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 의지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호헌, 개헌, 제헌이 그것이다. 호헌은 주어진 질서와 제도를 지키려는 움직임이다. 제정된 질서와 법을 지키고 이에 근거해 권력을 행사한다는 면에서, 이는 ‘제정권력’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제헌은 새로운 질서와 제도를 창안하는 움직임이다. 저자는 이런 경향을 ‘다중’의 고유한 특성으로 보고, ‘제헌권력’이라 칭한다. 개헌은 기존의 질서를 변형시키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을 유지/보수한다는 점에서 ‘제정권력’의 일종이다.
저자가 무엇보다 경계하는 것은 5.18을 제헌권력이 아닌 제정권력에 기초하여 파악하려는 시도들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났고, 그에 대한 수많은 기억과 기념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주도권을 행사해온 것은 제정권력의 일종인 개헌적 입장이었다. 5.18을 아예 부정하려 했던 호헌적 입장(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 등)은 민중의 저항에 밀려나 버렸지만, 개헌적 입장은 5.18을 국가 정상화 운동 혹은 민주화 운동으로 정의함으로써 민중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에 따라 5.18은 대한민국 주권을 보다 더 좋은 것으로 변형하고 보완하려 한 움직임으로 자리매김했다. “5월 사건은 민주화 운동으로 법인 되었다.”(43)
하지만 5.18은 국가 정상화 운동으로 한정될 성질의 사건이 아니었다. 저자가 보기에 5.18을 특징짓는 것은 제정권력(개헌)이 아니라 제헌권력이다. 그것은 국가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가를 넘어선 질서의 체계를 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수많은 배경과 정체성을 가졌던 “잡색의 다중”이 상호 소통하면서 국가를 벗어나 스스로 질서를 창출하려 했다. 저자는 특히 전남도청 수복 이후 “5월 22일~27일 사이에 나타났던 자치공동체”(46)에 주목하고, 그 중에서도 끝까지 항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위 ‘항쟁파’와 ‘시민군’이 제헌권력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야 말로 주권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치를 지켜내려 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통도시』에서 묘사하는 5.18은 단순한 비극이나 참사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모든 제정된 질서 밑에서 꿈틀대고 있는 제헌권력을, 즉 운동의 근본적 동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렇기에 5.18은 1980년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복되고 있으며 반복되어야 한다. 조정환은 5.18을 재발되어서는 안 될 참극으로 명명했던 개헌주의적 해석을 넘어, 5.18을 다중의 본질적인 능력을 보여준 사건으로 정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다시 불러오려 시도한다. 87년 항쟁에서부터 2008년 촛불시위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계열을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건들이 모두 다중의 제헌권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5.18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두 가지 의문점
요컨대 조정환은 5.18을 국가적으로 기념되는 과거가 아닌, 오히려 국가적 질서에 저항하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었던 제헌권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지금도 꿈틀대며 나타나는 현재적 에너지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런 저자의 기획에 십분 동감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먼저 과연 항쟁파를 중심으로 파악된 5월 22일 이후의 자치공동체가 조정환이 제시하는 ‘제헌권력’과 ‘다중’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제헌권력은 새로운 제도를 창안할 수 있는 다중의 역능이다.(174) 저자가 광주를 제헌권력의 이름으로 부르는 까닭은, 항쟁의 주체들이 주권을 거부하고 자치질서를 구축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5월 22일 이후의 광주의 자치질서를 구축한 것은 항쟁파 만이 아니었다. 자치질서의 구축에는 조정환이 ‘개헌파’로 분류하는 수습위원회의 역할 역시 컸다. 비록 수습위원회가 총기 회수와 대외 협상에서 항쟁파와 의견이 달랐지만, 그들이 총기를 회수하는 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활동에는 장례식이나 정보체계 확립 등 ‘자치질서의 확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22일 이후 자치질서의 확립은 개헌적 움직임의 결과물인가, 제헌적 움직임의 결과물인가?
항쟁파 역시 저자가 제시하는 다중의 제헌권력에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는 것 같다. 분명 항쟁파는 총기 회수를 거부하고 무력 사용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수습파와 구분된다. 하지만 그것을 다중과 제헌권력의 증거로 읽기는 어려워 보인다. 조정환 스스로 지적하는 것처럼, 총기 회수 거부가 <시민군>과 <총을 들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구분을 부각시켰다는 점을, 그럼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일정부분 저해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저자가 설명하는, 폭력조차 협력과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표현되는 다중의 제헌권력과는 분명한 거리를 가지는 듯하다.
