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다중과 제헌권력을 분리시킬 것인가 연결시킬 것인가

『공통도시』의 두 가지 의문점(조원광)에 대한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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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도시』에 대한 조원광의 진지한 문제제기는 역사이해의 차이에 대한 비판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중과 제헌권력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개념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차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그것으로 귀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 두 개념, 특히 이 두 개념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둘러싼 쟁점을 먼저 검토하고(1~4) 이에 기초해서 조원광의 역사적 문제제기에 대해 비판적으로 응답(5~8)하고자 한다.

먼저 이 문제제기의 근저에 깔려 있으며 역사이해의 차이를 규정하는 정치철학적 개념의 차이를 드러내보자. 그것은 다중과 제헌권력의 관계에 대한 좀더 분명한 규정을 요구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의 구절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헌권력과 다중은 차라리 서로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의 말처럼 다중이 “잡종적 집단”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출신이 다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다중이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특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면서 협력하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중의 힘은 하나의 안정적 제도를 성립시키는 힘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정 질서가 안정화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해체의 힘이자, 무한히 반복되는 구성의 힘일 것이다. 반면 제헌권력은 어떤 필요에 의해 이 다중의 힘을 하나의 질서나 제도로 모아내고 이를 통해 기존 권력에 저항하는 힘의 작동 양상을 지칭할 것이다. 항쟁파가 점차 감소하는 사람들(다중)의 힘을 최대한 보존해서 투쟁을 끌어나가기 위해 체계화된 조직과 질서를 세우려했던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조원광은 다중을 제헌권력과 개념적으로 분리시키고 서로 다른 양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양자를 대립하는 관계 속으로 끌고 간다. 제헌권력이 ‘다중의 힘을 하나의 질서나 제도로 모아내는 … 힘의 작동양상’이고 다중이 ‘하나의 안정적 제도를 성립시키는 힘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정 질서가 안정화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해체의 힘’이라면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중의 정의에 덧붙는 ‘구성의 힘일 것’이라는 표현이나 제헌권력의 정의에 덧붙는 ‘기존권력에 저항하는 힘’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정의들을 해치는 췌언(贅言)으로 심지어 방해요소로 기능한다. 나는 다중과 제헌권력을 대립시키는 이러한 생각이 다중과 제헌권력의 내재적 결합관계에 대한 부정이며 두 개념 모두를 취약하게 만드는 논리라고 생각한다.

1. 다중은 무엇보다 존재론적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계의 원리적인 다수성을 지칭한다. 이 수준에서 다중은 자연, 인간, 도구(기계) 등 다양한 개체들의 접속, 이접, 연접의 과정이다. 존재론적 다중은 5월항쟁이나 6월항쟁 혹은 촛불봉기 등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비로소 추상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할 수 없는 부정관사적 삶에서, 그것의 일상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의 다수성을 통해서 직관될 수 있는 것이다. 다중의 다른 수준들은 이 존재론적 수준에 기초하며 또 이것에 포함된다.

