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동성애와 가부장제는 공존할 수 있을까

희생과 인내, 가부장제와 동성애의 '김수현'식 화해법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김수현 작가가 쓴 SBS의 주말특별기획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자의 긍정적 재현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청자 게시판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동성애자를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서사의 전개를 놓고서 찬반양론으로 갈라진 채 논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동성애허용법안반대국민연합’(이하‘ 동반국’)은 단순한 의견 표명을 넘어 보수 신문에 동성애 허용 반대 광고를 싣는 등 조직적으로 방송국을 압박하고 있다.

사실 그동안 TV 속에서 게이나 게이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심심치 않게 등장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편견 속에서 여성스러운 남성의 이미지로만 전유되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다루어졌을 뿐, 이성애규범적인 가족 울타리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물론 <왕의 남자>나 <쌍화점>, <후회하지 않아>, <앤티크>처럼 동성애자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흥행몰이를 했던 영화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안방극장이라고 불리는 TV가 지닌 파급력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TV가 지닌 특수성, 즉 접근의 편의성과 다양한 세대의 가족이 함께하는 동시관람 행위 유발의 용이성은 그 동성애자들이 가족의 일상 속 깊숙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욱이 김수현처럼 영향력 있는 드라마 작가라면 더할 바가 아니다.

김수현식 동성애, 가부장적 가족으로의 포용

<인생은 아름다워> 속 게이들은 더 이상 과도하게 여성스럽거나 성적으로 과잉되어 있지 않다. 대신 이 드라마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야하는 게이들의 힘겨운 삶을 동정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논란이 되는 부분은 그들에 대한 동정이 가족 구성원으로의 포용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다. 그래서 동반국은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왠말이냐”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드라마의 동성애 재현방식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인정이 혈연중심의 가족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편협한 시선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인생은 아름다워>는 가부장적 가족을 해체할 의도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동반국보다는 보다 유연하고도 관대한 입장에서 동성애자를 가족의 품에 받아들이고자 할뿐이다. 고로, 동반국과 김수현은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이상을 공유한 채 서로 다른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김수현 드라마가 늘 그래왔듯이, <인생은 아름다워> 역시 가부장중심의 대가족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30대 중반의 첫째 아들 ‘태섭’은 직업이 의사인 동성애자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가족들에게 있어 그는 늘 여자한테 차이기만 하는 어수룩한 남자이자‘ 헛똑똑’일 뿐이다. 할머니를 위시해 온 가족이 모여 그의 연애문제에 관여하며 문제점을 찾고 새로운 여자를 소개시켜 주고자 애쓰지만, 그가 동성애자일 거라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건 늘 영화 속이나 먼 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며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이니까.

태섭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채영’이 태섭 어머니의 문자를 보고 용기를 얻어 그의 집을 방문한다. 기대치 않게도 자신에게 다정한 가족의 모습에 감동받은 채영은 더욱 태섭에게 끌리면서 그와의 결혼을 통해 그 대가족, 즉 전통적인 가부장제로의 편입을 꿈꾼다. 그 가부장적인 가족의 이미지는 소극적인 태섭이 지닌 부족한 남성적 매력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태섭의 연인 ‘경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들켜 아내와 이혼한 경험이 있다. 경수의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재혼을 하라고 읍소하며 종용한다. 경수의 가족에게 있어 결혼이란 가부장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태섭과 경수가 포기하는 것은 이성과의 결혼뿐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미래의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사실 드라마 속에는 태섭의 아버지인 병태를 제외하고는 본받을 만한 가장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바람기가 많아 5번 결혼하여 본처인 할머니를 떠난 할아버지는 말 할 것도 없고, 실내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박씨는 의처증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한다. 심지어 태섭의 두 삼촌인 ‘병준’과 ‘병걸’은 마흔 살을 훌쩍 넘겼으나 가장이 되려는 욕심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드라마는 아무리 가장이 초라하고 무능력하며 때로는 폭력적이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고, 나아가 가부장적인 가족의 재생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부족한 틈은 가장을 중심으로 뭉친 가족 구성원들이 충분이 메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의 유용성이란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결함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김수현이 갈망하는 관대한 가부장제의 이상이다. 게다가 할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남은 할머니마저, 며느리에게 장남인 태섭의 결혼에 무관심하다며 가부장제 재생산에 일조해야 하는 여성의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고 핀잔을 준다.