다중의 자율적 역량을 보다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국면은 차라리 5월 18일부터 5월 21일 도청이 함락될 때까지의 기간일 것이다. 광주항쟁의 전반기는 단순히 지역공동체가 작동했던 기간이 아니다. 오히려 해당 기간은 사람들이 전통공동체에서의 역할이나 기존의 정체성에서 단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등학생이 시위에 동참하고, 시장 상인들이 김밥을 싸서 나눠주며, 성매매 여성들이 헌혈에 나서는 일은, 전통적 공동체의 작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은 고등학생이 전통적 학생의 지위에서 벗어나고, 상인이 이윤을 남기는 기존의 역할에서 이탈하고,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단절함으로써 가능했던 일들이다.
이처럼 기존 정체성이나 역할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으며, 이들의 연계는 공수부대를 몰아낼 수 있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하나의 정체성이나 지위에 얽매일 때, 사람들의 능력은 억압된다. 특정한 역할 이외의 다른 행동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으로부터 단절할 때, 사람들은 전에 없던 힘을 발휘한다. 항쟁 초기 리더들이 부상하는 모습에서 이를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항쟁 초기의 리더들은 전통적 공동체의 관점에서는 리더라고 보기도, 리더가 되기도 어려운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초기 선무 방송을 주도하여 투쟁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던 전옥주는 신원이 불명확한 30대 여성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대담함과 남다른 언변은 그를 단숨에 광주의 ‘수괴’자리에 올려놓았다. 전옥주만이 아니다. 리더로 알려지지도, 이름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수많은 리더가 등장하고 사라졌으며, 각지에서 투쟁을 이끌었다. 몇 가지 증언을 살펴보자.
“공수부대가 우리 부모 형제들을 학살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전두환의 집권을 쳐부숩시다. 전두환이를 쳐부숩시다.” 나의 외침에 시민들은 너나할것없이 트럭에 올라탔다.(현사연, 216쪽, 최치수 증언)
‘....최루탄 가스가 사라지고 다시 몰려들게 되자 내가 시민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데모는 우리가 했는데 저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데모대들이 차를 대라고 해서 차를 댔고, 최루탄을 쏘니까.......앞으로 데모하지 않는다고 협상하러 갑시다......공수대 지휘관으로 보이는 대위에게 말을 걸었다.’(현사연, 656쪽, 김승철 증언)
* 현사연이라 표시된 것들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1990년에 발간한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을 가리킨다.
첫 번째 증언자인 최치수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어떤 고등학생’의 외침이 사람들을 싸우기 위해 트럭에 올라타게 했던 것이다. 김승철은 당시 20살의 운전기사로서, 나이로나 신분으로나 아니면 ‘이념’으로나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라고 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지만, 사람들을 설득해 공수부대 지휘관과 협상을 시도한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며 ‘외치고’, 그것이 설득력을 인정받으면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상황. 이는 사람들이 기존의 역할을 넘어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을 마련했고,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촉발했다. 그 안에서는 모두가 (잠재적) 주모자요 리더였다. 그리고 이런 광주 민중(혹은 다중)의 네트워크는 공수부대가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한쪽을 진압하면 또 다른 쪽에서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발전했다. 말 그대로 잡색의 다중의 역량이 마구 분출하던 때였던 셈이다.
하지만 도청을 수복하고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진 5월 22일 이후의 상황은 오히려 이런 거대한 다중의 흐름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치를 확립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것이 실행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신원증명’이 요구되었다. 아래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학생증을 보여주며 도청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도청에 들어가서는 지휘자부터 찾았다. 젊은 청년 한 명이 나왔다.....꼬치꼬치 캐물었더니 그제서야 재수생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바로 김원갑이다. ‘이 문제는 재수생이 앞장서서 해결될 것이 아니다. 대학생이 먼저 민주화시위를 했고 지금의 상황도 그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재수생이 네가 책임자로 일을 수습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학생지도부가 정식으로 구성될 때 까지 내가 일을 맡아보마.’....학생대표가 되었다.(현사연, 203쪽, 김창길 증언)
5월 22일 전에는 누구도 리더에게 신원이나 지위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재수생이 문제가 되고 대학생이 나타나 권력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전반기의 리더였던 전옥주가 신원문제로 계엄군에게 넘겨진다. 5월 22일 이후 일어난 ‘수습’과 ‘자치’의 이면에는 전통적 공동체와 기존의 정체성이 복귀하는 과정이 존재했다. 이것이 전반기 투쟁에 존재했던 자발적/자생적 힘들을 억압했음은 물론이다.
