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이렇게 오만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건 민주노총과 진보정당 안에 자기의 뜻에 충실하게 앞장서주는 ‘조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으로 협박하면 언제든 한편이 되어줄 ‘유사 진보’들. 나는 ‘묻지마’ 연대에 앞장서고, 노동자를 죽였건 어쨌건 한나라당만 아니면 된다고 또다시 혹세무민하는 우리 안의 ‘박쥐’들이 있는 한, 이들의 오만함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노동운동 안의 박쥐들과 참 많이 싸워야 했다. 이들은 끝없이 정부를 사랑했고 투쟁을 방해했다. 노동자로서 사랑할 만한 정권이었다면 문제되지 않았겠지만, 지난 10년 민주정부는 노동자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력을 이용해 노동자 투쟁을 막았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우리가 뽑았으니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 그래도 다른 정권보다 낫다, 우리와 말이 통한다, 어차피 못 막을 일이라면 그래도 이 정권이 낫다’였다. 그들이 끊임없이 내부에서 흔들기를 하는 바람에 민주노총은 싸움의 근육을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났다.
유사 진보와 ‘묻지마’ 연대
“우리를 공격하고 김대중 정권을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정권의 품으로 날아갔다. 언론연맹 위원장은 몇 달 후 자신의 사업장인 KBS 부사장으로, 민주노총의 부위원장과 사무총장을 했던 사람은 민주당의 국회의원으로, 민주금융연맹 위원장은 산재의료원 감사와 이사장으로, 화학연맹 위원장은 노동부 4급 서기관으로 화려한 변신들을 한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던 민주노총 직무대리는 건설협회 감사로. 이들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들은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총보다 정권을 더 사랑했던, 아니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해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팔아 자신의 안락을 채운 이들의 변신은 그래서 무죄가 아닌 유죄다. 문제는 지금도 노동운동 안에는 이런 변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길은 복잡하지 않다>에서 발췌)
이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의 조직 권력이 중앙 집중의 간선제에, 산별연맹 중심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구도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 민주노총은 동맥경화에 걸려 있다.
노동자에겐 진짜 ‘잃어버린 10년’
2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하면서 처음 10년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후 10년 이른바 민주정부를 겪으면서 ‘진보의 기준’은 바로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운동이 탄압받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는 없으며 그건 진정한 민주주의일 수도 없다.
우리가 어떤 정권에 대해 민주적이냐 아니냐를 가늠할 때 그 기준으로 그 정권이 과거 어떤 일을 했느냐도 중요하지만, 현재 그 정권이 어느 계급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당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정책이란 아무리 급진적으로 해석해도 중도우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때론 시장경제조차 억압하는 독재정권과 만났을 때 이들이 일시적으로 민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이들은 노동자의 편일 수 없다. 지금처럼 경찰력을 동원한 아류 독재정권이 집권한 상황에서 노동자가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용산 개발이 시작된 건 현 정권 때가 아니었고, 기륭이나 이랜드 투쟁은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투쟁이란 것을. 개발·건설·재벌 자본은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국민회의·민주당·한나라당 역대 어느 정권과도 변함없이 동거를 했다. 다만 편안한 동거였느냐, 조금 불편한 동거였느냐 하는 작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길은 복잡하지 않다>에서 발췌)
역설적으로 노동자에게 다시 없는 악법인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는 김대중 정권 때 도입되었고, ‘비정규직법’은 노무현 정권 때 도입되었다. 누가 뭐래도 두 정권 모두 반노동자 정권이었지만, 우리의 잘못 또한 그들 못지않게 크다. 1998년 정리해고법 도입 때 민주노총의 상층 관료들은 그 법안의 도입에 합의를 해주었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에서 아직도 잘 살고 있다. 2006년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될 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무기력했고, 비정규직의 희망이 되어주지 못했다. 정권 탓도 있지만 두 법안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에게 사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염치없는 조직인 것이다.
잃어버린 염치를 다시 찾아야 하는 지금, 선거를 앞둔 지금 또다시 모든 민주·진보 진영의 대단결을 주장하는 소리가 고장난 녹음기처럼 들려온다. 그들은 두 전직 대통령이 남기고 간 민주주의와 진보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대중 배우기나 노무현의 민주주의와 진보를 말하는 강좌가 연이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진보와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두 대통령을 되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성찰과 반성을 통한 진보로 나아가지 못하고, 칭송과 숭배를 통한 세 모으기로 가려는 시도들이 불편하기만 하다.
벽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라던 대통령은 벽에 대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도록 노동자를 가두었다. 노동자의 연이은 분신을 두고 “죽음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역대 최대 노동자 구속 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신했던 두 정부에 따라 배울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민주주의인가? 너무나 가혹한 질문인가? 불편한가? 더 그래야 한다.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이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우리가 되돌려야 할 과거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이명박은 오히려 쉽다. 이명박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나쁜 적이니까. 그러나 10년 동안 우리는 담벼락에 소리 지를 자유와 근육을 잃었다. 외부의 폭력 탓도 있지만, 내부 검열과 비난으로 위축되고 무기력해지면서 체념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힘든 싸움인지는 잘 안다.
물어라, 누굴 위한 민주주의인지
노동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고 실패를 경험했다.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이 내부의 적들에 대한 평가와 반성, 처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바로 정파의 득세였다. 처벌은커녕 권력을 잡은 정파들은 있는 사건마저 쉬쉬하며 덮어버렸다.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보호하려 한 조직은 민주노총이 아닌 자신들의 정파 조직이었다.
민주노총의 재정위원회 비리, 수석부위원장 비리, 조합원 성폭력, 반조직 행위 등 수많은 대형 사고들이 정파 관료들의 담합으로 묻혀버렸다. 이들의 계급의식 부족, 출세 지향, 비리, 투쟁 회피 등은 여전히 민주노총 안에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으며 민주노총의 위기 또한 계속되고 있다. 그 정파 관료들의 실체와 이들이 문제를 덮어온 과정에 대해 나는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게 민주노총을 살리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겐 민주노총 살리기가 절실하다.
민주노총은 누가 뭐라 해도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고 소중한 조직이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한국 진보운동의 위기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살리는 일은 민주노총만의 문제가 아니다. 욕이라도 좋으니 민주노총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고 지켜봐주었으면 한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이듯, 민주노총 죽이기보다 더 두려운 건 이명박 시대,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민주노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