흥미로운 점은, 결혼이 부재한 태섭의 대척점에 앞서 잠시 언급한, 결혼이 과잉되어 있는 태섭의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전근대적인 욕망으로서의 일부다처제에 충실했던 할아버지는 이제 다시 본처에게로 돌아가고자 한다. 병태가 가부장으로 있는 대가족으로 회귀하고자 하고 그 관대한 가부장은 어린 시절 가족을 버렸던 아버지를 품 안으로 보듬는다.

병태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 태섭과 아버지는 모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보다는 개인적 욕망만을 추구했고 또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도 조금 다른 건, 적어도 아버지는 가부장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 즉 자식을 낳았다는 것 때문에 관대하게 대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가부장제가 지닌 재생산에 대한 욕망은 첫째 딸‘ 지혜’의 의도하지 않은 둘째의 임신을 중심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가시화된다. 낙태를 결심한 지혜를 설득하기 위해 가족들은 부단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은 결실을 얻는다. 오직 지혜의 ‘철없는’ 딸만이 동생이 생기는 것을 반기지 않을 뿐이다.

동성애자를 부정하는 것은 가족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

그렇다면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재생산이 불가능한 게이커플에게도 그 관대함의 손길이 닿을 수 있을까?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인정은 관대한 가부장제가 자기모순에 빠져버리는 선택은 아닐까? 아니, 동성애자를 품에 안지 못하는 가부장제를 과연 관대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김수현은 가부장제와 동성애자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최근 김수현 드라마는 급진적이고 자극적인 전개를 선택했지만 결과는 다소 타협적이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불륜은 결국 실패하고 가족은 해체되었으며 <엄마는 뿔났다>에서 엄마는 독립을 원해 혼자 살게 됐으나 가족문제로 인해 끊임없이 본가로 호출되었고 끝내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렇듯 이성애규범적이고 혈연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인은 그 견고한 가족구성의 논리에 위배되는 사적인 욕망에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걸 수는 없다.

실제로 서양에서의 커밍아웃이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반면에, 한국과 같은 유교 국가에서의 커밍아웃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한다는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의무가 바로 가족 구성원의 재생산이다.

따라서 동성애자인 태섭이 괴로운 이유는 그의 말처럼, 자신이 남과 다르게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가족)을 속이고 있다는 것, 즉 마치 재생산이 가능한 이성애자 아들인 척 행동하는 것이다. 그가 솔직해지는 순간, 불륜과 폭력조차 한두 번쯤 용서해줄 정도로 관대한 가부장에게마저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던 태섭은 결국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고는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반복한다. 그 속죄의 행위는 장남으로서의 의무 이행이 불가능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책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태섭은 ‘아버지가 죽으라면 죽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집(가족)을 잠시 떠난다. 그가 (불륜과 폭력을 모르는) 아무리 착하고 성실한 아들이라도 재생산의 임무가 잠재적으로라도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죽게 할 수도 있는 권력이 가부장에게는 있는 것이다. 만약 가부장이 그를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끌어안는다면, 우리가 감격해야 하는 것은 가부장의 한없이 넓은 마음이며 드라마를 통해 부각되고 고양되는 것은 한없이 관대한 가부장의 힘이다.