물론 항쟁파는 이런 ‘수습’과 ‘자치’에 저항했던 이들이다. 수습위원회의 명망가들이 대부분 도청수복 과정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던데 반해 항쟁파 대부분은 전반기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항쟁파는 분명 ‘다중의 폭발적 역량’을 가슴 깊이 느끼고 이를 계속 이어가려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다. 군사적으로 패배가 분명한 고립상황에서 다시 전반기와 같은 열기를 되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반기의 폭발적인 국면을 없었던 것으로 치고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전반기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다. 아마도 이들에게 총을 내려놓지 않는 행위는, 설령 죽음의 위험에 처할지라도 전반기 투쟁의 기억을, 다중의 활력의 분출을 잊지 않으려는 고독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영웅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다중의 분출하는 힘을 표현하는 것과는 분명한 거리를 가진다. 오히려 그것은 다중의 역량이 사그라지는 수세적 국면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이어가려 했던 방어적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만약 저자가 5.18의 구성적 힘을 보고자 했다면, 5월 22일 이후보다는 오히려 항쟁의 전반기에 주목하는 것이,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후반기의 자치와 항쟁을 살피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나아가 보다 근본적으로, 제헌권력과 다중이 동일한 양상을 포착하는 개념인지 의심스럽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 다른 양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앞서 말했듯이 조정환은 제헌권력을 “새로운 제도를 창안할 수 있는 다중의 역능”(174)으로 정의한다. 만약 제도나 질서의 형성이 제헌권력의 핵심이라면, 저자가 항쟁 전반기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항쟁 초기에 안정적 제도나 질서의 창출을 목격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거꾸로 저자가 22일 이후 항쟁파나 시민군에 주목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항쟁을 이어가려 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안정적 질서와 조직을 창출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다중의 활력’은 저자가 제헌권력이 작동한다고 지적한 국면들 보다는 항쟁 전반기에 더 잘 나타나는 듯하다. 만약 다중이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며 자율적 구성력을 발휘하는 대중의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모습은 안정적 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항쟁 초기에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택시기사들은 차량시위를 조직하고, 상인들을 김밥을 쌌다. 각각의 주체는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의 구성을 시도했다. 무질서 상태였다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나름의 능력과 색체로 여러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기에, 그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제도나 질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택시 기사들의 차량시위와 학생들의 가두시위,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의 헌혈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각각의 질서가 연계되면서 예상치 못한 힘이 만들어졌다. 다중은 전반기 항쟁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의 제도나 질서로 정돈되지 않는 무수한 힘의 분출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저자가 지적하는 5.18에서의 제헌권력의 작동은 차라리 이런 다중의 활력이 감소하면서 나타난 현상처럼 보인다. 22일 이후 다중의 활력은 급속히 감소한다. 내부에서는 수습위원회가 전통적 공동체를 부활시키려 하고, 외부에서는 계엄군이 ‘독침사건’ 같은 공작으로 내부 신뢰와 소통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항쟁파의 제헌권력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투쟁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작동했다. 무기를 고수하고 투쟁을 지속하려 한 것은 분명 영웅적 결단이었지만, 그것은 다중의 활력 감소라는 열악한 수세적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제헌권력과 다중은 차라리 서로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의 말처럼 다중이 “잡종적 집단”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출신이 다양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대신 다중이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무수한 특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면서 협력하는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다중의 힘은 하나의 안정적 제도를 성립시키는 힘이기 보다는, 오히려 특정 질서가 안정화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는 해체의 힘이자, 무한히 반복되는 구성의 힘일 것이다. 반면 제헌권력은 어떤 필요에 의해 이 다중의 힘을 하나의 질서나 제도로 모아내고 이를 통해 기존 권력에 저항하는 힘의 작동 양상을 지칭할 것이다. 항쟁파가 점차 감소하는 사람들(다중)의 힘을 최대한 보존해서 투쟁을 끌어나가기 위해 체계화 된 조직과 질서를 세우려했던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제헌권력과 다중을 구분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5.18의 혁명적 정신을 표현하는 두 가지 주체를 발견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는 질서와 조직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제헌권력의 양상은 보여주지만 다중이라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항쟁 후기 시민군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단일한 질서나 제도로 정리될 수 없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지녔고 그런 의미에서 다중이라 불려 마땅했지만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었던 항쟁 전반기의 광주 민중들일 것이다. 만약 5.18을 기억하는 것이 현재의 복잡한 현실에서 저항의 침로를 모색하기 위함이라면, 각 상황의 차이와 그에 따라 상이하게 형성된 주체의 의미를 보다 세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나가며
좋은 책은 내용이 완벽하거나 반박이 불가능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반박을 이끌어내어 그 주제에 대한 광범위하고 치열한 토론을 불러오는 책이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정환의 『공통도시』는 좋은 책임이 분명하다. 저자가 제시한 내용이, ‘제헌권력’을 경유해 5.18을 설명하는 그의 시도가 모두 타당하다고 믿기 때문은 아니다. 내게는 아직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조정환의 이 책과 거기에 실린 단호한 주장이, 우리로 하여금 5.18을, 나아가 삶과 운동을 다시 사유하고 토론하도록 강제한다는 점이다. 저자의 말처럼 5.18이 다중의 활력이 분출한 사건이며 국가를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구상했던 실험이라면, 오늘날 5.18을 되살리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고, 새로운 질서를 구상하며, 서로 소통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과정에 이 책 『공통도시』가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