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양비론이군요. 리비아는 혁명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반군들이 철저하게 제국주의와 결탁한 결과이니다. 강탈이라고 한다면 반군들이 제국주의 개입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투쟁을 했다는 반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제국주의 개입 이후에 국가과도위원회와 결별해서 싸웠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반란군은 초기에는 혁명세력이었는데 나중에 제국주의 개입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오랫 동안 제국주의에 의해 조종되고 훈련되고 물량과 무기공급을 받은, 그리고 구 왕정 세력들과 결탁한 반동세력일뿐입니다.
글에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구요^^ 바다/ 벵가지에서는 2월 18일부터 이탈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게 되고, 데르나에서는 2월 16일 이탈한 군인의 도움으로 군병기창을 습격하여 무장을 합니다. 2월 20일까지 전체적인 양상은 폭발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전하여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축출하지만 반란이라기보다는 항쟁에 가깝습니다.
양비론/ 나토는 반군의 무장지원을 거부했습니다. 민중을 무장시켜서는 안되니까요... NTC는 반군에게 위신있는 상급단체가 아니라 반군의 대외 대변인 역할을 자칭한 것입니다. 반군 상층부의 기회주의적 성격과는 별로로 하층에 있는 민중들의 반카다피 열망을 무시하면 안 될 듯합니다.
박석삼/나토는 반군의 무장지원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군사훈련을 시키고 반란을 부추겨왔지요. 심지어 제국주의 신문에서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특수군인들이 지상군으로 직접 참여하여 반군을 직접 지도하고 전쟁에 나섰지요. 국가과도위원회와 하층 민중들을 분리해서 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하층 세력들 중에서 의미있게 조직적으로 상층과 분리해서 왕정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군사침략에 맞서 싸운 세력들이 있었던 간요? 민중들의 반 카다피 정서라고 했는데 전체 700만 인구밖에 안 되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만 200만이 모여 카다피 지지와 제국주의 개입 반대 집회를 했었죠. 혹자는 그것이 카다피가 조종한 집회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카다피는 나토의 공습에 의해 지하로 잠적한 상태였죠. 님은 카다피의 무상체제 등 진보적 역할에 대해서는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이라고 폄하하지만 국유화와 무상체제의 성과는 거대한 것이었죠. 다만 카다피가 제국주의에 일정 정도 굴복한 이후가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아프리카, 중동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은 국가였죠. 카디피의 제국주의의 굴복이 문제라면 반군들이 진정한 민주주의 투사라면 누구 보다도 반제국주의 기치를 들어야 했죠.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리비아인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학살하고 카다피 지지자들을 대량학살한 리비아 반군들은 과연 기층이 아니라 일부 상층에 불과했던가요?
님은 또한 이 글에서 무려 6만 여명이나 되는 제국주의의 학살에 대해서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카다피의 학살이나 아프라키 용병 등에서 제국주의 언론의 조작질에 대해서는 폭로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다함께와 같은 기조의 양비론입니다. 리비아에서 반란군 하층이 '민중혁명'에 앞장선 민중들이라면 그들의 세력 구도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투쟁, 카다피 암살 이후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리바아에서 지금 어떻게 투쟁을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리비아에서 '민중'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의문/ 2월 26일 카다피는 트리폴리의 충성파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줍니다. 이들은 주로 혁명위원회 소속이고 이번 항쟁에서 보안대와 함께 민중의 원성의 대상입니다.
양비론/ 트리폴리에서 200만명이 모였다는 것은 과장이고요 2만명도 안되었을 겁니다. 그들은 시내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반정부 시위대에 총질을 했지요. 레이건의 폭격시 사망자는 6만이 아니라 60명입니다. 한국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반공적인 것처럼 리비아나 아랍인들은 반제적 성향이지요. 실제로 초기에 시민들과 반군은 NTC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제국주의 개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3월에 영국 정보원이 NTC와 접촉하려다가 반군에게 생포된 적도 있지요. 제국주의 개입이 논란이 되었을 때 벵가지에는 ‘외국간섭 반대, 리비아 인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다피가 뭔가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것같은데, 불과 3-4일만에 리비아 전국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카다피 티도를 외치고 경찰서와 보안대 건물을 불지르고 혁명위원회 사람들을 숙청한 것은 그만큼 카다피 체제가 원성이 높았던 반민중적인 권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폭발적인 대중의 봉기는 외부 사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로벌 리서치의 현지 화면을 한번 보시지요. 이게 2만명도 안됩니까?
