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기다리는 사이,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 투쟁위원회 의장이자 미선 씨의 남편 김석진 씨였다.
“어제 1인 시위를 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프면 그만 내려오라고 했는데...”
김석진 의장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미선 씨는 얼마 전 폐암 수술을 받았다.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해 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상황이니 남편 입장에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선 씨는 씩씩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견디기 전 까지는 계속 하겠다고 얘기했어요.”
김석진 씨의 걱정을 전하는 나에게 미선 씨가 건넨 말이다.
“몸은 아프지만, 피켓을 드니 속이 후련해요”
김석진 의장의 장기투쟁은 벌써 1년 9개월 째를 맞았다. 지난 2008년부터 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 노동자 복직투쟁에 참여해 왔던 그는, 2009년 1월 17일 큰 사고를 당했다. 17일 밤 11시 30분 경, 오토바이 헬멧을 쓴 50여 명의 현대중공업 경비대가 농성장에 들이닥쳐 소화기와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농성자들을 폭행하고 농성장을 부순 것. 그 사고로 김 의장은 1년 9개월 째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남편은 그 날 소화기로 목 뒤를 가격당하고 기절해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저는 남편이 들어올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고요. 신랑이 맞고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심정은... 지금까지도 목부터 팔까지 후유증이 남아있어요.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요.”
사건 발생 5일 후인 1월 22일, 현대중공업 노사협력부 김모 상무는 자신이 높은 분의 지시로 모든 합의의 전권을 가지고 있다며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에게 합의를 요구했다. 상무는 본부장과의 협의 하에 합의서와 협약서를 작성했으며, 협약서는 언론에 비공개 할 것을 약속했다. 협약서에는 ‘조합원 징계 시 인원 최소화’, ‘부상자 치료비’, ‘피해 변상금’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김 의장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협약서의 내용도 이행되지 않았다.
“그 후 남편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의 실질적 지배자인 정몽준 의원이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1인 시위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법원에서는 미포조선 비방 1인 시위나 언론 인터뷰에, 건당 1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어요. 지금까지 낸 벌금만 200만원이고, 뒤에 또 고발을 했더라고요.”
▲ 2009년 1월 17일. 영남노동자대회가 열린 날 저녁 11시 30분 경 현중 경비대의 보복테러가 있었다. 병원으로 후송되는 김석진 의장과 불타는 농성장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법원의 결정으로 미포조선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김석진 의장 자신 뿐 아니라, 가족, 친지 등 또한 울산미포를 비판하는 인터뷰나 1인 시위를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1인 시위 피켓에도 김 의장의 사업장인 ‘현대미포조선’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지배자 정몽준 의원 나서라’라는 문구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 기사에서도 미포조선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기자도 이렇게 답답한데, 본인들은 오죽 할까.
“제가 폐암에 걸린 것도, 스트레스 때문 이예요. 너무 억울하거든요. 신랑이 새벽에 맞고 들어오는 것, 억울하게 직원에게 맞는 것이 모두 다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몸이 아파도 가만히 있으면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고 생각해서 나온 거예요. 어제 1인 시위를 하고 나니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 오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피켓을 들고 나니 신기하게 힘이 솟는 거예요. 속이 후련해요.”
“남편의 일이 제 일이기도 하잖아요”
김 의장이 노동 운동에 뛰어든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97년에는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 복직 투쟁에도 선두에 섰다. 때문에 회사에서 김 의장은 이미 표적이 돼 버렸다. 현장에서의 감시는 물론,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왕따가 됐다. 팀원들은 현장 사무실 입구에 김 의장을 비방하는 현수막 3개를 내걸기도 했다. ‘우리 삶의 일터를 망하게 하는 자와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내용의 현수막이었다. 심지어 김 의장은 자신을 비방하는 현수막 앞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자택감시와 미행이었다. 감시는 2009년 3월부터 시작됐으며, 몇몇 활동가들은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아 놓기도 했다.
“가장 불안하고 힘들었던 것은 자택감시였어요. 남편이 새벽에 현장 조합원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했는데, 그걸 막기 위해 감시를 하는 것 같았어요. 새벽 5시 쯤 베란다 문을 열고 내다보면 놀이터 쪽에 직원 한 사람이 지켜보며 서 있어요. 남편이 집 밖으로 나가면 그 직원은 곧바로 남편의 뒤를 쫒곤 했죠. 그걸 보면 너무 불안해요. 딸이 2명이 있는데, 아이의 귀가가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남편도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으니 또 그런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됐어요. 생각해보면, 미행과 감시가 단순히 남편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족들에게 압박을 주기위한 것 같아요.”
결국 미선 씨는 눈물을 흘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라고 말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랜 시간, 가족들 모두가 정신적, 경제적으로 불안에 떨었던 고통이 서려 있는 눈물이었다. 가족들이 감시를 당하고, 97년부터 8년 넘게 해고 노동자로 투쟁을 이어가는 남편을 둔 아내의 심정은 어떨까. 한 맺힌 눈물을 흘릴 정도의 고통이라면 조금이나마 불만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남편은 항상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하고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을 해요. 제 남편이 만약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저도 불만이 있었겠죠. 근데 그게 아니잖아요. 비정규직 복직 투쟁에 나섰던 것도, 저 역시 공감했던 부분이예요. 저희가 해고자로 8년을 살았잖아요. 그 심정을 잘 알 수밖에 없죠. 지금도 사회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문제가 많잖아요. 그 사람들을 보면 저도 눈물이 나요. 물론 가끔 다른 아내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저희 아파트에 직원들이 많이 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제 남편이나 저처럼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고 살잖아요.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미선 씨가 남편에게 무한한 지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의장의 활동은 미선 씨 뿐 아니라 두 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딸 역시 김 의장과 미선 씨의 활동에 큰 응원을 보내고 있다.
“큰 딸은 대학교 1학년이고, 작은 딸은 고등학교 1학년이예요. 두 딸 모두 아빠의 투쟁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아빠를 지지해요. 큰 아이가 유치원 시절, 남편이 해고를 당했거든요. 근데 제가 폐암 수술을 하고 1인 시위를 한다니까 큰 딸이 걱정이 많은가봐요. ‘엄마, 1인 시위는 안하면 안 돼?’라고 말하더라고요. 아무래도 길가에서 하는 거니까 매연도 많고 병이 악화될까봐 걱정하는 거죠.”
지난 12일, 국회 앞에서 시작한 미선 씨의 1인 시위는 13일 경찰청을 거쳐, 15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12일에는 정몽준 의원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들은 항의서한을 통해 정몽준 의원에게 ▲현대중공업 실질적 지배자인 정몽준 의원이 경비대 심야 테러에 대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할 것 ▲경비대 심야 테러로 1년 8개월 동안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김석진 노동자에 대한 현안문제 해결할 것 ▲현대중공업이 작성한 협약서를 즉각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13일 경찰청 앞 1인 시위를 마친 후에는 경찰청에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테러 가담자 조사와, 이를 방조한 울산경찰청장과 울산동부서장에 대한 엄중 문책을 요구했다.
미선 씨의 상경투쟁은 어느새 반을 넘겼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더욱 힘든 투쟁이지만, 미선 씨의 마른 몸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도 몸이 걱정이 돼 1인 시위를 계속 해도 되냐고 묻자 “남편 일이 제 일인걸요. 정말 피켓을 드는 순간 힘이 난다니까요.”라고 웃는다. 그러고 보면, 부부와 두 딸은 험난한 과정을 겪어 오며 어느새 ‘동지’가 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