2. 사회적 수준에서의 다중은 역사적으로 재구성되는 다중이다. 이 수준의 다중에서 우리는 다양한 힘들 사이의 반복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 다중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형식 하에 놓인 것으로 파악된다. 노예, 농노, 임금노동자들은 주권형태 하에서 질서화되고 주권에 포섭되어 있는 역사적 다중의 수동적 형상들이다. 이러한 형상들 속에서 다중의 힘은 주권을 재생산하는 회로를 따라 흐른다. 우리가 흔히 다중의 사례로 이야기하는 탈근대적 다중도 사회적 수준에서 이 수동적 형상이 표현되는 역사적 형태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회적 수준에서의 이 탈근대적 다중이 존재론적 다중의, 주권에 의한 수동적 조직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근대적, 근대적 다중들에 비해 존재론적 다중의 형상에 더욱더 접근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양성의 증대 외에 자유의 증대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노예에 비해 농노가, 농노에 비해 임금노동자가 더 큰 다양성과 자유를 갖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사회진보의 효과로 보이고 또 흔히 그렇게 파악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다중들의 부단한 투쟁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수준에서의 다중이 존재론적 다중의 조직화인 만큼 그 속에 이미 정치적 다중의 계기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세 번째 다중은 정치적 수준의 다중이다. 다중의 정치적 형상은 주권에 포섭되어 있는 사회적 수준의 다중에서 출발하면서도 주권질서에 대항하는 자기가치화와 자기조직화의 힘이 드러나는 순간에 가시화된다. 이 때 다중의 존재론적 활력은 낡은 세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정치적 힘으로, 요컨대 제헌권력이라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물론 제헌적인 것은 이 특정한 순간의 정치적 다중만이 갖고 있는 성격은 아니다. 잠재적으로는 존재론적 다중과 사회학적 다중도 이미 제헌적/구성적(constituant)이다. 존재론적 다중은 자연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구분하기 전의 삶, 즉 부정관사적 삶을 제헌/구성하며 사회적 다중은 역사적 사회를 제헌/구성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다중이 이 수준의 물질적 다중들과 다른 점은 존재론적 다중과 사회학적 다중 속에서 그것에 내재하고 있는 특이한 제헌적/구성적 힘들을 정치적으로 현실화하고 그것에 특정한 정치적 형태를 부여하는 힘(‘형식부여적 불’)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새로운 유형의 헌법을 구성하며 새로운 유형의 제도를 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유형의 권력 형태를 창출하는 권력으로서의 제헌권력이다. 주권형태는 제헌권력의 이 힘을 제정된 권력(pouvoir constituė)과 제헌하는 권력(pouvoir constituant)으로 분화된 적대구조 속에 편입하여 두 개의 권력이 있는 듯이 보이게 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제정권력이 유일한 권력처럼 보이게 만드는 환등상적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제정권력은 제헌권력의 사물화된, 죽은 양태에 지나지 않으며 제헌권력의 움직임에 뒤따르며 그것의 생명력에 울타리를 치고 각질화하는 외피형태이다. 제헌권력이 뚜렷이 가시화되는 것은 사회적 다중이 이 외피형태의 부적실성과 사물성에 저항하면서 생명의 새로운 구성요구를 제기할 때, 즉 사회적 다중이 자신의 존재론적 요구를 정치적으로 제기할 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헌권력은 정치적 양태 속에서 나타나는 다중의 형상, 즉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다중이다. 정치적 다중은 존재론적 다중과 사회적 다중을 함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다중은 사회적 다중과 정치적 다중을 함축하며 사회적 다중도 한편에서 존재론적 수준, 다른 한편에서 정치적 수준을 함축한다. 이렇게 세 가지 수준의 다중은 서로를 함축하면서 자연사와 세계사의 동력으로 나타난다.

4. 제헌권력이라는 용어는 제헌-구성이라는 과정적 개념과 권력이라는 실체-주체적 개념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용어이다. 프랑스어 pouvoir constituant에서 constituant은 constituer의 현재분사, 능동적인 현재진행형이고 그것은 멈춤 없는 과정을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헌권력을 제도, 질서를 중심으로 읽는 것(‘다중의 힘을 하나의 질서나 제도로 모아내는 … 힘의 작동양상’)은 제헌권력을 ‘제헌/구성’없는 ‘권력’으로만 읽는 것을 의미한다. 제헌권력에서 제헌과 권력은 분리불가능하다. ‘제헌/구성’이라는 술어는 ‘권력’을 영구적인 변동 속에 놓여 있는 과정적 제도, 영구혁명적 제도, 혁신을 본질적 계기로 삼는 제도로 만들기 때문이며 ‘권력’은 ‘제헌’을 관념적 과정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에 대항하는 감각적 대상적 과정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제헌권력이 pouvoir인 한에서 그것은 제도 없는 과정을 지칭하지 않는다. 제도화는 제헌권력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이 점에서 제헌권력은 반제도주의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제헌권력의 제도화를 질서화(ordering)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질서화는 외부로부터 물질에 부과되는 형식이자 틀임에 반해 제헌권력의 제도화는 물질성의 내적 요구, 즉 자기조직화의 표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점에서 조원광이 광주의 제헌공동체를 ‘자치질서’라고 개념화할 때 그것은 내가 비교적 세심하게 구분한 ‘주권적 질서/제헌적 제도’의 구분을 흐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권력의 제도 역시 표면에서는 질서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어떤 안정성도 갖지 않는 질서, 다중의 특이성의 폭발과 흐름에 의해 매순간 규정되고 변형되는 질서, 일종의 반(半)질서 혹은 비(非)-질서일 것이다.