http://tv.globalresearch.ca/2011/09/tripoli-and-after-natorebel-liberation
레이건 폭격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제국주의 공습으로 사망한 리비아인이 6만명 이라는 건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그렇다는 것이지요. 실제 공습으로 인해 사망한 리비아인들과 파괴된 잔해들, 공습 횟수 등을 보시지요. 리비아 반군이 제국주의 개입에 부정적이고 영국 첩보원을 생포했다면 그건 우발적인 일일 것이고, 벵가지에서 외국개입 반대를 외쳤다고 했는데 그들이 내건 깃발은 왕정의 삼색기였지요. 반란군들이 조직적으로 제국주의 개입 반대를 내걸고 투쟁한 사례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도위원회 상층과 결별해서 투쟁했다는 사례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님이 집요하게 확인하려 하는 것은 카다피의 반동성과 리비아에서 반군 반동들의 혁명성과 리비아에서 리비아 인민들 사망자가 얼마 없다는 것이군요. 사실관계의 오류와 더불어 님의 글쓰기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봅니다. 트리폴리에서 제국주의 반대하고 카다피 지지 시위가 2만이 채 안되었다는 님의 주장과 정반대로 반군들이 다른 아랍국인 튀니지나 알제리처럼 대중시위를 하고 운집해서 집회를 한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군들이 인종주의 대량학살을 하고 카다피 학살 이후 여성의 권리를 왕정시대로 돌리려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렵니까? 반군들의 진보성과 반군 '민중들'이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조직적 사례와 지금 카다피가 학살당한 뒤 제국주의에 맞서 이른바 반군 하층들이 투쟁하고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보적임을 자처한다면 카다피의 통치 시절이나 침공 이후를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봐서도 안 되고 제국주의나 그 주구 언론들로부터 부단히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진실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진보란 이름으로 제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기 바랍니다.
양비론/ 2만이라고 한 표현은 제가 너무 심했습니다. 하지만 20만이든 200만이든 카다피 정권이 반민중적 권력이라는 제 주장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8월 20일 트리폴리 봉기나 2월 15-20까지의 벵가지 투쟁을 보면 억압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폭발 외의 다른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제 블로그(http://blog.jinbo.net/rnp/)에 좀더 상세히 서술하였습니다. 참조하시길...
나토의 위협 속에, 카다피 정권이 지하로 잠적한 가운데 리비아 인구 700만 중에서 200만이 카다피 지지집회를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중들 대다수가 지지를 했다는 것이지요. 8월 20일 트리폴리 봉기요? 그건 나토 공습과 나토 지상군을 등에 업고 반군들이 트리폴리에서 교전을 한 날이지요. 그게 봉기입니까? 도대체 님이 리비아에서 집요하게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국주의 공습으로 죽은 리비아 인은 고작 60명(님은 레이건이라 표현했는데 아마 리비아에서 죽은 사람을 잘못 표현한 것 같은데)이다, 반군들 하층은 민중적이다 이런 것 아닙니까? 벵가지에서 초기에 반군들이 민중적이라더니 나중에는 8월 20일 제국주의 침략을 등에 업고 트리폴리로 들어온 반군들도 혁명투사로 묘사하는 군요.
양비론/ 8월 20일 트리폴리 무장인민봉기는 반군이 8월 22일(21일 밤부터) 트리폴리에 무혈입성하기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After the death of Gaddaf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Libya”, (21 October 2011) at http://www.marxist.com/gaddafi-dead-revolution-and-counter-revolution-in-libya.htm 에도 있지만, 제 블로그의 글 <리비아 :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한 타락한 혁명>(http://blog.jinbo.net/rnp/166 )의 2-3-3. <트리폴리의 봉기와 카다피의 패전>에도 일부 번역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관점이나 입장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입장이 구체적인 사실과는 충돌하면 안 될 듯합니다.
[답변] 나토의 공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토의 공습없이는 반군이 이길 수 없었지요. 친카다피 군중을 200만명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지요. 8월 20일 무장봉기 참가자들은 지역위원회로 결합하여 일종의 자치를 하고 있고, 반군은 일종의 점령군이나 치안세력으로 활동하는 듯... 트리폴리에서는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반정부 시위가 있었습니다. 보안대와 충성파들이 총질을 했지만 총을 갖지 않은 시위대를 진압하는데 6일이 걸린 것입니다. 2월 18일 벵가지에서 총을 쏘는 보안대와 충성파들을 밀어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시위대가 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난 군중들이었고, 그 상황에서 경찰 일부가 이탈한 것입니다. 2월 23일까지 봉기는 동부 전체와 트리폴리 미스라타까지 결국 주요도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을 민중이 아니라 제국주의나 반동들의 사주를 받은 반동세력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리비아에는 카다피에게 혜택받은 사람들과 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부패한 세력이었고 민중들의 원성의 대상이었습니다. 리비아는 시위를 계획만 하여도 25년의 징역에 처해질 정도로 정치적 자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연좌죄는 물론이고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 등 제도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카다피의 악정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아참 본문의 부슬림 교도소는 아부 살림 교도소의 잘못이군요) 카다피 체제에 대한 분석은 카다피에 대한 서방언론의 편견을 지적한 국제인권그룹의 보고서에도 잘 분석되어 있습니다. http://www.crisisgroup.org/~/media/Files/Middle%20East%20North%20Africa/North%20Africa/107%20-%20Popular%20Protest%20in%20North%20Africa%20and%20the%20Middle%20East%20V%20-%20Making%20Sense%20of%20Libya.pdf.
