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학생인권조례와 학생생활규정 개정 작업은 학교 현장에 많은 혼란을 주었다.
“저기, 정 선생, 이제 학교가 염색하고 머리 기른 아이들로 넘쳐나도 아무말 못하는 거야? 만약 그렇게 되면 학교는 더 이상 학교가 아니지. 문 닫아야지 뭐. 교육감이 학교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냐? 학교를 몰라도 한참 몰라. 어떻게 머리 기르도록 가만 놔두고 아이들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둘 수 있어. 그게 학교야? 그게 선생이 할 짓이야? 학교가 뭐야. 싫어도 하게 하고, 하고 싶어도 어느 순간은 참고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거 아냐? 미국을 봐. 걔네들 얼마나 규정이 많아. (…) 암튼 맘에 안 들어.”
이러한 혼란은 교사뿐 아니라 체벌 문제의 당사자인 학생들에게서도 감지된다. 체벌대체규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나에게 자주했다.
“선생님! 선생님들이 이제 우리 못 때린대요. 그게 가능해요? 이제 마음대로 해도 되나요?”
“선생님 인권조례 생기면 중학교 가서 머리 길러도 되나요?”
“선생님 인권조례 생기면 중학교 가서 치마 짧게 입어도 되나요?”
교육적 체벌, 우리 안의 관습 헌법
개정된 학생생활규정이 각 학교에서 발효되면서 이제 공식적으로 초등학교에서 체벌은 사라졌다. 아니 대부분의 초등학교 교사들이 체벌을 일상적으로 사용해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교사들에게 실제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체벌이 사라진다는 것,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거의 사라진 체벌에 대해 ‘사망선고’를 선언하는 것에 대한 교사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왔다.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사회 각계의 요구와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학생들에게 신체적인 고통을 주는 체벌 대신에 인권을 존중하는 생활지도를 추구하기 위하여, 기존의 생활규정에서 체벌규정을 삭제하고, 체벌 대체 방안을 마련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체벌 대체 규정>
1단계/ 상담 및 경고
학생이 문제 행동을 했을 때 해당 교사는 학생과의 상담을 통해 문제 행동의 원인을 우선 파악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경고하고 훈계한다.
2단계/ 교실 안 지도
교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문제 행동이 반복될 경우 담당 교사는 교실 내에서 학생을 격리한 후 수업을 진행한다(교실 뒤에 서서 공부하기, 생각하는 의자 활용 등).
3단계/ 노란색 생활카드
교실 내에서 교사의 지도로 문제 행동이 개선되지 않았을 경우 상담실로 이동하여 반성문을 작성하고, 상담 교사는 해당 학생을 상담하고 해당 수업 내용에 대해 자율적으로 학습하도록 지도한다. 또한 담임교사는 학부모에게 노란색 카드를 이용하여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해 지도한 사항을 알리고, 가정과의 협조 체계를 구축한다.
4단계/ 학부모 상담
‘교실 밖 격리Time-Out’에도 불구하고 문제 행동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담임교사는 학부모와 상담을 실시하고,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한 해결 방안을 함께 토의한다.
5단계/ 빨간색 생활카드
‘학부모 상담’에도 불구하고 문제 행동이 개선되지 않는 학생은 봉사 및 노작 활동을 하거나 ○○경찰서, 청예단 등의 외부 기관의 도움을 받아 특별 교육기관의 교육을 이수한다. 담임교사는 학부모에게 빨간색 카드를 이용하여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해 지도한 사항을 알리고, 가정과의 협조 체계를 구축한다.
이 규정과 관련해서 몇몇 선생님들과 체벌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들의 의견을 여과 없이 토해 냈다.
나 선생님, 한 달 동안 체벌 대체 규정 만드느라 고생했겠네요.
생활부장 예. 지금은 마지막 가정통신문 발송하고 학생고충처리센터 신고함 만들고 있어요. 학교에 두 개를 설치하려고요.
라. 체벌 발생 시 조치
1. 학생고충처리센터
● 학교 관리자는 학생들이 체벌 발생을 알릴 수 있도록 교내에 학생고충처리센터 신고함을 운영한다.
