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 부정선거 직전까지 일본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직수입해 농어촌 가정에 무상으로 배포, 전기가 없는 농어촌에서도 소량의 건전지로 라디오를 듣게 했다. 이승만의 치적, 정부 정책 선전이 주목적이었고 미 공보국의 냉전 심리전과도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
당시 공보처의 일개 ‘국(局)’에 해당하던 국영 KBS의 직원들은 정식 공무원이었고, 보도는 항상 공보처 지침을 따랐다. 방송 기자들도 공무원으로 정부시책을 홍보하는 걸 뉴스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진보적 학자들은 방송의 국가소유가 KBS의 왜곡, 편향을 불러오고 방송 발전을 막는 주원인이라며 방송 민영화를 주장했다.
국영 KBS 라디오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시기였다. 부산MBC는 1960년 봄 마산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아나운서와 기자가 현장에 나가 직접 라디오로 생중계했다. 비록 라디오라도 경찰의 총격이 가해지는 거리의 생생한 소리는 그대로 청취자에게 전해졌다. 촛불 정국 때 인터넷 생중계의 원조가 부산MBC의 4.19 혁명 생중계다.
반면 KBS는 대통령 하야 전까지 4.19 시위를 단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 프랑스 1TV가 1968년 혁명에 눈 감은 것과 똑같았다. 참다못한 동아일보는 1960년 4월 28일 자 ‘거구(口)기는 그만’이란 칼럼으로 KBS의 왜곡보도를 질타했다.
엊그제 정수장학회 입장발표를 하면서 박근혜 후보가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는 당시 라디오만, 그것도 부산지역에 한정된 작은 방송사인 부산MBC와 부채덩어리의 부산일보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부산MBC는 1959년 4월 15일 서울MBC보다 앞서 한국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으로 개국했다. 초기 경영은 순탄치 않아 김상용 사장은 <부산일보>와 조선견직(주)를 가진 김지태에게 넘겼다.
1959년 한국의 양대 방송사는 기독교방송과 부산MBC 경합했다. 국영 방송 KBS는 언론으로 치지도 않았다. 박근혜 후보는 지역의 한 작은 방송사라고 폄하했지만 김지태는 1961년 2월 21일 서울MBC 개국을 준비해 정부로부터 허가도 받았다. 물론 박정희 쿠데타로 물거품이 됐지만.
부산MBC는 이승만 하야 3일 전인 1960년 4월 23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린 시위 희생자 합동위령제에서 용기 있게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자 경남지역 계엄사무소장인 박정희 장군의 조사를 보도했다.
이승만 독재의 엄혹한 탄압에도 부산MBC 방송노동자들은 마산의거를 용기 있게 보도했다. 사장 김지태의 든든한 뒷받침도 한몫했다. 부산MBC의 활약은 국영방송인 서울의 방송인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방송이 권력의 앵무새 노릇만 한 데 대한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승만 하야성명 이후 서울의 방송노동자들은 자성과 함께 방송 중립을 선언했다.
박정희 정권하에 1961년 12월 KBS-TV 개국에 이어 동양방송, (서울)MBC가 허가를 받아 60년대 3사 각축전이 벌어졌다. 갖은 고생 끝에 개국하자마자 박정희 정권은 MBC 사주 김지태를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경영권을 ‘5.16 장학회’로 바꾸는 황당한 일을 벌였다. 이에 실망한 방송인들이 라디오서울과 동양방송 등 민간방송으로 빠져나갔다. 김지태 사장은 1962년 7월 소유한 주식을 모두 5.16 장학회에 헌납하고 경영에서 손을 뗐다.
김지태는 합리적인 언론 사주였다. 비록 두산 재벌의 소유였지만 합동통신이 리영희, 조세형, 오소백 같은 유능한 언론 노동자를 길러낸 것처럼 김지태는 언론노동자에게 든든한 배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진보적 개혁가는 아니었다. 김지태는 전형적인 기업가였다. 1927년 일본 제국주의 침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동척) 부산지점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동척 부산지점장의 배려로 울산의 땅 2만평을 불하받아 자본가로 변신했다. 1949년 일제시대 때 적산(敵産) 기업 아사히견직을 불하받아 조선견직을 세웠고, 1952년엔 삼화고무를 세워 여성 노동자들의 장시간 초과노동으로 이윤을 창출했다.
자본을 모은 김지태는 1950년 5.30 제2대 총선에 부산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혁신계 임갑수를 근소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3대 국회엔 자유당으로 출마해 역시 당선됐다.
5.16 쿠데타 직후 삼성 이병철, 화신 박흥식, 조선견직 김지태 등 13명의 부정 축재자가 자기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1961년 8월 16일 급조해 전국경제인협회(전경련의 전신)를 만들었다.('한국사회의 노동통제', 1987, p111~113) 김지태는 부정축재자 처벌을 대신해 태어난 대기업가들의 자위단체에 몸을 실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수장학회 논란이 기업가 김지태의 ‘부정축재자 공방’으로 진화하고 있다. 부산일보와 부산MBC의 보도는 언론사주 김지태가 만든 게 아니라, 최루탄과 총알이 나르는 거리를 누볐던 언론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그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