"나토는 반군의 트리폴리 진격에 맞춰 8월20일 트리폴리 주변의 카다피 부대 장악 지역에서 수천 개 목표물을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부어, 전세가 급속하게 반군 쪽으로 기울었다. 반군의 트리폴리 점령은 나토가 공군력으로 지상군 전투의 힘의 균형을 깨뜨린 게 결정적이었다."
한겨레21일의 8월 20일 상황입니다. 외국보도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한 것입니다. 리비아 반군이 따로 있고 민중들이 따로 있고 하는 것은 님의 관념이거나 님이 만들어논 반란군의 혁명성을 입증하기 위한 끼워맞추기에 불과합니다. 2월에도 그렇고 8월에도 대규모 민중세력이 저항을 했다면 리비아에서 반카다피 세력의 승리는 나토의 개입도 있지만 결국은 내적인 힘이 있어서였다는 주장인 셈인데 그러면 이제 반군말고 반카다피 처단에 앞장섰던 압도적 다수 리비아 민중들이 과도위원회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을 시작할 것이라 봅니까?
물론 그렇다고 카다피가 사회주의자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리비아는 낫세르주의의 후계자로 아랍의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의 일부인 것입니다.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대다수 부족들이 카다피 지지를 천명했고 아프리카에서도 그랬습니다. 트리폴리에서 카다피 지지집회에 모인 세력이 200만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는데 자료화면에서 운집한 군중들은 카다피가 동원한 어용 관제데모에 불과한 것입니까?
양비론/님은 트리폴리 광장에 운집한 군중을 들어 카다피가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는 권력이고 리비아 내전은 반제적인 카다피 정권이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인 반군과 싸운 전쟁이라고 주장하려는 듯합니다. 저는 카다피가 충성파도 상당하지만 2월 15일부터 2월 23일까지 리비아 전역에서 대중들이 봉기하여 경찰서와 혁명위원회 건물을 불태운 사실과 반군이 트리폴리에 입성하기 이전인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카다피군을 몰아낸 사실 등을 들어, 혹은 수천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하고 165조원이나 도적질한 사실을 들어 카다피가 반민중적 억압세력이고, 이에 저항하는 리비아 민중들의 항쟁에 친제국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력이 올라탐으로써 제국주의개입전쟁으로 발전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같은 주장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이 정도에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궁금한데요...카다피가 165조원을 삥쳤다는 설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고 정치적 반대자들은 어떤자들이었을까요? 카다피가 권력을 잡은 수십년 이래 리비아 인민들의 삶의질이 높아졌다고 인정한다면 그 민중들의 원성이란 무엇인지요? 카다피의 독재로 인민들의 삶이 나아졌다면 한맺힌 자들은 인민의 일부가 아니라 권력을 강탈당한 과거의 지배계급.즉 왕정의 찌꺼기와 그에 동조하는 반동세력이 아닐까요?
박석삼동지의 지금까지와의 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논리전개에 적이 실망스럽습니다.
지금 논점이 리비아 항쟁 초기에 카다피 학정에 시달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민중봉기냐 아니면 구왕정세력과 제국주의에 의해 조종된 사람들이 카다피 제거를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반동이냐는 것 같은데요..
저도 양비론 님께 몇가지 질문 좀 드릴게요.
리비아 전체인구가 700만도 안되는데 나토 공습에 반대해서 수도 트리폴리(당시 트리폴리 전체인구가 100만이 조금 넘는다고 하던데)에서 카다피 지지자 200만명이나 모여서 시위를 했다는 건데요...
링크 걸어 논 동영상을 봤지만, 그 영상 카다피 측에서 제작한 영상으로 보이네요.
카다피 연설(영어로 더빙된)의 자료화면으로 나오는데, 출처도 거의 단일해 보이고요.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200만명이면 어린아이, 거동불편한 노인, 환자 빼놓고 절반이상이 나왔다는 거잖아요. 그것도 비행기가 공습하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모였다는 것인데...
그 동영상 말고 믿을 만한 다른 보고가 있는지 물어 보고 싶고요,
그리고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는 것도 근거를 잘 모르겠어요.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면 왕정복고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들어본 근거가 왕정때 쓰인 삼색기 들고 나왔다는 거..
근데, 이 깃발문제도 사람들이 왕정복고를 희망했다기보다는 카다피에 반대하는데 카다피 집권 이전이 왕조라서 그 깃발 들고 나왔다는 주장은 여러군데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깃발은 카다피 반대를 뜻할 뿐, 들고 나올만한게 없어서 그걸 흔들어댄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거죠.