● 학생고충처리센터에 신고된 사항에 대해서는 비밀이 보장되도록 한다.
2. 체벌 발생 시 조치 방법은 다음 각 호와 같다.
● 신고 : 체벌 발생 시 학생은 학생고충처리센터 또는 교감에게 직접 체벌 상황에 대해 신고한다.
● 조사 : 교감은 교사와 학생에게 체벌 상황에 대한 사실 관계를 조사하고, 충분한 소명의 기회를 준다.
● 중재 : 교감은 교사 학생 간 중재 및 화해를 유도한다.
● 조치 : 학교장은 해당 교사에 대해서 경고 및 주의 조치를 취하고, 방학을 이용해 자비연수를 이수하도록 명령하며, 연수는 분노 관리 및 대화 방법, 분쟁 해결 및 평화 교육 등 학생 지도 방법에 대한 내용으로 한다. 체벌 행위가 반복될 때에는 해당 교사에 대해 법령과 규칙에 따라 상급 기관에 징계 조치를 요구한다.
교사 1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활부장 어디까지나 학교 자체적으로 체벌 금지 규정과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추진 중인 겁니다.
교사 1 그러니까 학생보고 선생 고발하라는 거잖아. 중간에서 교감이 교사와 학생의 화해를 중재한다는 것이고. 체벌이 마치 교사와 학생 사이의 문제인 것처럼 규정해 버리는 거잖아.
교사 2 솔직히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에 찬성하지만 체벌을 교사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것 같아요. 교육감도 교실 속의 권위를 이야기했는데 체벌이 교사들의 권위적인 문화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 체벌을 교사와 학생의 문제로 개인화시킨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서 지금 상황을 비유하자면 완전히 군대에서 사단장이나 부대장 직속으로 구타 신고함 설치하는 거하고 똑같다는 거고요.
교사 1 아니 생각을 한번 해 보라고. 체벌이 교사 한 사람이 ‘사이코’라서 생기는 거냐고. 정 선생도 알 거 아냐. 출근해 봐. 애들 서른 명이 와글와글대지. 나가야 할 진도는 좀 많아. 이것저것 학교에서 요구하는 거 많지. 성적 올리라고 쪼이지. 아이스크림 같은 인터넷 사용하지 말고 교사들이 교재 개발해서 ‘창의적’으로 수업하라고 하는데 가르쳐야 할 교과는 좀 많냐고. 애들은 학원 다니면서 선행 학습 해서 이미 배울 내용 다 배워 가지고 오니까 반의 삼분의 일 정도는 쉬는 시간에 학교에서 보란 듯이 학원 문제집 꺼내 놓고 학교 수업은 다 아는 거라고 비웃지. 그런데 학교장은 교육청 지시라며 한다는 소리가 “수행평가 적기 실시, 체육 수업 철저, 생활지도 철저, 국가 수준 성취도 평가 준비 철저, 아이들 사랑으로 대하기, 체벌하지 않기……” 순 이런 무슨 성경에 쓰여 있는 이야기만 하잖아. 내가 공정택 교육감 하는 짓이 하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곽노현 찍었는데, 이건 뭐, 교사를 체벌하는 사람으로밖에 생각 안 하는 거 아냐? 왜 애들을 때리게 되나, 이런 문제를 성숙하게 짚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뭐 그리 급하다고 일선 교사들을 다 ‘오장풍 교사’로 만들어…….
생활부장 선생님 말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체벌 금지는 대세이니까 따라야 하고, 또 아무래도 선생님한테 맞았는데 어린 학생이 직접 교감 선생님께 신고할 수 없으니까요. 그건 굉장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동이잖아요. 그래서 고충처리센터 신고함을 만들면 학생들이 선생님한테 체벌을 당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기는 거죠. 비밀이 보장되는 창구죠.
