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능력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작년 12월 21일 입법예고안이 고시되고 23일까지 의견수렴을 하여 올해 1월 1일부터 숨 가쁘게 시행되었다. 그리고 시행 한 달만에 보건복지가족부는 ‘기초생활수급자, 진단서를 발급하는 의사 및 활동능력 평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로부터 제기된 문제점에 대하여 개선․보완하려는 것’으로 근로능력판정 개정안을 발표했다.
사실 근로능력판정제의 문제점은 12월 21일 고시되었을 때부터 활동능력 평가기준의 조악성과 무엇보다 인권침해적인 요소들로 인해 여러 사회단체들로부터 제기되어 왔다. 사회단체들은 12월말 기초보장관리단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몇 개월 동안만이라도 시행을 보류하고 그 동안 전문가 및 사회단체 등과의 논의를 통해 문제점을 해결하고 수급권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방향으로 안을 마련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관리단장은 그 동안 몇몇 수급자들을 대상으로 모의평가를 진행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또 이미 일선의 사회복지사들 교육이 끝났고 의사협회에도 이미 전달이 된 상태라며 단체들의 제안에 손사레를 쳤었다.
그런 보건복지가족부가 2월 10일 국가인권위의 개정 권고 결정에 대해 2월 12일 근로능력평가의 기준 등에 관한 고시 개정안을 발표하였다. 보건복지가족부가 늦게라도 개정의 의지를 보이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은 가장 문제가 되었던 활동능력 평가기준의 몇몇 표현만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해 오히려 기만적인 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한 개정 입법예고안
우선 의학적 평가기준은 오히려 더 개악되었다. 11개로 나뉜 질환에서 근로능력 완전상실 질환 항목이 모두 삭제되고, 기준들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라 진입장벽을 높이는 방향으로 강화하였다. 현재 장애재판정과정에서 장애등급을 낮추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그리고 시행 1개월 동안 동사무소에서는 수급(권)자들에게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하지도 않은 채 병원에서 진단서 대신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를 작성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기초보장관리단의 호언장담과 달리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의사들이 이를 진단서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례들이 발생하고 있어, 수급(권)자들만 중간에서 우왕좌왕하며 수급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생계위협을 받고 있다.
활동능력 평가기준은 빈곤층을 사회적 낙인화하는 인권침해 요소의 표현들만 바꾸어 놓은 수준이어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객관적인 지표로 삼겠다는 활동능력 평가기준은 ‘어설프다, 잘한다, 낮은 편, 높은 편, 보통, ~하는 편’ 등 더욱 모호한 표현들도 도배되어 있다. 국가인권위의 개정권고안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의학전문가도 아니고 심리상담전문가도 아닌 몇안되는 사회복지담당자가 수많은 수급자들을 이 기준으로 근로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사회복지담당자들의 노동강도를 더욱 강화하여 오히려 객관성을 떨어뜨릴 것이다.
그리고 시행과정 상의 문제 또한 예상대로였다. 우선 수급권리의 당사자인 수급(권)자들에게 근로능력판정제에 대한 충분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작년 초 일반수급자의 무더기 강제전환 당시에도 이 부분은 크게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충분한 설명이나 의견수렴의 절차 없이 시행된 근로능력판정제가 공문 하나로 수급(권)자들에게 이해될 리 만무하다.
의학적 평가를 해야 할 의사들에게도 근로능력판정제가 제대로 공유되지 못하여, 수급(권)자들은 근로능력평가용 진단서를 백지상태로 되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수급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생계위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 국가인권위 앞에서 근로능력판정 기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빈민단체들(2010.1.13) [출처: 빈곤사회연대] |
근로능력 유무를 타인이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문제
이번 개정안은 호박에 줄긋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부정수급자를 걸러내기 위해 근로능력을 판정한다는 이번 발상 자체는 이미 빈곤층을 노동을 원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자로 전제하고 있고, 때문에 노동이 삶의 희망이 아닌 징벌적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로 만들어진 근로능력판정제는 표현을 바꾸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폐지해야 한다.
이미 기초생활보장권리찾기행동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서 지적했듯이 근로능력 유무를 수급(권)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다. 근로능력 유무를 ‘근로의욕, 집중력, 취업가능성’등 개인에게만 물어서는 안되며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이 마련되었는지도 함께 물어져야 한다. 비슷한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어떤 노동이냐에 따라 근로능력 유무가 다를 수 있으며, 신체적 조건이 불편하더라도 노동하고자 한다면 노동능력이 있는 것이다. 즉 근로능력 유무는 수급(권)자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와 사회는 수급(권)자가 평등하게 근로능력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진정 수급권자들의 자활을 지원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기초생활보장법이 존재하고 근로능력판정제를 실시하는 것이라면, 근로장려세제 등 자활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고민되어져야 한다. 자활장려금을 삭감하는 등 수급권자들의 노동을 인정하지 않고, 최저생계비에도 못미치는 현금급여는 자활의 의지를 돕기는커녕 상실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또한 보건복지가족부는 부정수급자 걸러내기에만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400만명에 달하는 기초법 사각지대에 있는 빈곤층에게 수급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보건복지가족부의 사업방향은 이명박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보여온 가진 자들만을 위하는 정책의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친서민, 민생안정 등의 구호만 남발될 뿐 빈곤층의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죽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현 정부의 정책이며, 이번 근로능력판정제의 도입 또한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로능력판정제는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이번 국가인권위 개정 권고 결정과 보건복지가족부의 개정의지에 환영의 뜻을 전하며 다시 한번 보건복지가족부에 촉구한다. 시행 한 달째임에도 많은 문제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근로능력판정제는 당장 철회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것이 수많은 수급(권)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 만큼 더욱 합리적인 수급권 선정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10년을 맞아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평가하는 작업들도 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급(권)자, 사회단체, 사회복지담당자, 의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충분한 의견수렴과 논의를 통해 함께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초법 사각지대를 점차 해소해나가는 동시에, 합리적인 수급권 선정 방안을 함께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