가령, 일제 때 1919년 3.1날, 고종의 장례식날 그것도 대한제국 깃발인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3.1운동을 왕정복위 운동이라고 하지도 않고, 독립선언문 읽었다는 33인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을 왕정복고 세력이라고 부르지도 않지요.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거나 항쟁 초기에 왕정복고 세력들이 나왔다는 내용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요?
삼색기 들고 나왔다는 거 말고 다른 내용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위에 분...
박정희가 집권했던 수십년간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무지하게 올라가고 삶의 질도 4.19 전보다는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거 가지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리비아에 대한 정보는 사실 모두 불충분해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분 덕분에 그래도 많은 걸 다시 알게 되어서 고맙고 감사해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야 할듯 하군요. 정치적으로 탄압받은 자들이 어떤 논리로 카다피정권에 대항한 것인지,입에 발린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그 민주주의가 자본의 또는 왕정의 이해에 맞는 민주주의인지 아니면 다수의 인민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민주주의 인지,,,아마 전자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군요...고문과 학살의 널리 유포되어있는 내용들이 제국주의와 자본가계급의 언론이 생산하고 가공한 정보라면 우리는 혹세무민의 그 기사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물을 바라봐서는 안되는 것이죠. 우리가 접하고 그것을 사실로 인식하는 순간 반혁명의 무리가 무고한 양민이 되고 고문과 학살을 당해 죽어가는 것이 되어버리죠. 진실은 무엇일까? 과학적 해석 없이는 설왕설래만 반복할것 같군요...
"1969년 친영 리비아 왕조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의료와 교육 분야 등에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을 쓰면서, 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짓밟는 권위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체제였다" 라고 주장하시는데 누구의 어떤 자료에 의한 것인지 구체적인 제시를 해 주시죠!.
"그리고, 위에 분...
박정희가 집권했던 수십년간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무지하게 올라가고 삶의 질도 4.19 전보다는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거 가지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도 질문님은 박정희와 카다피를 비교하시는 겁니까? 참 비교를 어이없이 하는군요. 당신 나라 국민소득이 박정희 때문에 좋아졌다는 얘긴데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인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진 건가요? 박정희 시대에 재벌의 착취와 수탈이 가속화될때 다수 인민들의 삶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애써 외면하시나요? 그러면 리비아에 재벌이 있나요? 나는 온갖 구라로 가득한 리비아에 대한 찌라시 보도와 기사에도 재벌의 착취에 대항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촛점이 165조를 삥친 등의 카다피의 학정과 인마이포켓에 맞춰져 있고 아니면 그만인 ~카더라통신이 한몫 하고 있군요! 나는 도대체 나도질문님 알량한 당신나라의 국민소득운운이나 박정희와 카다피의 독재비교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당신나라는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나라인데 우리나라 어쩌구 하는걸 보면 당신도 자본가계급인가 봅니다. 그러니 국민소득 어쩌고 하는것이겠지요..
또한 나도질문님은 독재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군요.
당신나라는 자본주의독재,즉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무산인민을 지배하는 자본자유민주주의나라이고 그 반대의 독재는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즉 공산주의 국가를 말합니다.그것은 사유화 되어있던 생산수단(토지,공장,기계등)을 사회화 시키고 사유하던 소수를 지배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리비아는 석유시설등의 국유화로 인해 인민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말을 한겁니다. 왜냐하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님의 주장은 박정희 시대의 잉여노동의 착취를 온전히 정당화하는 것이기에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참 거시기 하시군요...
덧붙여서 일제때 항일운동이 왕정복고가 아니면 무엇인가요? 초기 항일독립군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선왕정을 복원하는게 그 시절 독립군의 염원이었죠. 시대가 수십년 흐르면서 인식도 바뀌고 독립군내부의 헤게모니로 인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건설한 것이지만 조선이라는 왕의나라를 뺏겼다고 하여 찾는 나라가 누구의 나라란 말입니까? ....헐~~~
혁명도 아니재 ....
첨부터 기획된거란다.
보통 이런건 대리전쟁 혹 공민전쟁이라고 부른다
카다피가 반미 반이스라엘 반서방했잖아
친미정권 친서방 친이스라엘 정권세우기위한
그런거야
전형적인 양비론이군요. 리비아는 혁명을 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반군들이 철저하게 제국주의와 결탁한 결과이니다. 강탈이라고 한다면 반군들이 제국주의 개입을 막기 위해 조금이라도 투쟁을 했다는 반증이 있어야 할 것이고, 제국주의 개입 이후에 국가과도위원회와 결별해서 싸웠다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반란군은 초기에는 혁명세력이었는데 나중에 제국주의 개입으로 변질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오랫 동안 제국주의에 의해 조종되고 훈련되고 물량과 무기공급을 받은, 그리고 구 왕정 세력들과 결탁한 반동세력일뿐입니다.
제가 읽었던 글들에는, 반군이 봉기 처음부터 무장상태였다고 적혀있었는데,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겠네요..