나 그런데 학생이 신고하면 교감이 학생과 교사 사이를 중재한다는 이런 식의 접근이 좀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교감, 교장이 바로 체벌 유발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아닌가요? 군대에서 구타를 사병들 사이의 비합리적 행위로 개인화시키고 언제든 구타를 고발하라고 하면서 군대 자체가 폭력을 생산하는 기제임을 은폐하는 것처럼, 지금 체벌 금지 문제는 마치 체벌 문제는 정신 이상 교사들의 문제로 개인화시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교사 2 아니, 솔직히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공정택 교육감 때 학력 신장 강조하면서 학교별로 창의적인 통지 방법 전시회 했는데 꼭 그때 같아. 그때 지역교육청별로 학력 신장 전시회 하면서 학교마다 3단계, 4단계 이런 식으로 통지 방법을 개선하고 통지표도 칼라에, 그래프에 별 게 다 나왔잖아. 지금 체벌 대체 규정도 그래. 학교마다 경쟁하는 거 같아. 누가 더 창의적인 안을 내나 하고. 이게 무슨 인권이야. 안 때리면 인권인가?
생활부장 저도 솔직히 힘들어요. 학운위에 안건 상정해야지, 가정통신문 몇 번 내야죠. 또 의견서 가져오면 모아서 내용 취합해야죠. 다른 학교 상황 비교하면서 베꼈다는 이야기 안 들어야 하지만 또 큰 원칙은 같이 가야 하고. 그런데 선생님들께서는 좀 더 강력하게 교사의 교육권을 방어할 수 있는 내용을 집어넣어야 한다고 하시고, 또 학부모들 중에서는 안 때리면 모범적인 우리 아이만 피해 보는 거 아니냐 이런 말을 하세요.
나 힘들었을 거예요. 사실 민주적인 의견 수렴이라는 게 말이 쉽지 여기저기서 의견이 막 터져 나오는 거잖아요. 또 체벌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예요. 부모가 자기 자식을 때려서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부터 학교에서 교사 체벌을 정당화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체벌 금지 이후 교실에서 직접 선생님들이 체감하는 변화가 있나요? 교과실에서 이야기해 보면 학생들 중에서 대놓고 ‘선생님, 이제 못 때리잖아요’라고 하는 학생이 있다고 하던데…….
교사 1 어떤 새끼야! 그걸 가만둬? 그러니까 내 말은 초등은 체벌 금지해도 별 영향 없다는 거야. 특별히 규제할 것이 없잖아. 체벌 거의 안 해 왔고. 그런데 분위기가 이건 아니라는 거지.
나 어떤 분위기요?
교사 1 글쎄, 뭔가 관계가 깨진 느낌? 방어자와 감시자의 관계가 된 느낌……, 대다수의 교사들이 이제까지 폭력 교사였나 하는 느낌. 어쨌든 때리는 거 금지하는 거 좋다 이거야. 원래 안 때렸으니까 규정을 바로 잡는다고 생각하자고. 그럼 교사의 권리도 좀 분명히 해야지. 진짜 개판인 얘들에게 좀 더 강력한 수단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나 그게 뭘까요? 문제 학생들을 위한 보다 강력한 수단, 그것도 체벌 아닌 수단이라는 게.
교사 2 저는 체벌 금지 규정 만드는 과정에서 교사들의 허탈감을 보면서,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사실은 교도소에서 교도관과 재소자의 관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사 학생의 관계는 없고 관리해야 할 재소자들만 있었던 거죠. 말 잘 듣는 재소자들은 법 없이도 살지만 규정을 어기는 재소자들에게는 언제나 신체적 체벌과 제재를 가할 수 있었는데 교도관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 가니까 이건 뭐 재소자들이 금세 달려들고 저항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할까요.
생활부장 저도 그게 생활규정 만들면서 고민이었어요. 저부터도 드는 생각이 체벌이 사라지면 아이들이 엉망이 되니까 보다 강력한 대체 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게 정말 인권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고요.
교사 2 저는 학교에서 교사의 체벌이라는 게 일종의 ‘관습 헌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 목적상 체벌은 실제 실행되지 않았다고 해도 교사들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관습으로서 헌법 말이에요.
