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007영화는 90년대 들어 주춤했다. 가장 큰 원인은 냉전의 종식이었다. 제임스 본드의 적인 소련 정보기관 KGB가 사라지자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전개되던 스토리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가장 큰 고민은 아마도 ‘적’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마케팅전략에 이상이 생기면서 제국주의의 눈길은 제3국을 향해 번뜩거렸다. 그 결과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국주의 홍보대사 제임스본드와 본드걸
007 제임스본드는 제국주의의 그것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 홍보물로 자리를 굳혔다. 가상 속에 무기들이 등장하고 화려한 액션이 흥미를 자극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는 주요하게 영국과 미국 또는 선진국의 정치적 이익을 담아내는 영화이다. 공공연하게 제3세계 및 북한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의 절대적 우위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며 선악의 개념이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자본주의는 무조건 선으로 취급되는 것에서부터 영화는 세계무대를 종횡무진하는 자본주의 최고의 선전. 홍보물이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어 억울하게 죽은 여중생 미선이와 효순이에 대한 추모열기가 뜨거울 때, 007은 ‘어나더 데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상륙했다. 이 영화는 제작할 때부터 논란이 일었던 영화이다. 대중적 인기가 절정에 올랐던 한국배우들이 캐스팅을 거부했던 사실에서 영화 내용은 짐작할 만하며 이 영화는 북한과 미국의 전쟁을 주제로 했다. 여기에서 북한의 무기들은 전부 신식 무기로 나오고 규모도 여느 특공대를 상상하게 만들어냈는데, 아마도 제국주의의 적수로 부각시키기 위해 북의 군사력을 최대로 묘사했을 것이다.
한국을 식민지로 부각시켜 내고 설정한 사찰
남과 북이 대립하는 비무장지대는 안개가 낀 초라한 통나무로 묘사하고 서울의 거리는 70년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빈곤의 그림자가 도처에 드리우며 어깨가 내려앉는듯한 느낌, 남측은 그저 주한미군이 있다는 것만 부각되고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제임스본드와 본드걸이 헬기를 타고 도망칠 때 너무 참담한 모습의 농부 두 명이 소를 몰고 가다가 폭격기에서 떨어진 자동차를 탐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신을 그려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아이슬란드는 아주 멋있는 경치를 묘사하고 영국은 세계 최첨단 기술을 자랑한다. 북에 포로가 되어 릭윤과 제임스본드를 교환할 때, 국경선에 한국은 보이지 않고, 미국 사람들만이 포로교환에 등장함으로서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러브신은 절에서 전개되는데 종교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다. 사찰은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리며 수행을 통해 일반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행하는 가장 경건한 곳이다. 잔잔한 고요와 적막 속에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고 미소 띤 부처상 앞에서 본드와 본드걸은 사정없이 벗어던지고 문란하게 묘사되는 성관계는 변태적 열정에 몰입한다. 007 다음 편에서 본드와 본드걸은 예수가 못 박혀 있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일까?
관능미의 대명사 본드걸
이렇듯, 제임스본드의 역할에 흥미를 더더욱 부추기는 데에는 조연인 본드걸을 빼놓을 수 없다. 제임스본드의 파트너인 여성상은 한마디로 천박하게 구성되어있다. 여성들의 권리나 주장은 발견할 수 없고, 남성에게 복종하고, 종속된 위치에 만족하고, 육감미를 통해 관중을 사로잡아 내는 게 본드걸의 임무이며 역할이었다.
007시리즈는 제임스본드가 일명 본드걸 들에게 다가가서 닥치는대로 육체를 탐하고 임무완수를 위해 정보를 빼낼 목적으로 본드걸에게 폭력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본드걸은 제임스본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갈망하며 그윽한 눈길을 떨어뜨리지 않았던 상황전개에서 패미니즘은 제임스본드의 오로지 성적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알몸에 남자 와이셔츠만을 걸치고 본드를 기다리는 요염한 자태로 관객들을 사로잡던 ‘실비아 드랜치’가 묘사했던 연기가 관능미는 인정받았지만 구성과 내용, 연기력과 예술성은 물론이고 여성의 가치관 설정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노출되었다.
보편적 여성상보다는 폭력과 관능미만 부각되는 본드걸, 개성보다는 육감을 부각시키는 본드걸, 제국주의적 잣대로 선과 악을 구성한 007에 본드걸은 존재이유 자체가 제임스본드에서 비롯된다. 제임스본드의 조연역할에 충실하도록 구성된 제국주의의 조연인 본드걸은 허벅지의 은밀한 부분에서 권총을 꺼내 제3세계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본드걸이 된 김연아
잔잔한 사랑이 보이지 않고 저급한 관능미와 폭력으로 문란한 환락의 기류를 질주하는 본드걸의 전면에 느닷없이 피겨스케이트장에서 연기하는 ‘김연아’가 오브랩되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예술성과 절묘한 기술에 감탄과 탄성을 자아내는 감동의 마지막 순간, 영화 007시리즈 테마곡은 크라이막스를 향해 숨 가쁘게 질주하다 멈추는 순간, 허벅지를 쓸어 올리며 예리한 눈빛으로 권총 겨누는 김연아 모습에서 감동보다는 소름이 돋는다.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예술 및 스포츠가 아닌가? 자연과 인생과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광란의 자본주의에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꿈을 안겨줄 수 있는 가치, 그 자체가 진정한 금메달이 아닌가? ‘피아노 바장조’의 선율에 따라 전쟁, 폭력과 퇴패와 향락을 상징하는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김연아에 대해 ‘실제 본드걸로 스카웃해도 손색이 없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는 제국주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패권과 지배정책에 피겨스케이팅 연기로 합류했던 김연아를 설정했다.
그 구도에 갇혀있는 김연아가 안타깝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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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노동자역사 한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