글에 관심가져 주셔서 고맙구요^^ 바다/ 벵가지에서는 2월 18일부터 이탈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게 되고, 데르나에서는 2월 16일 이탈한 군인의 도움으로 군병기창을 습격하여 무장을 합니다. 2월 20일까지 전체적인 양상은 폭발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전하여 공권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축출하지만 반란이라기보다는 항쟁에 가깝습니다.
양비론/ 나토는 반군의 무장지원을 거부했습니다. 민중을 무장시켜서는 안되니까요... NTC는 반군에게 위신있는 상급단체가 아니라 반군의 대외 대변인 역할을 자칭한 것입니다. 반군 상층부의 기회주의적 성격과는 별로로 하층에 있는 민중들의 반카다피 열망을 무시하면 안 될 듯합니다.
박석삼/나토는 반군의 무장지원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군사훈련을 시키고 반란을 부추겨왔지요. 심지어 제국주의 신문에서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 특수군인들이 지상군으로 직접 참여하여 반군을 직접 지도하고 전쟁에 나섰지요. 국가과도위원회와 하층 민중들을 분리해서 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하층 세력들 중에서 의미있게 조직적으로 상층과 분리해서 왕정을 규탄하고 제국주의 군사침략에 맞서 싸운 세력들이 있었던 간요? 민중들의 반 카다피 정서라고 했는데 전체 700만 인구밖에 안 되는 리비아 트리폴리에서만 200만이 모여 카다피 지지와 제국주의 개입 반대 집회를 했었죠. 혹자는 그것이 카다피가 조종한 집회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카다피는 나토의 공습에 의해 지하로 잠적한 상태였죠. 님은 카다피의 무상체제 등 진보적 역할에 대해서는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이라고 폄하하지만 국유화와 무상체제의 성과는 거대한 것이었죠. 다만 카다피가 제국주의에 일정 정도 굴복한 이후가 문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아는 아프리카, 중동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은 국가였죠. 카디피의 제국주의의 굴복이 문제라면 반군들이 진정한 민주주의 투사라면 누구 보다도 반제국주의 기치를 들어야 했죠. 용병이라는 이름으로 아프리카 리비아인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학살하고 카다피 지지자들을 대량학살한 리비아 반군들은 과연 기층이 아니라 일부 상층에 불과했던가요?
님은 또한 이 글에서 무려 6만 여명이나 되는 제국주의의 학살에 대해서는 크게 부각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카다피의 학살이나 아프라키 용병 등에서 제국주의 언론의 조작질에 대해서는 폭로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다함께와 같은 기조의 양비론입니다. 리비아에서 반란군 하층이 '민중혁명'에 앞장선 민중들이라면 그들의 세력 구도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투쟁, 카다피 암살 이후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리바아에서 지금 어떻게 투쟁을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리비아에서 '민중'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제국주의침략에 맞서 무기를 풀어 인민을 무장시키겠다는 카다피의 말이 있었던듯 한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전체인민들로 부터 지지받고 있었던거 아닐까요?
의문/ 2월 26일 카다피는 트리폴리의 충성파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줍니다. 이들은 주로 혁명위원회 소속이고 이번 항쟁에서 보안대와 함께 민중의 원성의 대상입니다.
양비론/ 트리폴리에서 200만명이 모였다는 것은 과장이고요 2만명도 안되었을 겁니다. 그들은 시내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반정부 시위대에 총질을 했지요. 레이건의 폭격시 사망자는 6만이 아니라 60명입니다. 한국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반공적인 것처럼 리비아나 아랍인들은 반제적 성향이지요. 실제로 초기에 시민들과 반군은 NTC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제국주의 개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3월에 영국 정보원이 NTC와 접촉하려다가 반군에게 생포된 적도 있지요. 제국주의 개입이 논란이 되었을 때 벵가지에는 ‘외국간섭 반대, 리비아 인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카다피가 뭔가 진보적이었다고 생각하시는 것같은데, 불과 3-4일만에 리비아 전국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카다피 티도를 외치고 경찰서와 보안대 건물을 불지르고 혁명위원회 사람들을 숙청한 것은 그만큼 카다피 체제가 원성이 높았던 반민중적인 권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폭발적인 대중의 봉기는 외부 사주로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로벌 리서치의 현지 화면을 한번 보시지요. 이게 2만명도 안됩니까?