체벌 금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육 목적상 체벌’과 관습 헌법, 교사의 권위, 학생들의 저항 이런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체벌과 권위 : 비동시성의 동시성
학생의 입장에서 본래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조례는 권리의 존엄한 주체로서 학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참여와 결정을 훈련할 수 있는 학교,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에 맞서는 학교, 학생들이 감당할 만한 교육, 자유의 행사를 통한 책임 있는 삶의 영위, 학생의 삶에 대한 총체적 돌봄이 있는 학교, 인권의 상호 불가분성에 대한 존중, 네트워크와 연대가 꽃피는 학교, 교사의 권한과 역량 강화, 권리 구제에 대한 보장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폭력 및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교육에 관한 권리,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및 정보의 권리, 양심·종교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자치 및 참여의 권리, 복지에 대한 권리, 징계 등 절차에서의 권리, 권리 침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권 조례 어디에서도 ‘머리 길러도 된다’, ‘파마해도 된다’, ‘염색해도 된다’, ‘옷 마음대로 입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사들은 ‘자기 결정권으로서 자유’를 ‘마음대로 할 자유’로 생각하여 체벌이 금지되는 순간 문제아들은 통제가 안 될 것이고 인권조례가 공포되는 순간 학교는 ‘개판 오분 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민주주의가 마음대로 할 자유라고 말하며 우려했던 플라톤의 문법과 유사하다. 자유가 주어지면 학교는 마음대로 행동하는 개인들로 넘쳐나 아수라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상황을 규율하기 위해 자유가 아닌 체벌 대체 규정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의 거울인 학생들도 교사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의 체벌은 필요하다.
- 체벌은 있다는 것만으로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규제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 체벌을 하지 않아 모범적인 아이들의 학습권이 침해당하는 것을 반대한다.
‘교육 목적상 체벌이 용인될 수 있는가’ 하는 논란과 관련하여 작년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라는 작품으로 재판 수업을 할 때 한 아이가 던진 질문이 기억난다. 체벌 금지 시대에 체벌과 권위라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
“엄석대와 관련하여 질문하겠습니다. 엄석대 반에서는 점심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석대의 책상 위에 찐 고구마와 달걀, 땅콩, 사과 같은 것들을 갖다 놓았고 매일 돌아가면서 엄석대에게 물을 떠다 주는 물 당번이 있었습니다. 엄석대는 반장으로서 청소 및 숙제 검사를 했고, 싸움과 같은 일이 교실에서 벌어졌을 때 즉석 벌칙을 주었으며, 규칙 위반을 감시하거나 처벌했습니다. 그리고 엄석대는 전 학년 주먹 짱이라서 우리 반 아이들은 누구에게도 얻어맞지 않았습니다. 교실에서 싸우는 아이들이 코피가 나자 응급조치를 취한 후 코피를 나게 한 아이를 팔을 들고 꿇어앉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손톱이 길어도 며칠만 이발이 늦어져도 위생 불량자로 매도했습니다. 엄석대가 그렇게 해서 그 반이 전교에서 가장 깨끗한 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엄석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엄석대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요? 아니면 엄석대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요? 다시 말해 손톱 검사를 해서 위생 상태가 안 좋은 학생을 벌서게 하고, 청소 제대로 안 하면 통과 안 시키고 코피 나게 한 아이를 팔 들고 꿇어앉게 한 석대의 행동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요? 아니면 학생으로서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인가요?”
