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학생’에게 공부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겠지. 그렇다면, 학생으로서 권리란, ‘할인’의 권리일까? 버스 요금, 영화관 입장료, 휴대폰 요금 등. 거의 본능적인 소비 욕구를 갖도록 아주 어릴 때부터 길들이는 장치들. 그러고 보면 청소년이든 학생이든 십대들의 권리에 관심이 있는 것은 상품소비사회의 자본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하자작업장학교 종강 파티에 참석한 졸업생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하자센터를 찾아오고 탈학교하고 하자작업장학교productionschool.org에 입학하기까지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고등학교 입학할 즈음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던 어떤 NGO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그 NGO에서는 처음으로 청소년 모임을 만들고 지원해 보려고 시도하면서 ‘청소년인권모임’같은 것을 시작했는데, 이 졸업생은 그 NGO의 위계적 질서/문화가 정말 어색하고 힘들었다고 한다.
일반 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갑’의 질서는 참으로 완강하다. ‘나랑 갑이냐?’라는 질문. 동갑이 아니면 말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한두 살 차이가 나더라도 ‘나이 차이’는 넘을 수 없는 벽이고, ‘학년’보다 힘이 세다. 이 질서는 엄연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교사가 개입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교사의 개입은 나이 위에 ‘성적’이라는 서열 기준을 둔다. 학부모가 개입하면? 성적 위에 ‘돈’이 온다. 그런 세상이다.
그 졸업생은 NGO는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단다. 게다가 인권 모임이니까. 그런데 그곳의 엄격한 상하질서도 그렇고, ‘청소년이 뭘 알아?’ 하는 분위기도 다르지 않아 대단히 실망했단다. 그리고 하자에 왔다. 하자의 일곱 개 약속 중 “성 차별, 나이 차별, 지역 차별 안 한다”는 문구가 중요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하게 된 것, ‘아, NGO의 어른들이 청소년과 일하는 법을 전혀 모르셨구나.’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 그는 NGO에서 일을 하고 있다. NGO의 문화가 여전하다는 것 때문에 무척 속상해했지만, 그때처럼 다시 하자를 찾지는 않는다. 이제는 하자에서 배우고 익힌 것, 청소년으로서 깨우쳤던 것, 그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실현해 가며 살아가고 싶다고, 배운 것을 가꾸고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한다.
차별 의식은 권리가 제한되고, 억압되고 있으며, 그것이 부당하고 불편하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책으로 배워서 권리의 종류를 줄줄 욀 줄 안다고 아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인류와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관심이 있는 NGO라도 그 사회가 가진 상식적 수준에서 아주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전면적으로 크게 다를 수는 없다. ‘권리’란 내가 무엇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게 아니라,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아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헤아려 보는 것이야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내게 무엇이 없는지는 논리나 경험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부재’에 대한 존재감을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무엇(의 부재)을 부당하게, 불편하게 그래서 ‘부자연스럽게’ 생각할 것인가?
[출처: 하자장업장학교 홈페이지] |
하자센터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던 2001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 아버지를 따라 하자에 왔다. 그는 불량 학생으로 낙인찍혀 자주 매를 맞곤 했는데 얼마 전에는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체육 교사에게 걸려 30분 넘게 매타작을 당했다. 그 교사는 다 때리고 난 뒤 안티프라민 한 통을 던져 주더라나. 허벅지와 엉덩이에 피멍이 들고 잘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고 부모가 나서서 자퇴를 시켜 버렸다고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번번이 교사에게 맞고 들어오는 자식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이 다닐 만한 곳이 있을까 생각해 보다가 하자에 들른 터였다.
그런데 그 남학생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나오는데 밖에 여학생 하나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이번에도 딱 걸렸다. “왜 숨어서 피워? 화장실에서 냄새나잖아. 화장실에 금연이라고 쓰여 있잖아. 2층 베란다가 흡연실이니까 거기서 피워.” 그 여자애가 윽박지르며 2층 흡연실로 데리고 갔다. 얼결에 따라가 본 2층 흡연실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흡연 욕구도 이미 가신 상태라, 어색한 마음에 입술도 마르고 바닥에 침부터 퉤- 뱉는다. 다시 여자애가 야단친다. “여기 청소하는 어르신들, 연세도 많고 힘드신데 왜 침을 바닥에 뱉어, 더럽게. 여기 재떨이에 얌전히 뱉든지 뱉지 말든지 해.” 한판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희한하게도 싸움은 나지 않았다. ‘내가 무섭지도 않나?’ 당당하게 큰소리치는 여자애가 이상하고, ‘화장실이 속 편하지 꼰대들이랑 어떻게 한 자리에서 맞담배를 피우냐, 여기 완전 콩가루구나’ 했단다.
그러나 얼마 후 하자센터 내에 비인가 도시형 대안학교인 하자작업장학교가 개교할 때 그 남학생도 슬며시 지원서를 냈고, 이미 영상작업장에서 영상을 배우고 있었던 그 여자애 ‘밑’에서 영상 작업을 배우고, 자기가 맞던 장면을 극화한 독립영화를 찍었고, 그 여자애와는 ‘절친’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숨어 피우는 자신이 갑자기 무척 초라하고 ‘후지게’ 느껴지더라고 했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의 친구들이 하자를 찾아왔을 때 흡연실로 안내했다. “야, 여기가 어디냐, 하자다. 침 뱉지 마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하자에서 지켜야 하는 7가지 약속 : 권리와 의무
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할 거다
② 나이차별, 성차별, 학력차별, 지역차별 안 한다
③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사하지 않을 거다
④ 내 뒤치다꺼리는 내가 할 거다 /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⑤ 정보 때문에 치사해지지 않을 거다 / 정보와 자원은 공유한다
⑥ 입장 바꿔 생각할 거다 / 배려와 친절
⑦ 약속은 지킬 거다 / 못 지킬 약속은 안 할 거다.