http://tv.globalresearch.ca/2011/09/tripoli-and-after-natorebel-liberation
레이건 폭격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제국주의 공습으로 사망한 리비아인이 6만명 이라는 건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그렇다는 것이지요. 실제 공습으로 인해 사망한 리비아인들과 파괴된 잔해들, 공습 횟수 등을 보시지요. 리비아 반군이 제국주의 개입에 부정적이고 영국 첩보원을 생포했다면 그건 우발적인 일일 것이고, 벵가지에서 외국개입 반대를 외쳤다고 했는데 그들이 내건 깃발은 왕정의 삼색기였지요. 반란군들이 조직적으로 제국주의 개입 반대를 내걸고 투쟁한 사례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과도위원회 상층과 결별해서 투쟁했다는 사례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님이 집요하게 확인하려 하는 것은 카다피의 반동성과 리비아에서 반군 반동들의 혁명성과 리비아에서 리비아 인민들 사망자가 얼마 없다는 것이군요. 사실관계의 오류와 더불어 님의 글쓰기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봅니다. 트리폴리에서 제국주의 반대하고 카다피 지지 시위가 2만이 채 안되었다는 님의 주장과 정반대로 반군들이 다른 아랍국인 튀니지나 알제리처럼 대중시위를 하고 운집해서 집회를 한 사례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군들이 인종주의 대량학살을 하고 카다피 학살 이후 여성의 권리를 왕정시대로 돌리려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하렵니까? 반군들의 진보성과 반군 '민중들'이 제국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조직적 사례와 지금 카다피가 학살당한 뒤 제국주의에 맞서 이른바 반군 하층들이 투쟁하고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보적임을 자처한다면 카다피의 통치 시절이나 침공 이후를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봐서도 안 되고 제국주의나 그 주구 언론들로부터 부단히 자주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진실을 확인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진보란 이름으로 제국주의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기 바랍니다.
양비론/ 2만이라고 한 표현은 제가 너무 심했습니다. 하지만 20만이든 200만이든 카다피 정권이 반민중적 권력이라는 제 주장이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8월 20일 트리폴리 봉기나 2월 15-20까지의 벵가지 투쟁을 보면 억압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폭발 외의 다른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제 블로그(http://blog.jinbo.net/rnp/)에 좀더 상세히 서술하였습니다. 참조하시길...
나토의 위협 속에, 카다피 정권이 지하로 잠적한 가운데 리비아 인구 700만 중에서 200만이 카다피 지지집회를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중들 대다수가 지지를 했다는 것이지요. 8월 20일 트리폴리 봉기요? 그건 나토 공습과 나토 지상군을 등에 업고 반군들이 트리폴리에서 교전을 한 날이지요. 그게 봉기입니까? 도대체 님이 리비아에서 집요하게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국주의 공습으로 죽은 리비아 인은 고작 60명(님은 레이건이라 표현했는데 아마 리비아에서 죽은 사람을 잘못 표현한 것 같은데)이다, 반군들 하층은 민중적이다 이런 것 아닙니까? 벵가지에서 초기에 반군들이 민중적이라더니 나중에는 8월 20일 제국주의 침략을 등에 업고 트리폴리로 들어온 반군들도 혁명투사로 묘사하는 군요.
양비론/ 8월 20일 트리폴리 무장인민봉기는 반군이 8월 22일(21일 밤부터) 트리폴리에 무혈입성하기 전에 일어난 것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After the death of Gaddaf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Libya”, (21 October 2011) at http://www.marxist.com/gaddafi-dead-revolution-and-counter-revolution-in-libya.htm 에도 있지만, 제 블로그의 글 <리비아 :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한 타락한 혁명>(http://blog.jinbo.net/rnp/166 )의 2-3-3. <트리폴리의 봉기와 카다피의 패전>에도 일부 번역되어 있습니다. 특정한 관점이나 입장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입장이 구체적인 사실과는 충돌하면 안 될 듯합니다.
그럼 사실관계를 묻겠습니다.
리비아에서 나토 공습으로 60명이 사망했습니까?
나토 공습없이 반군들이 대중봉기로 리비아를 장악했습니까?
트리폴리에서 200만이 참여했는데 카다피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8월 20일에 트리폴리에서 대중인민봉기가 일어났다면 카다피 지지집회에 나타난 200만명을 빼고 나머지가 대중봉기를 일으켰습니까? 대체 트리폴리 주민수가 수천만명 됩니까?
8월 대중적 인민봉기 참여자라고 하는데 22일에는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가고 무장반군들만 나타난 것입니까? 8월 20일과 22일은 다른 사람, 다른 성격을 가진 세력들입니까?
리비아 내전 초기뿐만 아니라 8월에도 대중적 봉기가 있었다면 반군 상층만 아니라 절대다수가 인민봉기에 참여한 것인가요?
