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리비아 혁명은 어떻게 강탈당했는가?

[진보논평]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강탈당한 리비아 혁명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지난 10월 20일 카다피가 죽음으로써 리비아 내전은 끝났다. 그런데 이 전쟁의 승자는 누구이고 그것이 리비아 민중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카다피 권력의 성격

1969년 친영 리비아 왕조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의료와 교육 분야 등에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을 쓰면서, 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짓밟는 권위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체제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신자유주의 개방정책을 펴면서 공기업 특혜 폐지와 사기업화, 외국인 투자유치 강화를 위한 법 개정, WTO가입 등을 추진하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석유이권을 팔아 뇌물을 챙기면서도 각종 보조금과 실업수당을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카다피 일가는 1,500억 달러(165조원)의 재산을 모았다. 국가는 부유하지만 인민은 가난한 나라였던 것이다.

카다피는 ‘반제’의 수사를 남발했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자들과 깊은 우정을 맺고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를 비롯한 EU에서 색출된 미허가 이주노동자들을 수용했다가 본국으로 송환하는 악명높은 수용소를 운영하여 EU 국가들의 기쁨조 노릇을 하였다. 이 수용소는 CIA와 영국 대외 정보부 M16은 물론 이집트의 정보경찰까지 참여하여 이라크 포로들을 고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42년간의 카다피 독재는 참으로 악랄했다. 카다피는 국가를 부족연합으로 편제하고 인민위원회를 만든 뒤 그 속에 자신의 충성파들로 이루어진 혁명위원회를 운영했다. 혁명위원회는 학교나 관공서 군대 공장 등 모든 곳에서 정보원 노릇을 했다. 여기에 박정희 시절의 중앙정보부와 비슷한 ISA(국내안전부)가 있었다. 인터넷과 전화마저도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지독한 정보독재사회였다. 정당을 만들거나 가입하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이 나라에서는 어떠한 정당이나 운동체도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시민사회나 인권도 없고 정보경찰에 의해 납치, 고문과 살인이 횡행했다. 지난 2월 리비아 민중이 봉기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경찰서, 혁명위원회, ISA 등의 건물을 불태우고 그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에 대한 원성이 얼마나 높았던 것인지 말해준다.


리비아 민중항쟁의 발단

이웃나라인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를 몰아내자 카다피의 42년간에 걸친 악랄한 독재에 신음하던 리비아인들도 카다피를 몰아낼 수 있고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페이스북에서 2월 17일을 ‘분노의 날’로 정하고 시위를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2월 15일 카다피는 유명한 인권변호사인 테르빌을 벵가지에서 연행하였다. 카다피는 1996년 아부살림 교도소에서 주로 벵가지와 동부 출신 수감자 1,200명을 학살하였는데, 테르빌은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대변하는 변호사였다. 테르빌의 연행 소식이 전해지자 벵가지 시민들이 경찰서로 가서 항의시위를 하였다. 다음날에는 바이다를 비롯한 동부의 여러 도시로 항의시위가 확산되었다.

2월 17일 벵가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자 보안대(군대가 아닌 진압경찰과 정보경찰)가 총을 쏘아 8명이 죽었다. 그 다음날에는 장례행렬에 총을 쏘아 14명이 죽었고,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경찰서와 보안대를 불 질렀다. 보안대와 카다피 충성파들(이들은 주로 혁명위원회 소속이다)은 시내 중심가의 군부대가 있는 카티바 단지로 후퇴하였다. 인근 도시에서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한 곳도 있었고, 뱅가지의 시위대도 이탈한 경찰들의 도움으로 일부 무장을 하게 되었다.

2월 20일 시위대는 날아오는 총알을 무릅쓰고 가스통을 싣고 카티바 단지의 정문을 폭파시켰다. 이에 내무장관인 유니스 소장이 특전여단을 데리고 벵가지에 와서 시위대와 협상하여 카다피 충성파들을 안전하게 철수하게 하고 자신은 반카다피 세력에 합류하였다. 많은 경찰과 보안대 그리고 군인들이 카다피를 이탈하여 반정부 세력에 합류하였다. 트리폴리에서도 2월 20일 시위가 일어나자 보안대는 총질을 하였고, 시위대는 보안대와 ‘인민의 전당’ 건물에 불을 질렀다. 내무장관에 이어 법무장관 잘릴(과도국가위원회NTC 대표)도 이탈하고 유엔주재 부대사 다바쉬를 비롯해 권력의 핵심들이 줄줄이 이탈하였다.