이 학생이 제기한 질문의 핵심은 잘못한 학생에 대한 교사의 체벌은 교육 목적상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엄석대가 잘못되었다면 그가 학생들에게 반인권적이었기 때문이지 학생이라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엄석대가 반인권적이라면 교사의 교육 목적상 체벌도 반인권적인 것이고 교사의 체벌이 교육 목적상 정당화된다면 친구들끼리 행해지는 ‘교육 목적상’ 체벌도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담임을 대신해서 학급회장이 아이들에게 경고를 주고 잘못하면 불러내 ‘체벌’을 하는 것도 교육 목적상이라면 용인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인데 나는 이 질문을 받고 꽤 오랫동안 멍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
위 사례는 교사가 학생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의 문제, 즉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나를 비롯한 많은 교사들은 교사의 권위가 ‘강제적 수단으로서 제재와 처벌’에 기반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학생에 대한 교사의 처벌 또는 제재 가능성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번 체벌 대체 규정 마련 과정에서 (그동안 아이들을 체벌하지는 않았지만) 체벌 금지가 교사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하면 한국의 학교는 왜 체벌이라는 형식으로 학생에 대한 교사의 권위를 제도화해 올 수밖에 없었는가로 바꿀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독일의 사학자 어니스트 블로흐ernst bloch에게서 찾고 싶다. 독일의 사학자 어니스트 블로흐는 나치 정권이 본격적인 맹위를 떨치기 전 1935년 출판한 《우리 시대의 유산》이라는 책에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을 들어 독일 사회를 분석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즘, 즉 국가사회주의라는 진보적 명칭으로 탄생한 반동적 극우민족주의의 대두를 빗댄 것인데, 급속히 형성된 자본주의 구조와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문화적 구조 사이의 괴리, 그리고 그 괴리로 인해 빚어지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틀로 체벌 금지 이후의 학교 체제를 분석해 보면, 한국의 학교 체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중적 질서가 중첩적으로 병존하는 사회체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학교는 미군정기에 일제시대의 강압적 권력과 구분되는 민주적인 권위를 표방했음에도 실상은 일제시대와 같은 폭력과 강압적 권력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치 구조를 모델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 학교 체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교사와 학생 상호 간의 신뢰로부터 오는 권위가 아니라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학교 내 규칙과 규정, 제도 운영에 관한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작동해 왔다. 사실상 치외법권적 상태에서 학교를 운영하도록 학교장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였으며 학교는 학교장을 중심으로 한 교감, 부장으로 이어지는 승진 카르텔 속에서 교육을 통제와 복종의 문제로 접근했다. 학생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교육 목적상’ 체벌을 광범위하게 용인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 온 것이다. 일제가 이승만으로, 이승만이 박정희로 박정희가 전두환, 노태우로 그리고 최근의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다를 뿐 체벌에 기반한 권위의 확보라는 상황은 반복되었다. 한국의 학교 사회에서 권위와 민주주의는 실천된 이념이 아니라 표방된 이념으로 남아 있었으며 미래에 실현되어야 것으로 끊임없이 유예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 체벌 금지가 현실화되었다. 블로흐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대로라면 지금의 상황은 당연히 오래전에 사라져야 했을 체벌이라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로 말미암아 우리의 학교 체제 속에 과거의 낡은 심성이 집요하게 존속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의 근대 학교 사회가 체벌을 금지하고 근대적 훈육과 규율 양식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상황과 대비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낡은 심성을 소지해 왔던 우리 교사들은 체벌 금지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신성한 신화’, ‘좌절된 기대’, ‘비합리적 설명’에 사로잡혀 있다.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에 저항하는 이유 그리고 인권
학생 체벌과 교사의 권위에 대해 생각을 하던 중 폴 윌리스라는 사람이 생각났다. 그는 《학교와 계급재생산》에서 노동 계층의 아이들이 반反학교 문화를 형성하면서 어떻게 저항을 조직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의 언어로 그들의 일상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체벌과 교사의 권위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반학교 문화의 가장 기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은 ‘권위’에 대해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집요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싸나이laids”들의 일상 언어에서 쉽게 드러난다.
교사들에 대한 그룹 토론 중에서
조이 ……그들은 우리를 벌줄 수 있죠. 그들은 우리보다 덩치도 크고, 우리보다 더 거대한 제도 편에 서 있잖아요. 우리는 뭐 보잘 것 없고, 그들은 거대한 모든 것을 등에 업고 있구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복수하려 들지요. 그쵸, 권위란 게 티껍지 않나요.
에디 그들은 자기들이 선생이기 때문에 높고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말 별볼 일 없어요. 보통사람들에 불과해요. 안 그래요?
빌 선생님들은 자기가 전부인 줄 알아요. 우리보다 더 부유하고 더 높은 지위를 누리지요. 자기들이 훨씬 더 높은 데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에요.
스팽키 우리는 선생들 이름을 막 부르고 싶지만…….
폐트 정말로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저자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의 말은 선생님들의 지위가 더 높다는 뜻이군요. 여러분 모두는 선생님들이 더 유식하다는 사실에 동의합니까?
