 들려 버려졌다.
자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깼고, 경찰과 용역이 보였고, “끌어 내” 한 마디에 끌려난 상황. 법원의 ‘대체 집행’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웠다. 하루 종일 소리 지르고, 부딪히고, 분노와 절망으로 힘겨웠을 고단함이 그 물기 없는 한 마디에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해고된 지 6년, 부평 공장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가는 세월 동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이닥치던 경찰과 용역. 이렇게 버려진 게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엔 어떻게 막아볼 틈도 없이 그냥 당해버렸다. 정말 그게 다였다.
[출처: 금속노조] |
“자고 있었어. 웅성거리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나와 봤더니 용역 150명 정도가 느닷없이 들이닥쳐서 ‘집행하러 왔다’ 그 한마디 딱 하더니 ‘끌어내’ 그러고는 우리 4명(콜텍 해고자, 이인근, 임재춘, 장석천, 김경봉) 다 똑같이 대여섯 명한테 번쩍 들려서 나왔어. 별로 얘기할 만한 상황이 없어. 그냥 들려 나와 가지고. 그게 다야, 그냥. 십분도 안 걸렸어. 그게 다야...”
어떤 명목의 집행인지도 몰랐다. 사전에 계고장 같은 것도 없었고, 어디까지 집행하는 건지 집행목록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집행’이 받아들여진 걸로 짐작할 뿐이었다. 이들의 짐작은 맞았다. 2012년 콜트의 박영호 사장한테 이 공장을 사들인 강모 씨는 지난해에도 용역을 동원해 노동자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천막과 식당을 철거해달라고 ‘대체집행’을 신청했고 인천지방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콜트공장의 건물은 석면노출 위험 때문에 안전 진단 전에는 함부로 철거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신 노동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 밖의 천막과 간이식당 공간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고, 법원은 이 날 용역을 동원해 사장 대신 노동자들을 ‘치워준’ 것이다. 부당한 해고에 대해 그 정당성을 가려달라고 신청한 재판은 수년 동안 끌면서 피를 말리더니, 노동자들을 쫓아내는 집행은 이토록 신속하고 정확하다.
빼앗긴 노동자들의 ‘집’
이번 ‘집행’으로 집을 뺏긴 건 해고자들 뿐만이 아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해고투쟁은 노동운동 안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인들과 끈끈한 연대를 자랑해왔다. 기타라는 특별한 물건을 생산하는 이들의 노동이, 예술노동자들에게 남다르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뮤지션들은 자기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기타가 이토록 고통스러운 노동자들의 삶을 품고 있는 줄 몰랐다. 이들은 악기의 소비자가 아니라 기타라는 악기를 통해 삶을 살고 꿈을 꾸는 인간으로서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연대는 노동자들이 폐허가 된 빈 공장에 천막을 치고 ‘공장살이’를 시작하면서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뮤지션들 뿐 아니라, 조각가, 화가, 설치 미술가, 판화가, 목수, 바느질 전문가, 비누전문가 등 모든 예술 노동자들이 모여 이 공장을 새롭게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 날엔 가보면 커다란 기타가 뚝딱 만들어져 있고, 어느 날엔 공장 벽이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덮였다. 천막과 콘크리트 뿐이던 공장, 고철과 쓰레기가 뒹굴던 마당은 신기하게도 그 모습을 버리지 않으면서 변해갔다. 모두가 달라붙어 그림을 그렸고, 바느질을 했고, 비누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낮에는 콜밴의 연습실도 되었다가, 수요문화제가 열리는 밤이면 멋진 공연장이 되었고, 포차를 여는 날에는 밤새 술손님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해고자들에게 그저 농성의 거점이었던 공장은 여럿이 함께 삶을 꾸리면서 점점 집이 되어 갔고, 노동자들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해고되기 이전의 삶을 가져다 준 곳, 그래서 이들은 이곳을 ‘콜트콜텍 노동자의 집’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해고자들과 문화노동자들 모두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날 밤만 해도 웃으며 인사하고 나온 내 집에서 노동자들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파견미술가 전진경 씨는 이 광경에 망연자실했다.