동부는 대부분 해방되었고, 미스라타를 비롯한 서부도 봉기에 가담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붙이면 카다피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즉 민중주도의 혁명은 2월 20일이 지나면서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내전으로 변화와 제국주의의 개입전쟁

지난 2월 하순부터 카다피가 아프리카 용병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학살하고 전투기와 군함까지 동원하여 피바다를 만들고 있다는 서방언론의 보도는 전지구인의 상식이 되었다. 집단학살(Genocide)을 자행하고 있는 카다피를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인도주의적 개입’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이 3월 17일 유엔결의안을 빙자하여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훨씬 더 많이 비무장한 시위대를 학살하고 있던 바레인이나 예멘이나 시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인도주의적 개입을 말하지 않았다. 혹은 걸핏하면 팔레스타인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2월 21일 트리폴리에서는 카다피의 졸개들이 녹색광장에 접근하는 시위대에게 총질은 하고 있었지만, 비행기 한 대 안 떠 있던 그 시간에 알자지라는 목격자를 빙자하여 트리폴리와 미스라타가 카다피의 전투기와 탱크 그리고 아프리카 용병으로 학살되고 있다고 생방송을 하였다. 참으로 악랄한 조작방송이었다. 서방 언론들은 알자지라의 보도라면서 카다피의 학살만행을 전세계에 알렸다.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피바다’를 막아야 한다고 맞장구쳤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소장 오캄포는 10,000명(당시 사망자는 벵가지 등의 희생자를 포함하여 200명이 안됨)이 죽었다고 바람을 잡았다. 이 보도는 3월 1일 미 국방장관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추궁에 날조극임이 들어났다.

3월 중순 알자지라는 카다피군의 불타버린 탱크에서 반군들이 주운 비아그라 박스를 공개하였다. 그러자 오캄포는 카다피가 대량강간을 명령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떠들고, 힐러리 미 국무장관은 대량 강간은 물론 심지어 처녀성 검사까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모략질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을린 흔적이 전혀 없는 박스 사건 역시 처음부터 반군과 알자지라가 꾸며낸 조작극이 명백했고, 미군사당국과 정보당국이 강간설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는 것은 이미 NBC 뉴스에서 밝히고 있었다.


엠네스티의 로베라는 2월 26일부터 5월 28일까지의 현장조사보고서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강간 피해자를 치료했다는 단 한사람의 의사도 만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군이 용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서 단 한명의 용병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반군들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위대에 총을 쏘기를 거부하여 카다피군에게 학살당했다는 군인들을 찍은 동영상은 반군들이 생포한 정규군을 학살한 것이라고 밝혔다.

패트릭 코크번이 잘 지적했듯이 “엠네스티의 조사는 카다피 정권이 반대편을 야만적으로 억압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집단학살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권위있는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최근 보고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보고서는 ‘많은 서방 언론들이 사건의 처음부터 시위운동을 전적으로 평화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정권의 보안대가 안보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보이지 않는 비무장한 시위대를 까닭도 없이 학살하고 있다는 아주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 왔다고 덧붙였다.”

동부를 비롯한 리비아의 거의 전역에서 민중이 공권력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민중의 봉기가 절정에 달했던 2월 24일 카다피를 이탈한 법무장관인 잘릴은 부족장들과 경제계와 군 출신들을 포함한 낡은 지배계급들을 모아 ‘유엔개입을 요청할 대표단으로 과도국가위원회를 만들자’는 회합을 가졌고, 3월 2일엔 유일합법정부를 자칭하면서 NTC를 만들고 구왕정의 3색기를 흔들었다.

정권이나 체제를 부정하는 것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혁명은 시민과 공권력의 싸움이지만 내전은 군대간의 전쟁이 된다. 광주의 시민군이 아무리 무장을 하여도 내전이 아닌 항쟁이지만, 4.19 혁명 때 이승만 타도에서 멈추지 않고 인공기를 흔든다거나 임시정부를 운운하면 반란이 된다. 잘릴과 NTC는 혁명을 내전으로 바꿈으로써 카다피에게 군대를 사용할 명분을 주고 그리하여 국제사회의 개입을 이끌어낼 명분을 만들고자 치밀하게 활동했다. 이탈한 군대의 무장력만으로는 카다피의 잘 훈련된 정규군을 이길 수 없었다. 3월 중순 카다피가 벵가지까지 진격해오자 NTC는 이제 곧 벵가지가 ‘피바다’가 될 것이라며 제국주의의 개입을 애원했다. 그리고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프랑스를 비롯한 나토와 미국이 9,600번에 달하는 무자비한 공습을 자행했다. 8월 20일에는 트리폴리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결국 카다피를 몰아낼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2월 21일 유엔 부대사 다바쉬가 ‘용병’과 ‘집단학살’과 ‘비행기’를 운운하면서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애원한 뒤 황색언론인 알자지라와 서방언론, 오캄포와 힐러리를 비롯한 수많은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NTC(과도국가위원회)와 반군들이 제국주의가 개입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투기, 아프리카 용병, 대량강간, 집단학살 등을 운운하며 온갖 모략질에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보면 지상전이 부담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이 비행금지구역의 설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역할분담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뉴욕 타임즈에 보도된 바와 같이 CIA는 오바마의 승인을 받아 이미 2월 중순부터 벵가지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번 리비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황색언론과 제국주의자들이 벌인 날조극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할만하다.