조이 그래요. 그렇지만 선생님들이 조금 더 똑똑하다고 더 높은 것은 아니지요.
빌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만큼 우리를 대접해 주어야만 해요.
(…)
조이 그런데 자기들 꼴리는 대로 우리를 쥐고 흔들어요.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시키면 우리는 해야 하죠. 우리가 밑에 있기 때문에 말예요. 한번은 여선생님 수업 시간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모두 반지나 팔찌 한두 개씩을 하고 있었거든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선생님이 ‘그거 전부 끌러 놓아!’ 라고 소리치지 않겠어요?
- 폴 윌리스 《학교와 계급재생산》 51쪽, <권위에 대한 반항과 순응적 아이들에 대한 거부> 中에서
우리가 권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분명히 할 것은 학생들 또한 하나의 주체이기 때문에 집단 속에서 자기의 생각을 만들어 가면서 끊임없이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의 폭력이나 권위에 완전히 지배당하거나 종속되는 주체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조이의 말처럼 “우리보다 덩치도 크고, 우리보다 더 거대한 제도 편에 서 있는 교사, 학생들을 보잘 것 없이 여기고, 거대한 모든 것을 등에 업고 있는” 교사에게 학생들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학생들의 저항은 교사보다 제도와 학교 당국을 향해 있는 것이다.
학생들,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에 관심이 없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공장, 병원, 군대와 같은 근대적 제도이다. 이러한 근대적 제도들은 공통적으로 다양한 기술을 통해 보다 세부적으로 연습, 훈련, 시간 사용, 평가, 사회적 자원, 기록 등의 방식으로 신체의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작용하여 신체의 동작을 통제하며 효율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니까 학교는 한편으로는 권위에 기초한 사회화 기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계질서적 감시와 규격화하는 제재를 통해 근대적 주체를 생산하는 공간이다. 학교는 개인의 행위를 특정화하고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려는 목적으로 규범을 작성하고 세밀하게 조문화하며, 그러한 규범에 따라 일정한 정상적 질서를 정해 놓고 위반하면 처벌을 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체벌 대체 규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체벌과 멀리 있었던, 예의 바르고 학교가 정해 놓은 규칙을 잘 지켰던 모범적인 학생들에게 인권조례와 체벌 금지는 귀찮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 충분히 존중받았고 체벌은 그들에게서 멀리 있었으니까!
그러나 인권의 문제는 늘 주변과 경계에 선 주체들의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도 당연히 주변과 경계에 서 있는 학생들의 인권을 제도화하는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당연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인권이라는 개념은 고작해야 18세기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귀족과 남성, 다수자들, 그리고 고문을 명령하던 법관들과 고문을 정당화하던 경찰들에게, 여성·노동자·소수자·범죄자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인권에 대해 매우 역겨워했다. 인권은 언제나 귀족들과 다수자들, 그리고 남자들과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살 사람들, 즉 고상하고 품격 있는 자들만이 소유한 인간의 권리였다. 그들에게 죄를 저지르는 자들의 인권, 지금 우리의 논의에서 중심이 되는 문제 학생들에 대한 인권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학생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문제 학생들을 어떻게 통제할지 걱정하면서 강력한 체벌 대체 조항을 만들고 있고 여전히 학교라는 공식적 제도를 존중하는 ‘범생이’들만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문제 학생들에게 ‘너희들이 인권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범생이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왕따, 괴롭히기, 개기기, 거짓말하기, 까불기와 같은 반학교 문화를 그들이 왜 형성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그 표면에 나타나는 행동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단죄하는 조항을 세밀화함으로써 ‘학교 가치에 순응하는 모범생’들의 인권만을 제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려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체벌 대체 규정이 마련된 이후, 중학생이 된 제자를 만났다. 공부도 못하고 가정형편도 어려운 이 친구에게 체벌 금지, 학생인권에 대해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선생님! 학생인권이고 체벌 금지고 이런 거 저는 관심 없어요. 어차피 학교는 공부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고 공부하는 놈들을 위한 곳이죠. 저 같은 애들은 체벌 금지, 학생인권 이런 거 보장된다고 인간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솔직히 인권 이야기할 때 웃겨요. 학교에서 인권이라니……. 수업시간의 선생님의 눈빛, 공부 못해서 받는 멸시……. 결국 때리지 않는다는 것 빼고는 학교가 어떤 인권을 보장할 수 있죠? 선생님들은 인권 이야기하면서 ‘너네들한테도 인권이 있냐?’ 하고 말하면서 저를 보세요. 전 솔직히 학교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그게 최고의 학생인권이에요.”