“나는 순진하게 경찰이랑 용역들이 저녁이면 나가고 우리가 다시 공장에 들어갈 줄 알았어요. 왜 안 나가지? 정말 우린 쫓겨난 건가? 그때부터 그런 느낌이 드니까 답답해요. 나는 내 작업실 되게 좋아했거든요. 가끔은 여기가 농성장이란 느낌이 없어요. 내 집에 왔구나, 내가 제일 편안한 공간에 왔구나, 이런 느낌이 들면 이 공간이 너무 좋아서 밤에 혼자 춤도 추고 그래요. 해고자 아저씨들 놀러오면 어떨 땐 귀찮고, 어떨 땐 되게 재밌고, 그냥 사람이 재밌게 사는 방식으로 여기서 살았어요. 불을 딱 끄면 어느 자리에 뭐가 있고, 내가 그 공간을 어떻게 쓰고, 내일 아침에 난로의 연탄을 갈아야 하고 이런 게 다 있는 곳인데, 이 밖에서 경찰들 너머로 보고 있으려니까 너무 답답해요. 어젯밤만 해도 ‘낼 봐요’ 그러고 왔는데...”
그녀는 토요일 저녁 집회 때 담을 넘어 기어이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곳곳에 만들어 놓은 작품들이 밤새 어떻게 됐는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봐도 용역들이 부순 식당 자리와 곳곳에 불을 피우느라 부수고 태운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집 안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작가들이 여러 날을 만들고 전시까지 했던 모든 작품들이 쓰레기 더미가 됐다.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작품도 있다. 스쾃이라는 점거 예술행동으로 연대하면서 '부평구 갈산동 421-1' 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까지 열었던 생기 넘치던 공간이었다. 용역과 경찰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 곳에 의미 없이 나뒹구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쓰다 버려진 노동자들에게 다시 삶의 의미를 찾아주기 위해 시작한 싸움이기에, 공장 안의 모든 것은 하다못해 쓰레기 하나까지 모두 쓸모 있는 귀한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치우고 버려야 할 것들이 우리에겐 보듬고 함께 살아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자본가와 우리가 다른 점이다. 전진경 씨는 다시 힘주어 말한다.
“동료 작가들이랑 이 문제가 자기 문제인 사람들이 모여서 얘길 했어요. 재탈환을 목표로 여기서 농성을 같이 하자 그랬어요. 우리에겐 재탈환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저는 제 인생에서 너무 행복하고 중요한 일들이 저기에서 있었고 어제까지 그게 이어졌기 때문에 확고해요. 다시 그 시간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저 뿐 아니라 농성하는 아저씨들도 당연하고, 이곳에 자기의 어떤 부분을 묶어놓고 산 사람들은 저기가 그냥 버려진 공장이 아니거든요. 버려진 공장, 폐쇄된 공장, 누가 사 간 공장 그런 데가 아니에요. 이렇게 간단하게 경찰이 와서 막고 용역들이 진을 친다고 해서 쉽게 끝날 수 있는 무게가 아닌 거예요.”
[출처: 뉴스셀] |
삶은 분리될 수 없다
금요일 아침 공장에서 쫓겨난 후 계속 싸움이 이어졌다. 몸싸움을 벌이다 방종운 콜트 지회장은 머리가 찢어졌고, 이인근 콜텍 지회장은 갈비뼈가 부러졌다. 이인근 지회장은 “썪어 빠진 놈의 법 때문에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고지한 적도 없고, 계고장도 한 번 없이 어떤 집행을 한다는 설명도 안한 채 사람을 짐짝 내버리듯이 들어다 버리는 집행이 과연 법이냐고, 그게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집행인 거냐고 묻는다. 부당해고 판결이 나도 다시 해고해 버리면 그만인 그런 법이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지, 자본가의 재산권을 노동자의 생존권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노동자들에게만 언제나 가혹하다.
공장 문 앞에 치려던 천막은 경찰한테 부서졌고, 결국 길 건너편에 천막 두 동을 임시로 쳤다. 옷가지 하나도 못 챙기고 쫓겨난 터라 아무 것도 없었다. 경찰은 공장의 앞문과 뒷문, 담벼락까지 모두 막아섰다. 노동자들은 철조망에 달라붙어 ‘내 집을 돌려내라’고 외치다 뜯겨 나갔다. 일부는 담을 넘어 공장에 들어갔다. 토요일 오후, 몸싸움 끝에 들어간 공장 안은 겨우 하루 만인데 어제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용역들이 부수고 태운 흔적들을 둘러보는 해고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들의 작품이 망가지고 훼손된 걸 확인하는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집행이 결정난 곳은 천막과 식당 자리인데 용역은 점령군처럼 공장의 모든 곳을 부쉈다. “이럴려고 우릴 그렇게 쫓아냈냐”는 항의와 탄식이 이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해고자들과 몇 년 동안 함께 싸우고 있는 인권활동가 랑희 씨에게도 이곳은 또 다른 집이었다. 실제 사는 집보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그녀는 이곳에서 보냈다.