[답변] 나토의 공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나토의 공습없이는 반군이 이길 수 없었지요. 친카다피 군중을 200만명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지요. 8월 20일 무장봉기 참가자들은 지역위원회로 결합하여 일종의 자치를 하고 있고, 반군은 일종의 점령군이나 치안세력으로 활동하는 듯... 트리폴리에서는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반정부 시위가 있었습니다. 보안대와 충성파들이 총질을 했지만 총을 갖지 않은 시위대를 진압하는데 6일이 걸린 것입니다. 2월 18일 벵가지에서 총을 쏘는 보안대와 충성파들을 밀어 붙일 수 있었던 것은 시위대가 총으로 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난 군중들이었고, 그 상황에서 경찰 일부가 이탈한 것입니다. 2월 23일까지 봉기는 동부 전체와 트리폴리 미스라타까지 결국 주요도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들을 민중이 아니라 제국주의나 반동들의 사주를 받은 반동세력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리비아에는 카다피에게 혜택받은 사람들과 부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부패한 세력이었고 민중들의 원성의 대상이었습니다. 리비아는 시위를 계획만 하여도 25년의 징역에 처해질 정도로 정치적 자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연좌죄는 물론이고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 등 제도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카다피의 악정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아참 본문의 부슬림 교도소는 아부 살림 교도소의 잘못이군요) 카다피 체제에 대한 분석은 카다피에 대한 서방언론의 편견을 지적한 국제인권그룹의 보고서에도 잘 분석되어 있습니다. http://www.crisisgroup.org/~/media/Files/Middle%20East%20North%20Africa/North%20Africa/107%20-%20Popular%20Protest%20in%20North%20Africa%20and%20the%20Middle%20East%20V%20-%20Making%20Sense%20of%20Libya.pdf.
"나토는 반군의 트리폴리 진격에 맞춰 8월20일 트리폴리 주변의 카다피 부대 장악 지역에서 수천 개 목표물을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부어, 전세가 급속하게 반군 쪽으로 기울었다. 반군의 트리폴리 점령은 나토가 공군력으로 지상군 전투의 힘의 균형을 깨뜨린 게 결정적이었다."
한겨레21일의 8월 20일 상황입니다. 외국보도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한 것입니다. 리비아 반군이 따로 있고 민중들이 따로 있고 하는 것은 님의 관념이거나 님이 만들어논 반란군의 혁명성을 입증하기 위한 끼워맞추기에 불과합니다. 2월에도 그렇고 8월에도 대규모 민중세력이 저항을 했다면 리비아에서 반카다피 세력의 승리는 나토의 개입도 있지만 결국은 내적인 힘이 있어서였다는 주장인 셈인데 그러면 이제 반군말고 반카다피 처단에 앞장섰던 압도적 다수 리비아 민중들이 과도위원회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을 시작할 것이라 봅니까?
물론 그렇다고 카다피가 사회주의자라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리비아는 낫세르주의의 후계자로 아랍의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의 일부인 것입니다.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대다수 부족들이 카다피 지지를 천명했고 아프리카에서도 그랬습니다. 트리폴리에서 카다피 지지집회에 모인 세력이 200만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는데 자료화면에서 운집한 군중들은 카다피가 동원한 어용 관제데모에 불과한 것입니까?
양비론/님은 트리폴리 광장에 운집한 군중을 들어 카다피가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는 권력이고 리비아 내전은 반제적인 카다피 정권이 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인 반군과 싸운 전쟁이라고 주장하려는 듯합니다. 저는 카다피가 충성파도 상당하지만 2월 15일부터 2월 23일까지 리비아 전역에서 대중들이 봉기하여 경찰서와 혁명위원회 건물을 불태운 사실과 반군이 트리폴리에 입성하기 이전인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여 카다피군을 몰아낸 사실 등을 들어, 혹은 수천명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하고 165조원이나 도적질한 사실을 들어 카다피가 반민중적 억압세력이고, 이에 저항하는 리비아 민중들의 항쟁에 친제국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세력이 올라탐으로써 제국주의개입전쟁으로 발전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니까 더 이상 같은 주장을 반복할 것이 아니라 이 정도에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궁금한데요...카다피가 165조원을 삥쳤다는 설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고 정치적 반대자들은 어떤자들이었을까요? 카다피가 권력을 잡은 수십년 이래 리비아 인민들의 삶의질이 높아졌다고 인정한다면 그 민중들의 원성이란 무엇인지요? 카다피의 독재로 인민들의 삶이 나아졌다면 한맺힌 자들은 인민의 일부가 아니라 권력을 강탈당한 과거의 지배계급.즉 왕정의 찌꺼기와 그에 동조하는 반동세력이 아닐까요?
박석삼동지의 지금까지와의 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논리전개에 적이 실망스럽습니다.
지금 논점이 리비아 항쟁 초기에 카다피 학정에 시달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민중봉기냐 아니면 구왕정세력과 제국주의에 의해 조종된 사람들이 카다피 제거를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반동이냐는 것 같은데요..
저도 양비론 님께 몇가지 질문 좀 드릴게요.
리비아 전체인구가 700만도 안되는데 나토 공습에 반대해서 수도 트리폴리(당시 트리폴리 전체인구가 100만이 조금 넘는다고 하던데)에서 카다피 지지자 200만명이나 모여서 시위를 했다는 건데요...
링크 걸어 논 동영상을 봤지만, 그 영상 카다피 측에서 제작한 영상으로 보이네요.