인권, 자유로운 주체로서 학생의 문제
▲ 체벌 당한 학생의 모습(자료사진) [출처: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경기남부 학부모회] |
학교에서 학생인권을 제한하고 교육 목적상 체벌을 허용한 것은 교사의 학생 징계가 부모를 대신하여 행하는 것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체벌은 공교육이 부모의 자녀 교육권이라는 자연권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교사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관습 헌법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원칙하에 많은 판례에서는 교사가 악의적인 방법을 쓰거나 영구적인 상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체벌은 전적으로 교사의 자유재량으로 인정해 주었다.
물론 교육 목적상 체벌을 정당화하는 패러다임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학생의 양심, 언론 표현의 자유와 같은 헌법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비롯하여 학교가 인권의 보루가 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문제는 학생인권 차원에서 체벌대체 규정을 만드는 데 동의하는 사람들도, 아니 솔직히 나조차도 ‘교육 목적상’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다는 데에 너무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인권과 체벌의 문제를 비롯한 개인의 자유와 자기 결정권의 문제를 정치화시키는 사람들은 오히려 보수 진영인데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촛불 집회에서 보여 준 중고등학생들의 자발적 행위였다. 이들은 이 촛불 집회에 중고등학생들이 참가한 사건에 대해 매우 우려를 표하면서 학생이 기본권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는 교육 목적에 비추어 재조명할 수밖에 없고 그들에게 보장된 자유의 내용이 교육 목적에 반하고 다른 학생의 신체나 정신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학교는 그 행동이 다른 학생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뭐 굉장히 고상하게 말하고 있지만 ‘빨갱이 바이러스’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왜 학생인권이 보장되는 학교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이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우리가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왜 학생들의 자기 결정권을 중심으로 한 인권을 제도화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미국의 채피chafee 교수는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비롯한 인권이 보장됨으로써 얻어지는 두 가지 종류의 이익을 거론하고 있다. 하나는 개인적 이익으로, 만약 삶이 살 만하려면 자신에게 필수적인 문제들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획득하는 데서 얻어지는 사회적 이익이다.
긴 역사에 걸쳐, 개인들은 억압적인 세력에 맞서 싸우며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해 왔고 이러한 자유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보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스릴 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 자신이 어리석음과 부당함과 위험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체험해 왔다. 그러니까 학생인권이 보장되고 체벌이 금지됨으로써 학생들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될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과 동의와 복종 그리고 폭력에 관한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고 자유롭게 두려움 없는 추론의 힘을 확신하는 용감하고 자립적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학생인권이 보장되는 학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은 바로 이점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이 교사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교육의 패러다임이 배움의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하면, 학생인권 문제의 출발은 권리의 존엄한 주체로서 학생을 전제로 하여, 참여와 결정을 훈련할 수 있는 학교, 차이를 존중하고 차별에 맞서는 학교, 학생들이 감당할 만한 교육, 자유의 행사를 통한 책임 있는 삶의 영위, 학생의 삶에 대한 총체적 돌봄이 있는 학교, 인권의 상호 불가분성에 대한 존중, 네트워크와 연대가 꽃피는 학교를 만드는 데 핵심이 있다. 학교가 체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이상 교사는 권위가 아니라 폭력과 강제적 처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권의 한계는 곧 교육의 한계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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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주 님(edcom234@hanmail.net)은 이메일이 서너 개쯤 되고 혈액형은 성격 파악 어렵다는 AB형인 교사입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이지만 의식은 점점 노동자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물질적인 부보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이 글은 <오늘의 교육> 창간준비호(1,2월)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