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동료교사인 한석희(전 전교조서울지부 강서공립중등지회장) 선생과 여러 차례 논의한 후, 정확하지는 않은데, 내가 숙직하는 11월 어느 날 저녁 교사 13인이 모여 밤새도록 대자보를 써서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이 읽게 하였다. 정화여상 비리투쟁의 시작이다. 겉으로는 고질적인 사학비리를 문제 삼았지만, 내심으로는 민주 교육과 인간화 교육을 실천한 것이다. 지금 그 얘기를 회상하자는 게 아니다. 그때 만난 김소연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화투쟁은 1987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말까지 이어졌는데, 한겨울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고 먹으면서 투쟁을 하였다. 우리는 글자 그대로 학교를 ‘접수’했다. 교장을 지지하는 대다수 선생들은 학교 근방 모처에 모여 일을 봤다. 그 몇 달 간 학교는 요즘 식으로 하면 거의 꼬뮨에 가까웠다. 몇몇 서생님들이 방송으로 수업을 이끌고, 밥도 같이 해먹고, 저녁에는 노래와 춤, 토론도 했다. 한겨울 냉기뿐인 교실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그렇게 견딘다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다.
투쟁이 하루하루 길어지면서, 여러 가지 회유와 협박이 몰려오자, 기존의 학생회 조직은 급격히 무너져 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이른바 ‘자생권력’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우선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철저히 무장한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화여상정상화추진위원회”가 그것으로, 그 중심에 김소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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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도그룹의 투쟁방식은 철저히 비타협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만 들어 본다. 첫째는 광화문 서울시교육위원회 앞에서 농성을 한 후 수백 명이 청량리에 있는 학교까지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행진하였다는 것이다. 서슬 퍼런 전두환이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날 밤 그 행진이야말로 4.19 이후 최고의 행진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김소연은 그 행렬의 맨 앞에 서서 목청껏 “민주교육쟁취”를 외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가냘파 보이는 몸은 오히려 강철같이 단단해 보였고, 그 눈빛은 ‘형형(炯炯)함’ 그 자체였다. 그날부터 나는 그녀의 선생이 아니라, 민주화와 인간화 교육을 실천하는 동지가 되었다.
둘째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대학생은 물론 교사들, 학부모, 졸업생 등 여러 그룹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을 확산시켰는데, 역시 그 중심에는 김소연이 있었다. 김소연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정화투쟁은 고립되어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연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오면서, 마음이 뜨거워진다.
셋째는, 대단히 여러 가지 투쟁방식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유인물과 펼침막을 직접 만들어 배포하고 걸었을 뿐 아니라, 우리 운동을 비방하거나 곡해하는 언론기관에 집단적으로 항의 전화를 걸어, 결국 기사를 바로잡는 쾌거도 올렸다. 학부모회의를 열자, 장학사가 학부모로 가장해 참석했는데, 그를 적발해내기도 했다. 이 모든 기획과 실천은 김소연이 아니고서는 생각해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농성이 장기화되자 여기저기에서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주도한 교사 중 이석천 선생과 학부모 한 분이 구속되고, 나와 한석희 선생이 수배 상태에 들어가자, 동조자들도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고, 학교는 다시 교장과 비서명교사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소연 그룹은 학교 건물 지하에 자리를 잡고 끝까지 싸워나갔다. 교사들의 회유와 협박, 그리고 떨어져나간 동료들의 외면은 십대 후반의 어린 여학생들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나 김소연 그룹은 흔들리지 않고 싸웠다. 이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후에 김소연이 갑을과 기륭에서 그 어려운 싸움을 힘차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저력은 이미 그때부터 쌓이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졸업 후 김소연은 1997년 갑을전자 노조위원장에 취임한다. 27살의 약관이었다. 2005년 에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한 뒤 회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김소연의 삶은 투쟁하는 노동자, 바로 그것이었다. 분회장이 된 후, 우리 노동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농성을 주도한다.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한 1,895일의대투쟁이었다. 정화투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유흥희와 함께 2006년 30일, 2008년 94일 단식을 감행한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드디어 2011년 기륭전자 측과 정규직화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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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소연이 기륭전자 정문 옆 경비실 위 콘크리트 바닥에 천막을 치고 단식투쟁을 할 때 몇 차례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때 깡말랐지만 결기 넘치던 그녀의 얼굴과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기륭투쟁의 백미가 그 연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날, 김소연과 유흥희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다. 대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번갈아 가며 지켜주고 응원을 보냈다. 이전 정화투쟁에서의 연대가 더욱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김소연의 인간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륭투쟁을 승리로 이끈 김소연의 활동은 2011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있었던 한진중공업 파업 사태 당시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활동하였고, 2012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 집행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마침내 2012년 11월 11일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노동자 대통령 선거투쟁본부에 의해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다.
이제 김소연은 자신의 삶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깃발을 내건 것이다. 나는 그의 출발이 우리 역사, 좀 더 좁혀서는 진보진영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한 획을 긋는 것이라 믿는다. 여러 노선과 정파의 갈등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이 끝난 후 진보는 이른바 ‘노동중심’을 확고히 정립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그때 김소연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일화와 이른바 문-박 양강 대결의 와중에서 노동자대통령후보 김소연은 그 존재가 미미해 보이지만, 이 겨울의 한 복판에서 그의 강인한 정신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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