제국주의의 개입 이유

왜 알자지라와 서방 언론과 제국주의자들은 이런 악선동을 조작해내었던 것일까? 서방이 왜 개입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석유이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다피도 석유이권은 충분히 보장하여 주었기 때문에 사실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독점자본은 카다피 체제에 대하여 전혀 불만이 없었다. 위키리크스에 의하면 페트로-캐나다가 30년간의 석유채굴권을 얻은 대가로 카다피에게 10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 폭로되기도 했다. 아프리카인들의 불법이민에 대해서도 카다피는 철저하게 이탈리아와 EU를 만족시켜 왔다.

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친제국주의적이 아닌 자주적 정부 혹은 민중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제국주의를 편들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만이라도 서방 특히 미국의 군사동맹으로 만들거나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카다피를 지원하여 이 지역에서 반미나 반제 감정을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분노의 표적을 버림으로써 친서방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에, 그리고 카다피는 언제든지 중국이나 인도, 소련 등과도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 서방은 석유와 군사적 영향력의 배타적 확보를 위해, 바레인이나 예멘의 학살에는 눈을 감으면서도 ‘인도주의적 개입’을 운운하며 또 다른 꼭두각시 정권의 창출에 나선 것이다.

타락한 혁명

인구 650만 명의 리비아는 인구의 3분의 1이 흑인이고, 150~250만 명의 사하라 이남에서 온 흑인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로베라 보고서가 밝히고 있듯이 반군은 수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의 용병으로 몰아 학살했다. 참으로 더러운 인종주의이다. 반군이 장악한 곳에 만들어진 자경단은 벵가지에서만 수십 개가 활동하고 있는데 주로 카다피에서 이탈한 경찰과 보안대 출신들이고 그들은 카다피 충성파를 색출한다면서 주로 흑인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마치 이승만의 졸개였던 서북청년단과 비슷하다. 이처럼 기회주의자들이 설칠 때 순박한 민중의 자발성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카다피는 죽었다. 평화 시위를 계획했다고 6년에서 25년의 징역에 처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던 카다피는 죽었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는 카다피를 이탈했던 고위 관료들, 군 지휘관들, 부족의 지도자들, 그리고 경제인 등 낡은 지배계급들이 제국주의와 반군간의 뚜쟁이 노릇을 하기 위해 만든 NTC가 있다. 반군 속에는 분명 민중들이 있지만 그 핵심과 간부급에는 행정과 조직 경험이 있는 이탈한 군간부와 경찰과 보안대가 장악하고 있다. 자경단도 마찬가지이다.

NTC는 출발할 때부터 카다피가 제국주의자들과 맺은 모든 조약과 이권을 존중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서방의 지도자들과 투기꾼들이 앞다투어 몰려오고 있다. 카다피는 분명 수십 년간 억압당해 왔던 리비아 민중들이 몰아내었지만, 리비아 내전의 최대의 승리자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들에게 온갖 이권을 약속한 NTC의 반동세력들과 이권다툼에 급급한 부족의 리더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빌붙은 경찰과 보안대 출신의 기회주의자들이 한 몫을 노리고 있다.

결국 리비아 민중의 혁명은 제국주의자들과 기회주의 세력에게 강탈당한 ‘타락한 혁명’이 된 것이다.
덧붙이는 말

박석삼 님은 [2008년 촛불항쟁: 배반당한 개미떼들의 꿈]의 저자이다.

  • 111

    혁명도 아니재 ....
    첨부터 기획된거란다.
    보통 이런건 대리전쟁 혹 공민전쟁이라고 부른다
    카다피가 반미 반이스라엘 반서방했잖아
    친미정권 친서방 친이스라엘 정권세우기위한
    그런거야

  • 양비론

    전형적인 양비론이군요. 리비아는 혁명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반군들이 철저하게 제국주의와 결탁한 결과이니다. 강탈이라고 한다면 반군들이 제국주의 개입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투쟁을 했다는 반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제국주의 개입 이후에 국가과도위원회와 결별해서 싸웠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반란군은 초기에는 혁명세력이었는데 나중에 제국주의 개입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오랫 동안 제국주의에 의해 조종되고 훈련되고 물량과 무기공급을 받은, 그리고 구 왕정 세력들과 결탁한 반동세력일뿐입니다.

  • 바다

    제가 읽었던 글들에는, 반군이 봉기 처음부터 무장상태였다고 적혀있었는데,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