“나는 인권활동가이기 이전에 입주자의 한 사람이에요. 페인트도 칠하고, 커피메이커도 가지고 와서 끓여 마시던 집인데 분통이 터져 죽겠어요. 우리는 그동안 계속 말해왔어요. 이 공장은 과연 누구의 것이냐고. 이 공장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삼사십년 동안 이 곳에서 일해 온 노동자들 때문이기도 하고, 기타를 구매해 준 사람들, 그 기타를 통해서 음악을 하면서 기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노동을 통해 삶을 일구고 미래를 꿈꿔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공장은 사장 거니까, 혹은 새 소유주 강모의 것이니까 나가라고 하는 것이 정말 상식일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 공장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모형이지만 기타도 만들고, 비누도 만들면서 함께 해왔어요. 그래서 ‘콜트콜텍 노동자의 집’이라고 불렀던 거고. 그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한 공간을 한 순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박탈당한 게 제일 마음이 아파요. 과연 법적 소유자만이 공장의 주인일까? 이 문제는 콜트뿐만 아니라 모든 공장에 대해 던지는 물음이에요. 과연 공장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공장은 누구의 것인가, 그런 질문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졌으면 해요.”
이들이 여기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관계를 분리하지 못한다.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울며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삶의 일부이자 전부인 곳. 이들에게 공장은 단순히 돈을 벌러 나가는 건물이 아니다. 박영호 사장은 그걸 모른다. 관계라는 것의 의미를. 저들에게 공장은 값이 매겨지고, 사고파는 게 가능한 재산목록일 뿐이지만 노동자들에게 공장은 노동하는 집이다. 집은 곧 삶이고, 삶은 노동과 분리될 수 없다. 삶에는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공장을 팔아서 구획을 긋고, 그걸 나누어 이만큼은 창고로, 이만큼은 충전소로 써서 거기에서 얼마의 이윤을 남기고 하는 그런 계산법이 작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계산법으로 사는 이들은 일터이자 삶터였던 곳에 경찰과 용역경비들이 진을 치고, 물건을 부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물건을 불태우는 장면을 철망 너머로 바라봐야 하는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어젯밤까지 이불을 덮고 누웠던 그 자리가 사라져 버린 황망함도 알 리가 없다. 그들의 계산법엔 노동자들마저 사람이 아닌 기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부수고 쫓아낸다.
공장은 누구의 것인가
나는 박영호 사장에게 묻고 싶다.
100억 넘는 이윤을 벌어다 준 노동자들에게 적당한 임금, 안전한 일터, 가족과 오순도순 평범한 삶을 허락하는 거, 그들의 노동으로 쌓은 그 이윤 중 백분의 일도 안 들어가는 그 돈을 쓰는 게 당신에게 그토록 용납할 수 없는 일인가?
오로지 다시 기타를 만들기 위해, 비누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기타 만드는 흉내라도 내지 않으면 못 살 거 같은 이들에게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연민 한 자락도 보여 줄 수 없는가?
당신 눈엔 저들이 버러지 같은가? 그래서 그렇게 함부로 버리고 짓밟는가? 당신처럼 똑같이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고, 함께 살아야 할 가족들이 있는데, 먹고, 자고, 싸고, 웃고, 우는 저들이, 사람 같지 않은가?
당신이 고용한 용역들에게 쫓겨나 주문 받아 놓은 비누세트 백 개를 어떻게 해야 하나 발을 구르고, 비누 팔아서 어렵게 장만한 135만 원짜리 앰프가 혹시 부서졌을까 애태우는 가난한 저들이 우스운가?
이 상황에서도 한진과, 기아에 가보지 못해 미안해하는 저들은 당신이 평생을 탐욕으로 일군 그 돈 덩어리보다 귀한 사람들이다. 남을 위해 한 번이라도 울어본 적 없을 당신은 알 리 없겠지만.
공장을 점거한 용역들은 공장 담을 펜스로 두르려 한다. 노동자들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토요일 오후에 들어간 해고자들 일부와 문화노동자들, 연대하는 활동가들은 더 이상 집을 부수지 못하도록 나오지 않고 버티며 싸우고 있다. 일요일 저녁에 열린 촛불문화제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이들과 이산가족이 되어 진행했다. 공장 안의 사람들은 철조망에 죽 달라붙어 촛불을 들었다. 눈이 왔다.
2월의 첫날부터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빼앗긴 노동자들의 집을 찾기 위한 싸움, 삶과 노동을 이어가기 위한 싸움이다. 이길 자신은 없지만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그들과 우리는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순다. 우리는 허문다. 그들은 가진다. 우리는 나눈다. 그들은 닫는다. 우리는 연다. 그들은 죽이지만, 우리는 살아간다. 다시 공장을 열고 기타를 만들 때까지 우리는 계속 싸우면서 살아갈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