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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문재인이 우리 삶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기고] 당신의 대선, 다른 대선을 상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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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전 세계경제에 드리워진 어둠이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공황이 촉발된 이후 현재까지 이렇다 할 처방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 유럽의 재정위기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면서 미봉책마저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이다. 유럽발 경제위기는 내년의 경제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각국의 예상 GDP 성장률이 하향 조정되면서 실업의 공포가 몰려오고 있다.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세계 경제의 침체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이다.


대선, 세계경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가?

세계경제가 점점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가운데 보수양당의 대표주자 박근혜, 문재인 후보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으로 유권자 즉, 노동자민중의 선택을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당선되면 한국은 세계경제 위기와 다른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처럼 이야기한다. 특히 여야 가릴 것 없이 보수양당의 대표주자 박근혜, 문재인 후보는 세계경제위기라는 경제사회문화적 절대적 상수에는 이렇다 할 구체적인 전망과 대안없이 시혜적인 복지의 확대와 경제민주화 논쟁에 대한 주도권 잡기에 바쁘다. 그러면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부르짖고 있다. 정치를 통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부르주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명징하게도 보수정당의 부르주아정치세력의 공감대는 부르주아의 공감대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보수정당의 부르주아정치세력은 경제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보수정당의 경제위기 해법과 국가의 개입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이명박 정권의 실정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내세웠던 747공약에서의 성장이 사실은 자본의 성장을 의미하지만, 그조차도 전 세계경제위기로 반 토막이 났다. 신자유주의 경제위기는 더욱더 심화되었고 양극화로 인한 노동자민중의 고통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경제위기가 지속되면 세수 감소로 인한 재정적자 문제가 심화되고, 실업자와 빈곤층의 증가가 확대되는 시기에 복지를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을 통해 경제위기를 벗어나고 장밋빛 미래청사진을 정말 그릴 수 있을까? 전국 6곳이 넘는 철탑 등에서 겨울 엄동설한의 칼바람을 온몸으로 버텨 가며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절한 바람이 이번 대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경제위기, 부르주아 보수정당들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신자유주의 경제위기는 현재 마주하고 있는 세계공황의 구체적 표현형태일 뿐이다. 이것은 1972년의 세계공황이 케인즈주의 경제위기의 형태를 취한 것과 같다. 공황의 원인은 자본주의 자체이지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아니다."(붉은 헤게모니 “공황과 계급정치”) 그래서 박근혜, 문재인이 이야기하는 복지와 경제민주화 논쟁은 허구이자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모델과 경제민주화는 공황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부르주아정치세력에 의한 선거는 현실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경제위기에서 부르주아정치세력의 해법은 불가능하다. 악순환만 계속될 따름이다. 그래서 2012년 대선을 앞둔 자본주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의 위기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이고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위기이다.

대선, 우리의 삶을 구원해주지 않는다. 다만 왜곡시킬 뿐이다!

"관건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느냐에 있다. 그러나 대다수 노동자민중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혁을 바라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더 걱정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인 의식구조의 바탕에는 상식의 수준으로 일반화된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경제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고 그 과정에서 가중될 고통을 노동자민중이 전담할 수밖에 없는 조건임에도 300년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 질서 자체는 마치 자연법칙과도 같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삶의 방식 자체가 자본주의적 거래관계로 유지되고, 일상적으로 자본과 국가의 이데올로기 장치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 공고한 선입견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붉은 헤게모니 “세계공황과 신경증에 갇힌 정치를 넘어”) 그래서 여전히 노동자민중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스스로 위안 삼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신자유주의 경제위기에 의한 지옥, 그 자체다.

그래서 세계경제 위기에 맞선 전 세계 노동자민중은 선거 혹은 투표를 넘어 직접 행동과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자스민 혁명, 그리스의 총파업 투쟁, 또 오바마 정권에 대해 실망한 미국 노동자민중은 위스콘신 투쟁을 비롯해서 항만점거 투쟁, ‘1%에 맞서는 99%의 투쟁’이라는 월가 점령 시위에 이르기까지 세계 민중의 저항도 끊이질 않고 있다.

한국도 같은 맥락의 대중적 불만이 축적되어 오면서 反MB, 反새누리당 정서가 확산되었고 한미FTA 반대투쟁을 중심으로 한 대중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대중적인 저항과 욕구분출이 지향하는 바가 불분명하고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완전히 고장 났음에도, 현재의 고통이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여전히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의 밀고 당기기식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대선,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정치화시키자!

노동자민중의 삶은 냉엄한 현실이다. 또한 노동자민중의 삶의 분노와 요구도 대선을 통해서 대변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투쟁만큼 법과 제도로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대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선 이후 노동자민중의 삶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과 전략이 더욱 중요하다. 노동자민중의 삶을 드러낼 수 있는 세력과 자신감이 절실하다. 그리고 자명하게도, 보수정당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누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경제위기로 인하여 대중의 어쩔 수 없는 부르주아정치에 대한 기대와 압력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처지에 놓여있다.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정치세력, 선거주의에 대한 대중의 격렬한 실망과 분노와 배척은 시간문제이다.

그래서 능동적인 정치적 대안과 신뢰를 주는 정치세력과 정치행동이 없으면 대중의 정치는 격렬한 무정부적인 거리정치를 거친 후 가라앉아 정치적 냉소와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투쟁과 삶을 우위에 둔 대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확하게 대선의 한계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대선을 이야기하고, 또 반드시 누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민중이 바라보는 대선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를 넘어서는 상상을 하자. 이른바 선거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정치세력화. 그 反자본주의, 대안사회의 도정에서 선거와 대중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곳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치적 개입을 해야 한다. 그래서 대선을 뛰어넘는 노동자민중의 경제사회문화적 요구를 대담하게 정치화하자.


* 윗 글의 여러 문장을 사회주의 유기적 지식인이 발행하는 신문 '붉은헤게모니'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