이상의 정치철학적 논의를 갖고서 이제 5월 항쟁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가자. 조원광은 다중과 제헌권력을 서로 다른 양상으로 뿐만 아니라 대립적 양상으로 다루면서 5월 항쟁의 초기를 후기와 대비시킨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다중의 활력’은 저자가 제헌권력이 작동한다고 지적한 국면들 보다는 항쟁 전반기에 더 잘 나타나는 듯하다. 만약 다중이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며 자율적 구성력을 발휘하는 대중의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모습은 안정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항쟁 초기에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택시기사들은 차량시위를 조직하고, 상인들을 김밥을 쌌다. 각각의 주체는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의 구성을 시도했다. 무질서 상태였다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나름의 능력과 색체로 여러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기에, 그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제도나 질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택시 기사들의 차량시위와 학생들의 가두시위,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의 헌혈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각각의 질서가 연계되면서 예상치 못한 힘이 만들어졌다. 다중은 전반기 항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제도나 질서로 정돈되지 않는 무수한 힘의 분출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저자가 지적하는 5.18에서의 제헌권력의 작동은 차라리 이런 다중의 활력이 감소하면서 나타난 현상처럼 보인다. 22일 이후 다중의 활력은 급속히 감소한다. 내부에서는 수습위원회가 전통적 공동체를 부활시키려 하고, 외부에서는 계엄군이 ‘독침사건’ 같은 공작으로 내부 신뢰와 소통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항쟁파의 제헌권력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투쟁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작동했다. 무기를 고수하고 투쟁을 지속하려 한 것은 분명 영웅적 결단이었지만, 그것은 다중의 활력 감소라는 열악한 수세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제헌권력과 다중을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5.18의 혁명적 정신을 표현하는 두 가지 주체를 발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질서와 조직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제헌권력의 양상은 보여주지만 다중이라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항쟁 후기 시민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일한 질서나 제도로 정리될 수 없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지녔고 그런 의미에서 다중이라 불려 마땅했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었던 항쟁 전반기의 광주 민중들일 것이다.’ 나는 항쟁 초기에 개헌권력과 혼재하고 심지어 그것에 포섭되어 있었던 제헌권력이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정립을 계기로 독자화된다고 말했다. 나의 시각에서 제헌권력은 개헌파와의 협정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독자화되는가의 차이를 갖지만 항쟁의 전 기간을 횡단한다. 반면 조원광의 시각에서 항쟁의 초기는 다중의 형상으로, 후기는 제헌권력으로 변별적 주체개념으로 포착된다. 이제 이러한 이해의 차이가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5. 조원광은 다중이 “전반기 항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제도나 질서로 정돈되지 않는 무수한 힘의 분출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이유로 5월 18일에서 21일까지를 다중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내가 “제헌권력이 작동한다고 지적한 국면들”이라고 본 항쟁 후기는 오히려 “다중의 활력이 감소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파악함으로써 다중과 제헌권력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나의 개념틀 속에서 항쟁의 후기는 제헌권력의 ‘독자화’의 시기이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다. 제헌권력은 5월항쟁 초기에서뿐만 아니라 후기에서도 작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5월 항쟁에서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출현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5월 항쟁 이전에 제헌권력은 호헌세력의 압도적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5월항쟁 초기에는 개헌파의 정치적 영향 하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원광이 말한 대로, 초기 투쟁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학생들의 바리케이드전, 운전사들의 차량경적시위, 주부들의 김밥과 물 보급투쟁, 젊은 여성들의 보도블록깨기 등등. 그러나 투쟁형식들의 이 다양성이 초기 항쟁에서 개헌파 경향의 정치적 우세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초기 항쟁은 비상계엄해제 요구와 김대중 석방 요구를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었고 그것을 넘는 잠재적 요구들은 아직 형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중기의 시민학생수습위원회 국면에서도 제헌권력은 개헌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지식인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우리에게 5월이 ‘민중’항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중의 제헌권력은 개헌파의 헤게모니 하에서 급성장하여 개헌파적 수습에 대한 대항과 연속된 궐기대회를 동력으로 (호헌파로부터는 물론이고) 개헌파로부터도 아주 짧은 시간에 독자화한다.

