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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과 대중의 분열, 평범하게 접근해야

[기고] 비정규직 노동자 참정권 운동과 비정규직 1천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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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티스트운동 이후의 차티스트운동

세계 최초의 전국적인 노동계급운동은 영국의 차티스트운동(1838년)이다. 급진주의자 윌리엄 러벳이 기초한 법안인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이름을 땄으며 주요 요구는 △남성의 보통선거권 △균등한 선거구 설정 △비밀투표 △매년 선거 △의원의 보수지급 △의원 출마자의 재산자격제한 폐지 등 6개 항이다. 서명운동 방식이 주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무장봉기까지 동반한 이 운동은 당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영향으로 보통선거권이라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았으며, 주요 6개 조항 중 ‘매년 선거’를 제외한 모든 요구는 결국 실현됐다.

그로부터 174년이나 지난 지금, 불행하게도 2012년 한국에서는 또 하나의 차티스트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최소한 6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업체 노동자들이 일하느라 투표조차 못하는 현실에 주목한 민주노총은 대선 99일 전인 지난 9월 11일 노동자 참정권 보장운동을 제안하며 각계각층이 사회연대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투표권 보장 공동행동>이 결성되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동행동은 “나도 투표하고 싶다. 누구를 선택하든 투표권은 보장돼야 한다”며 노동자들의 투표권 보장을 요구하고, 그 방안으로 △선거일 유급휴일 지정과 △투표시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투표시간 연장을 쟁점으로 확산됐고, 보통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대중적 관심과 지지가 적지 않다.

노동자 투표권 보장운동과 비정규직 1천만 선언

그러데 정작 당사자인 노동운동의 반응은 오히려 대중의 호응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차별받고 불안한 비정규직이 정치기본권에서마저도 차별받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 가장 간명하게 비정규직에 대한 ‘가중차별’을 보여주는 사안임에도 참정권운동은 비정규직 1천만 선언운동과 결합하지 못했다. 매일 같은 시간 대한문과 종로 영풍문고 앞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를 토로하는 촛불이 제 각각 밝혀졌다. 물론, ‘비정규직 철폐’라는 요구에 비해 ‘투표권 보장’은 해법의 직접성이 한참 떨어진다. 또한 저소득 노동계층의 투표는 보수를 지지한다는 분석도 있고, 투표시간만 연장되면 그나마 근무시간을 이용하거나 휴일을 통해 투표기회를 보장받던 노동자들도 퇴근 후에 투표하라는 사용자들의 압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운동의 요구가 근본적이든 아니든 성패의 관건은 대중의 공감과 지지다. 따라서 참정권 문제는 운동의 대중적 공감대를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비정규직 등 노동의제를 확장하여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유력한 계기라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다. 또한 저소득층의 보수지향 투표 때문에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투표시간 연장으로 기존의 법적 권리와 노사합의 및 관행을 어겨가며 사용자들이 일을 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사용자들이 상당한 사회적 비난과 불법, 실제 반발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과 투표시간 연장은 반드시 유급휴일 지정과 함께 추진돼야 한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바는 아니다. 설령 그러한 사례가 일부 발생한다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와 대선의 중대성에 비추어 유급휴일 지정의 필요성을 재차 요구할 논란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계급성은 곧 대중성이다

일부에서는 또 투표권 보장만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참여와 정치의식이 향상될 수 없다며,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지할만한 변혁적인 노동자 후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물론 노동자 후보의 존재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노동자 후보라고 모든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것은 아니며, 노동자 후보가 기록한 최고의 대선 득표율은 2007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3%였다. 근본적 계급이해에 아무리 충실한 운동이라 하더라도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사회운동으로서의 의미는 없다. 민주노총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대중성의 결여에 있다. 가장 광범위한 대중단체이면서도 대중사업의 내용과 방식을 구축하지 못함에 따라 일반 조합원과 결속력을 높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혁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대중성에 대한 고민도 얕다. 운동의 내용은 보다 대중적으로 다듬어져 계승돼야 하지만 여전히 고답적이고, 운동의 형식 또한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지루한 결의만 반복한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27일 10만 촛불의 꿈은 많은 가을비와 관심부족으로 2천여 명의 집회로 끝났다. 노동자 참정권 보장운동도 점차 야권의 정치공세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모양새다. 운동의 핵심은 초라하고 운동을 확장해야 할 영역은 늘 남이 차지한다. 노동자 운동에 대중이 없다.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도 자본의 막강함은 버겁다. 런던올림픽 개막식은 대중의 힘과 역사를 보여줬다. 왕실을 조롱한 노래를 불렸던 섹스 피스톨스와 무장폭동을 선동했던 클래시의 노래가 정부행사에서 울려 퍼진다. 개막식을 연출한 영화감독 대니 보일은 상업영화로 유명하지만 산업혁명 때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보여 주며, 그 과정에서 이룩한 여성참정권과 최초의 국민건강의료제도(NHS)를 개회식 공연에 담아냈다. 주경기장에서 올림픽 성화를 맞이한 것도 바로 경기장을 건설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영국과 대니 보일 감독은 올림픽 개회식을 통해 대중문화와 함께 진보에 대해 말했고, 그 바탕엔 ‘노동’이 깊이 스며있다. 최초의 노동계급운동이 태동했던 영국, 그 영국은 노동계급의 나라로도 불리지만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 종주국으로도 칭해진다.

이에 비해 노동계급의 역사가 짧은 한국 노동운동의 대중 속에 스며들지 못한 채 더욱 약화됐다. 대중들은 노동이란 단어 자체가 불편하고,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선 아예 고민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노조 조직율은 10% 안팎이고, 이를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노동운동은 대중보다 멀찌감치 앞서가기에 급급하다. 노동운동에 노동자들이 없다. 그 노동자란 급진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탄압엔 언제나 투쟁으로 맞서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누구나 그러하듯 평범한 대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평범함을 수용해 보다 대중적인 운동형식을 찾아내고, 작더라도 보다 널리 일상의 변화를 위한 대해 노력해야 한다. 보다 평범하고도 광범위한 의제가 필요하다. 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과 운동권 투쟁의 영역을 넘어 대중의 일상에 대한 자본의 포섭과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노동계급 운동이 다시 세워야 할 중심 노선은 바로 대중노선이다. 대중노선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어떤 변혁운동도 노동계급 운동이 아니다. 계급은 바로 대중이기 때문이다. 대중적 관심사지만 핵심이 없는 투표권 운동과 1천만 비정규직을 위한 투쟁이지만, 한 번의 운동권 집회로 끝난 비정규대회를 보며 정작 중요한 우리 운동의 분열은 이 당 저 당의 분열이 아니라, 운동과 대중의 분열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