카다피 연설(영어로 더빙된)의 자료화면으로 나오는데, 출처도 거의 단일해 보이고요.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200만명이면 어린아이, 거동불편한 노인, 환자 빼놓고 절반이상이 나왔다는 거잖아요. 그것도 비행기가 공습하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모였다는 것인데...
그 동영상 말고 믿을 만한 다른 보고가 있는지 물어 보고 싶고요,
그리고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는 것도 근거를 잘 모르겠어요.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면 왕정복고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들어본 근거가 왕정때 쓰인 삼색기 들고 나왔다는 거..
근데, 이 깃발문제도 사람들이 왕정복고를 희망했다기보다는 카다피에 반대하는데 카다피 집권 이전이 왕조라서 그 깃발 들고 나왔다는 주장은 여러군데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깃발은 카다피 반대를 뜻할 뿐, 들고 나올만한게 없어서 그걸 흔들어댄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거죠.
가령, 일제 때 1919년 3.1날, 고종의 장례식날 그것도 대한제국 깃발인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3.1운동을 왕정복위 운동이라고 하지도 않고, 독립선언문 읽었다는 33인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을 왕정복고 세력이라고 부르지도 않지요.
왕정복고 세력과 결탁했다거나 항쟁 초기에 왕정복고 세력들이 나왔다는 내용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요?
삼색기 들고 나왔다는 거 말고 다른 내용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위에 분...
박정희가 집권했던 수십년간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무지하게 올라가고 삶의 질도 4.19 전보다는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거 가지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리비아에 대한 정보는 사실 모두 불충분해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분 덕분에 그래도 많은 걸 다시 알게 되어서 고맙고 감사해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 봐야 할듯 하군요. 정치적으로 탄압받은 자들이 어떤 논리로 카다피정권에 대항한 것인지,입에 발린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그 민주주의가 자본의 또는 왕정의 이해에 맞는 민주주의인지 아니면 다수의 인민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민주주의 인지,,,아마 전자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군요...고문과 학살의 널리 유포되어있는 내용들이 제국주의와 자본가계급의 언론이 생산하고 가공한 정보라면 우리는 혹세무민의 그 기사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물을 바라봐서는 안되는 것이죠. 우리가 접하고 그것을 사실로 인식하는 순간 반혁명의 무리가 무고한 양민이 되고 고문과 학살을 당해 죽어가는 것이 되어버리죠. 진실은 무엇일까? 과학적 해석 없이는 설왕설래만 반복할것 같군요...
"1969년 친영 리비아 왕조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카다피는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의료와 교육 분야 등에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을 쓰면서, 진보세력과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짓밟는 권위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체제였다" 라고 주장하시는데 누구의 어떤 자료에 의한 것인지 구체적인 제시를 해 주시죠!.
"그리고, 위에 분...
박정희가 집권했던 수십년간 우리나라 국민소득도 무지하게 올라가고 삶의 질도 4.19 전보다는 무척 좋아졌습니다.
그거 가지고 독재를 정당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도 질문님은 박정희와 카다피를 비교하시는 겁니까? 참 비교를 어이없이 하는군요. 당신 나라 국민소득이 박정희 때문에 좋아졌다는 얘긴데 국민소득이 높아져서 인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진 건가요? 박정희 시대에 재벌의 착취와 수탈이 가속화될때 다수 인민들의 삶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애써 외면하시나요? 그러면 리비아에 재벌이 있나요? 나는 온갖 구라로 가득한 리비아에 대한 찌라시 보도와 기사에도 재벌의 착취에 대항해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모든 촛점이 165조를 삥친 등의 카다피의 학정과 인마이포켓에 맞춰져 있고 아니면 그만인 ~카더라통신이 한몫 하고 있군요! 나는 도대체 나도질문님 알량한 당신나라의 국민소득운운이나 박정희와 카다피의 독재비교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당신나라는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나라인데 우리나라 어쩌구 하는걸 보면 당신도 자본가계급인가 봅니다. 그러니 국민소득 어쩌고 하는것이겠지요..
또한 나도질문님은 독재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군요.
당신나라는 자본주의독재,즉 소수의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무산인민을 지배하는 자본자유민주주의나라이고 그 반대의 독재는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즉 공산주의 국가를 말합니다.그것은 사유화 되어있던 생산수단(토지,공장,기계등)을 사회화 시키고 사유하던 소수를 지배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리비아는 석유시설등의 국유화로 인해 인민들의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말을 한겁니다. 왜냐하면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없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님의 주장은 박정희 시대의 잉여노동의 착취를 온전히 정당화하는 것이기에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참 거시기 하시군요...
덧붙여서 일제때 항일운동이 왕정복고가 아니면 무엇인가요? 초기 항일독립군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조선왕정을 복원하는게 그 시절 독립군의 염원이었죠. 시대가 수십년 흐르면서 인식도 바뀌고 독립군내부의 헤게모니로 인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건설한 것이지만 조선이라는 왕의나라를 뺏겼다고 하여 찾는 나라가 누구의 나라란 말입니까?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