한편 부모는 남의 일로만 알던 일이 자신에게 닥치자 어찌할 줄 몰라 눈물만 쏟아낸다. 그리고는 사회적 편견이 만만치 않은 이곳에서 우리 가족이라도 태섭을 품에 안아야 한다고 이내 다짐한다. 태섭 아버지 말처럼, 부모란 자식이 흉악 범죄를 저질렀어도 친구 잘 못 만났기 때문이라며 자식 편을 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태섭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게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지적 숙고에서 오는 이성적 수용이 아니라 ‘결함’ 있는 ‘우리 아들’에 대한 정서적이고 무조건적인 포용이다.

김수현은 이미 ‘머리’로만 이해하는 척 하는 지식인 계층, 혹은 상류층의 위선을 경수 부모를 통해서 줄곧 고발해왔다. 대학교수로서 진보적 지식인인 경수의 아버지는 차이를 인정해야 된다는 평소의 지론을 포기한 채 동성애자 아들을 경멸한다. 아마도 경수 아버지는 태섭 아버지에 비해 동성애에 관한 정보를 훨씬 많이 습득하고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남의 일로만 알고 있던’ 동성애자 자식의 커밍아웃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 이외의 가족은 태섭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대가족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김수현에게 있어 그것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태섭의 막내 삼촌 병걸과 지혜의 남편 ‘수일’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태섭을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태섭의 어머니는 호모포비아로 밝혀진 병걸과 수일에게 태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집에서 나갈 것을 종용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요건이란, 다른 구성원의 결함을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가부장의 관대함을 닮아있거나 닮고자 애쓰는 모습이다. 따라서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은 결함이 있는 태섭이 아니라 그 결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병걸과 수일이다. 수일은 논리 정연한 지혜의 강요를 통해 감정적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이성적으로는 태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병걸은 아버지의 한을 담은 주먹 한 방을 얻어맞고야 겨우 마음을 돌린다. 여기에서 가족 구성원에게 휘두르는 가부장의 폭력은 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극한적 표출이며 그로 인해 합리화되는 착한 폭력이다.

김수현이 가부장에게 요구하는 자세란, 가부장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동성애조차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무한한 인내와 무한한 희생정신이다. 김수현에게 있어, 그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동성애자들이 가부장제와 공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해 보이는 해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진보적인 정치의식에 기반 한 학습이나 캠페인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지우기보다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 중에 동성애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점차 확장해 나가는 것이 동성애에 대한 인식 개선에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이다. 적어도 김수현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가부장제라면 그것은 충분이 가능할 것이다.

김수현은 참 영리하다.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않고서 가부장적 가족이 긴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방법을 잘 안다. 고인 물 같은 동반국은‘ 대탐소실’하지 않도록, 혹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도록 유연한 김수현의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 지금 당장 동성애자를 가슴으로 이해하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말 가족이라는 이상을 잃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동성애자를 부정하는 건, 멀리 보면 곧 가족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 7-8월호)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인권재단 사람의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0. 7-8월호에 실린 글이다.

  • 쯧쯧

    그걸 또 왜 가부장제와 연관시키냐 아무대나 갖다부치기는쯧쯧 ..니들이 홍대에서 이태원에서 밤새도록 춤이나추고 광란이나 벌이는시간에 노동자들은 쇠먹고 먼지먹으면서 피땀흘리며 살아가고 있다 부르조아 녀석들아 쯧쯧..한심한 것들.. 에이 퉤 . .

  • ㅉㅉㅉ

    물론 가부장제와 가족이라는 개념에 가둬놓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노동자주의에 갇혀 여전히 스탈린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이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함.
    오히려 피땀흘리며 부르주아적 삶을 동경하고 있는 노동자들보다 기본적 인권에 대해 부르짓고 있는 이들이 더 휴머니스트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 쯔쯔쯧

    쯧쯧 무식한 거 티내냐? 성소수자들도 일터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 이태원 홍대에서 술 한잔 사먹으려면 일을 해야한다 이말이다. 세계 어딜가도 성소수자 이슈는 진보냐 아니냐를 가리는 중요한 사안으로 취급되는데 너 같은 개량주의자는 아마 알려고도 하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