하자센터를 찾는 어른들은 첫 번째 규칙을 아주 좋아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할 거다”라는. 그러나 청소년들은 두 번째 규칙을 더 좋아한다. 차별 금지 조항. 그런데 이 규칙이 어쩐지 좋기는 한데, 그 차별 문제를 언제, 어떤 상황에서 느끼느냐 하는 건 아주 다른 문제다. 권리에 대한 태도는 생물학적 성장만큼이나, 사회적 성장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터득되는 것이므로.
청소년들이 ‘차별’ 혹은 ‘권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자마자, 센터 청소년들 사이에서 흡연 문제, 음주 문제, 성 문제, 취업 문제 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센터 내에서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하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흡연 문제는 나이/성별을 막론하고 흡연실에서만 흡연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에는 금연 구역이 그렇게 많지 않아, 청소년센터나 학교 건물 안에서 ‘꼰대’들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청소년센터에 청소년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흡연실이라니!’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지난한 토론과 공청회를 거쳐서 결정된 것이다. 숨바꼭질해 가며 숨어 피우다 걸리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서 좋고, 흡연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자센터 ‘일곱 개 규칙’을 본뜬 ‘흡연자들의 일곱 개 규칙’도 만들었다. ‘금연할 것인지 담배 피우기 전에 한 번씩 생각하라’ ‘자기 담배를 피우되 나누지도 권하지도 않는다’ 같은 규칙은 걱정 많은 ‘꼰대’들과의 절충안이다.
그 외의 것들도 아주 긴 시간의 의논을 통해 결정되었다. 청소년과 어른이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 뒤풀이에서 어른들만 술을 마시거나 따로 뒤풀이를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청소년들의 지적에 따라, 공식 자리에서는 무조건 금주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제대로 된 성과 성 문화에 대하여 청소년/어른 구분 없이 모두 전문가(산부인과/비뇨기과 의사, 문화 이론가, 성폭력상담소 상담원, 성교육 전문가 등)와 함께 학습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취업 문제에 대해서는 알바와 노동에 관한 프로젝트를 조직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어째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가지고 여러 날,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했냐고? 바로 그 토론에 참여했던 청소년들이 지금은 NGO에서 일하고, 교사가 되었고, 영화감독이나 디자이너가 되어 있다. 그리고 하자라는 학교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며 배운 것들을 가지고,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이고, 더 배려하는 문화를 가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는 청년들로 성장해 가고 있다.
전국이 ‘일제고사’ 문제로 시끄러웠던 지난해 3월, 막 고등학생이 된 한 여학생이 이런 글을 올렸다. “학교 분위기 죽이네요. 선생님들도 첫 시간부터 너희들 중 반은 이미 다 끝났다고 하고…….” 공부깨나 하는 이 여학생은 스마트폰에 힘입어 종종 문자를 포스팅하곤 했는데, 한 학기가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중학교 다니는 동생이 “언니는 공부하느라 바빠서” 다른 생각은 엄두도 못 내더라는 문자를 올렸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안 다니려고 준비 중이에요.”라는 글과 함께.
어떤 교사 모임에 갔더니, 한 교사가 수업을 하다 보면 1/3은 참여하고 있고, 1/3은 수업 분위기를 흐릴까 봐 염려되는 (차라리 잠을 자 주면 좋겠고, 그게 아니면 Wee클래스 같은 데 보내고 싶은) 문제 학생들이고, 나머지 1/3은 별 볼일 없는 학생들이라고 했다. 교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소질과 적성과 인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너희들 중 절반은 이미 다 끝났다”는 ‘막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교사라면, 그는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일까? 그 학교가 꽤 입시 명문이라고 하니, 나름대로 재미있게 시험에 나오는 예상 문제를 집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선생일까? 1/3만 수업에 참여하는 현실을 너무나 무감하게 받아들이는 교사라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며 “학교 다니면서 배운 것을, 사회에 나가서도 잘 지키고 실현하고 발전시키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긋지긋한 학교라는 감옥에서 벗어났다며, 밀가루 뿌리고 옷을 찢는 졸업생들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다고 하니, 반가우면서도 문득 학교에서 그 인권조례에 대한 학습은 어떻게 진행이 될까 궁금하다. 조례라는 건 사실 상당한 범위에서 ‘해석’의 문제로 드러날 텐데, 인권에 대한 성찰적 접근이나 학습의 기회 없이, 아전인수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맹목적으로 외우거나,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조례 제정의 근본 취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지는 않겠지?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 덧붙이는 말
-
* 김희옥 히옥스, 필통 sibylle 트위터 @hiiocks, 페이스북 sibylle hiiocks 이런 이름들을 쓰고, 하자센터에서 ‘판돌’이라는 분류 안 되는 직업을 갖게 되어 항상 직업 필드를 보면서 고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