6. 이 독자화의 결과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로 나타났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 대해, 오늘날 다중의 구성과 경향에 비추어, 혹은 다중의 이상적 형상을 가지고 그것의 경직성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의 비판은 관념폭력적인 것이다. 당시의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역사내적 생성과 발전 속에서, 그리고 그것의 실제적 경향 속에서 문제가 고찰되어야 한다. 수습파로부터 독자화한 항쟁파, 즉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외관상 ‘다중의 활력’의 감소라는 국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다중의 활력의 감소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개헌파가 항쟁의 중단과 정치적 실리 추구라는 뚜렷한 노선(계엄군과의 협상과 타협을 통한 희생자 축소와 이 과정의 성공을 통한 대 민중 헤게모니 장악)을 가지고 등장했다는 사실, 그래서 민중-다중 내부에 뚜렷한 분화가 나타난 것의 결과이다. 양적으로 보면 투쟁의 전체적 에너지는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질적으로 보면 투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면서 정치적으로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조원광이 말한 ‘질서와 제도’에 상응하는 것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기보다 수습위원회였다. 그것은 다중들의 기를 꺾고 투쟁을 접고 협상 이외의 모든 투쟁형태뿐만 아니라 투쟁의 경향과 노선들까지 폐기하려는 억압적 질서이자 제도형태로 발전해 갔다. 항쟁파는 오히려 이 수습위원회가 구축하려는 억압적 질서와 제도가 ‘안정화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해체의 힘’으로 등장했다. 다중은 다양(多樣)의 질이지 다양(多量)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복수적 특이성들이다. 특이성들, 괴물들, 유령들의 출현이야말로 정치적 수준에서 다중의 제헌적 힘의 실재를 보여주는 직접적 징후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그것이 주어진 문제(항쟁의 중단과 수습인가 항쟁의 지속과 확산인가)에 대한 다른/특이한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중적인 것이며 제헌적인 것이다. 궐기대회는 5월항쟁에서 출현한 다중의 평의회였다. 우리는 물론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이상화할 수 없다. 그것이 근대국가적 구조를 모방하고 총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역사적 한계를 표현하는 것이지 오류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또 비다중성을 증언하는 징표일 수도 없다. 당대의 정치적 다중화는 사회적 수준의 다중화, 다시 말해 사회적 생산의 발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대의 다중의 정치적 자기조직화의 역량들, 수단들, 사상들은 비록 폭발적 변화의 와중에 있다할지라도 당대의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도달한 수준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 초기 항쟁이 전통적 지역공동체와 맺고 있었던 연관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항쟁이 지역공동체에 의해 시동(『공통도시』 72쪽)되었다고 보았지만 그것이 추진력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지역공동체의 주변인들(marginals)이 시종일관 항쟁의 추진력이었음을 강조했다. 지역공동체는 이런 의미에서 항쟁의 첫날부터 해체되고 있었다고 보는 조원광의 관점은 나의 견해에 대한 이견일 수 없다. 특히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지역공동체의 극복과 해체가 없었다면 다중의 정치적 독자화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것이다. 이 측면에서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의 구축이라는 역사적 새로움을 현시했다.

8. 항쟁초기를 다중의 양상으로, 항쟁 후기를 제헌권력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조원광의 시도는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까? 첫째 제헌권력 개념을 일종의 질서 개념으로 환원하면서 다중과 대립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폐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 다중을 제도화, 조직화와 대립적인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다중의 자기제도화, 자기조직화가 정치적 공통체(commonwealth)를 구성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초기 항쟁들이 보여주는 투쟁형식의 다양성들은 극히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정치적 경향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항쟁이 시민학생수습위원회의 개헌파 정치노선으로 신속히 종합되어갔던 것은 그것을 증거한다. 항쟁파의 출현과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구축은 실질적인 정치적 다양성으로의 진화이지 존재했던 정치적 다양성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개헌파적 요구를 넘어 삶과 존엄이 정치적 요구로서 제기되는 분기점이었다. 27일 새벽의 결사항전은 삶의 존엄을 건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출현을 다중의 제헌권력의 표현이 아니라 다중으로부터 제헌권력의 분리정립으로 보는 것은 5월항쟁의 핵심(다중의 제헌권력의 독자성), 그것의 세계사적 의미(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다중) 모두를 흐리게 만들 위험한 해석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출현이야말로 항쟁 전체의 전개과정에서 초기 항쟁의 다중성을 실제적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헌파와의 투쟁 속에서 그것의 정체를 폭로했고 호헌파와 제헌파로 구성된 경합하는 제정권력들의 헤게모니를 거부하면서 제헌권력의 뚜렷한 독자화와 분화(다중적 특이성)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초기와 후기를 분리시키고 제헌권력적 양상(후기)과 다중적 양상(초기)를 이원화시키는 것은 독자적 조직화와 제도화의 노선을 모색하는 다중의 정치적 결정 과정(과 그 필요성)을 다중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다중 개념을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수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 만들 위험에 노출된다. 우리는 현대 유럽의 주요한 정치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비판적 입론을 ‘다중 개념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비판 위에 세우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다중으로부터 제헌권력을 분리시킴으로써 조원광은 이러한 비판들이 겨냥하여 맞추기 쉬운 표적을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중과 제헌권력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내재적 연관을 사고하는 데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