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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3년, 보고 싶은 아버지 그리운 내 남편

[기고] 용산참사 3주기, 그리고 네 번째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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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 되면 모두들 행복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그날이후 나에게 1월은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2009년 1월 20일, 온 세상을 뒤흔들어놨던 용산참사. 재개발이란 거대한 괴물이 한강로2가가 아닌 용산4구역이라고 금을 그러놓더니 결국은 그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 살고자 올라갔던 망루에서 다섯 명은 싸늘한 주검으로 일곱 명은 차가운 감옥으로 가뒀다.


그 후 나에겐 연말연시나 새해가 아닌 용산참사 2주기, 용산참사 3주기를 맞이하며 다시금 그날의 기억을 떠오른다.

너무도 추웠던 그날, 파란색 망루를 쳐다보며 그런 일들이 발생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예전처럼 온가족이 모여 행복한 미래를 꿈꾸리라 믿었는데, 모든 것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2006년 12월, 30년 넘게 갈비집을 운영하시던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의 가게를 남편과 함께 “레아”라는 호프집으로 수리를 한 후 문을 열였다. 손님으로 꽉 찬 가게를 바라보며 너무도 행복했었다.

시아버님은 늦은 귀가로 아들과 며느리가 힘들진 않을까, 매일 새벽기도를 다녀오신 후 가게에 들려 청소를 해주셨다. 30년 넘게 갈비집 사장님으로 살아오셨던 어머님은 힘든 주방 일을 하시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남편은 가게 안 밖의 모든 일들을 해결해주며 누구보다 든든한 아들, 남편 이였다.

매일이 행복했다. 3년만 열심히 살다보면 가게 수리할 때 얻은 빚도 갚고 작은 전셋집이라도 얻어 가게 내주시고 옥탑으로 이사하신 부모님들도 편히 살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도 체 되지 않아 사업시행인가가 나더니 그때부터 지옥 그 자체였다. 물론 재개발이란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용산이 개발된다는 소리는 전해왔지만 그렇게 빠르게 진행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곳들을 보면 최하 4년~5년 정도는 걸리고 길면 10년도 넘게 걸릴 수 있다는 게 개발이라고 들었는데 용산4구역은 달랐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게 용산 이였다. 덩치 큰 남자들이 동네를 서성이며 이주를 종용하고 욕설과 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이사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사한 빈집엔 죽은 짐승들의 사체, 오물들을 버리며 공포와 악취에 장사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시아버님과 남편은 투쟁 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아버님과 남편은 혼자 짐을 짊어지시려 서로를 못하게 말리기도 했다. 남편은 나이든 아버님이 혹시라도 용역들에게 당하지는 않으실까, 아버님은 아들이 젊은 얘들한테 두들겨 맞는 건 도저히 볼 수 없다며 서로가 서로를 걱정했다. 그런 아버님과 남편을 어머니와 나는 지켜만 봐야했다.

그날도 어머니와 나는 바라보고만 서있었다. 아버님과 남편이 저 멀리 파란색 망루에서 손을 흔들 때도, 경찰들과 용역들이 물대포를 쏘며 철거민들에게 위협을 할 때도, 특공대의 컨테이너가 하늘 끝 망루로 올라갈 때도, 망루가 화염에 휩싸여 쓸어 질 때도 그렇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단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야만 했고 남편을 보내야만 했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보냈던 355일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건설사나 용역들과의 싸움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집회 현장이나 기자회견, 1인 시위, 추모제마저도 경찰들이 가로막았다.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강제부검을 하고, 화재의 원인이 모두 철거민들에게만 있다면서 경찰 한 명의 죽음을 놓고 일방적인 재판이 시작됐고, 결국 철거민들에게만 4년~5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단 한 번도 철거민 다섯 명의 죽음에 대해선 물어본 적도 없었다. 경찰 책임자들은 법정에조차 서질 않았다.

결국 우리는 거리로 나와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만 했고 그 앞은 항상 공권력이 가로막았다.

  용산참사 1주기, 용산철거민 열사 묘소에 세워진 동상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시아버님은 살아생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용산구청에 “용산4구역엔 세입자들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으니 관리처분인가를 연기 해 달라” 고 애원도 해봤지만 대답은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였다. 그 구청의 공문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망루에 올랐지만 25시간 만에 한사람은 싸늘한 주검으로 한사람은 차가운 감옥으로 가고야 말았다.

그런데 2010년 11월 “용산4구역 관리처분인가는 절차상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무효판결’이 내려져 지금까지 빈터로, 레아가 있던 자리도 망루가 있었던 자리도 포클레인이 아닌 풀만 무성해져 있다.

며칠 전 박원순 서울시장도 도시재개발과 관련해 “용산에서 일어난 어마어마한 참사는 지금까지 해왔던 도시재개발의 현 주소였다”며 “자신이 뿌리 내리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는데 어떤 주민이 가만히 있겠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시간은 흘렀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무리한 개발로 인해 용산은 멈춰져버렸고 장례는 치렀지만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고 참사 생존자인 철거민들은 경찰관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고 아직도 차가운 감옥에 있다.

그런데 법정에 서야할 참사 책임자인 김석기는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뻔뻔하게도 총선출마를 선언했고 아직도 개발현장에서는 무리한 강제철거가 자행되고 용역들의 폭력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인생일 것이다. 그날이후 용산참사 유가족으로, 구속자의 아내로 살았다. 경찰서 한번 가본 적 없던 내가 매일 지하철을 타고 법정으로 구치소로 향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과 부상을 당한 채 구속이 된 남편을 위해 안 해본 게 없다. 바다건너 제주까지 가서 용산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2010년 1월9일 치러진 용산참사 범국민장의 모습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러나 결국 진실은 묻어둔 채 장례를 치렀고 남편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분노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묻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용산참사와 같은 일을 격을 것이고 수많은 개발현장에서 억울한 목소리는 계속 들릴 것임을 알기에 용기 내어 활동가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이번 3주기는 추모만이 아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무분별한 개발사업과 용산참사 재발방지를 위해 마련된 ‘강제퇴거금지법’ 제정과 ‘구속철거민들의 석방’을 촉구하며, 매일 광화문광장에서 대표자들의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더 이상 열사 분들과 구속된 철거민들을 위해 눈물만 흘리진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용산이 멈췄듯 그들도 멈춰야 한다. 개발로 인해 거리로 내쫒기는 사람이 생겨선 안 되고 벼랑 끝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해서도 안 된다.

이제라도 참사 책임자들은 화려한 부활이 아닌 법정에 서서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책임을 져야 할이고, 참사 생존자인 구속철거민들을 감옥이 아닌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줘야 할 것이다. 2009년 그날 이후 네 번째 맞는 이번 설 명절은 가족과 함께 맞이하게 해 줘야 한다. 제발...
덧붙이는 말

정영신 용산참사 유가족. 용산참사로 희생당한 고 이상림 열사의 며느리이자, 망루농성으로 5년형을 받고 구속된 용산4구역 철대위위원장 이충연의 아내이다. 현재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 흑발흑안

    우선 힘내시라는 위로의 말을 드립니다.
    이곳에 댓글이 없는 이유는 모두가 부끄러워서 일것입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진실 앞에 부끄러울줄 알아야하며 분노해야 합니다.

  • 함께사는세상

    맞습니다. 그날의 아픔으로 많은 동지들이 아직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항상 옆에 있겠습니다.

  • 사람

    잘 읽었습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