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진 미국, 달라진 위상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3개국 순방이 한미정상회담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오바마는 이번 아시아 순방에서 ‘변하려는 일본’, ‘부상한 중국’, ‘떼쓰는 한국’을 각각 실감했을 것이다.
물론 미일은 미일동맹을 굳건히 유지할 것을 확인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칙적 차원에서이고 그것이 하토야먀 정권이 내건 아시아 중시 외교와는 어떤 관련성을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나 언급도 없었다. 오히려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불협화음이 끝내 불거져 나왔다. 물론 이것을 미일동맹의 전략적 변화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성급하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이 일본이 일방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것의 일단을 내비친 것은 사실이다.
오바마는 중국을 G2로 대하고 티벳과 대만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정책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이 원한 위안화 절상 문제에서는 중국으로부터 그 어떤 긍정적 언질도 받아내지 못했다. 중국은 이를 시종일관 무대응으로 응수했다. 오바마는 오히려 중국이 우려하는 보호무역에 대해 공감을 표함으로써 달라진 미국의 처지와 부상한 중국의 위상을 느껴야 했다. 중국은 오바마를 외교적으로 극진히 예우했지만 돌아가는 오바마의 손에 무엇 하나 확실히 건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은 아프간 재 파병문제를 오바마의 방한 이전에 이미 상납해 놓고, 대신에 북에 대한 자신의 ‘그랜드 바겐’ 입장을 지지해 줄 것과 한미FTA를 조속히 비준해 줄 것을 떼쓰는 모습을 보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이런 한심하고 볼썽사나운 모습과는 별개로 그 이면에는 북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해결 능력과 의지가 의심받고 있으며, 초강대국 미국이 겨우(?) 한국에게 FTA 문제를 놓고 쫓겨야(?) 할 만큼 자신의 사정이 다급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다시피 오바마는 미국발 세계공황, 이라크, 아프간 전쟁 상태, 북핵문제 미해결, 이란의 핵개발 진행 등을 안고 등장했으며 역으로 그것이 곧 집권을 하게 된 결정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마치 한국의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현재까지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미국의 약화된 패권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비록 9.11사태를 계기로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날로 후퇴/쇠약해지는 미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더구나 그를 실행하는데 드는 엄청난 비용을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다. 특히 지금의 세계공황이 미국에서 출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이제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기관차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진원지가 되어 있다.
물론 아직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미국을 대체할 헤게모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패권이 날로 약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상태를 놓고 세계 각처에서 미국에 도전하거나 미국 이후를 대비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거기에 EU가 가장 앞서 있고, 남미에서 반미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결정적 변수는 중국의 부상이다. 미국이 중국을 G2로 대하고 있는 것이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아시아에는 중국뿐만 아니라 경제 강국 일본이 포진돼 있으며, 무시할 수 없는 한국도 속해 있다. 미국이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지금 아시아 패권 장악을 둘러싸고 미, 중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대회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와중에 일본과 한국이 이후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이는 단지 아시아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지금까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는 미국 중심의 세계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 오바마의 이번 아시아 순방은 바로 이런 정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와 한미FTA
이번 오바마-이명박 정상회담의 최대 현안/의제는 바로 북핵문제와 한미FTA 문제였다. 이명박 정권과 한국의 보수언론은 일제히 오바마에게 이명박 정권의 ‘그랜드 바겐’을 지지해 줄 것과 한미FTA를 빠른 시일 안에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서도 역시 대부분 그런 성과를 거두었다는 분석과 보도를 내놓았다.
그러나 알다시피 미국 정부와 오바마는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랜드 바겐’에 대한 명시적 지지는 고사하고 이 용어 자체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오히려 보즈워스 대사를 12월 8일 북에 특사로 파견한다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정상회담 전에 청와대에서 밝힌 북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는 대목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오바마는 과거와 같은 패턴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다. 6자회담에 응하지 않는 한 북미 직접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과 달리 북으로부터 6자회담에 응하겠다는 그 어떤 확실한 언급이 없는 상태에서 사실상 북미 직접대화를 시도하겠다는 것을 시인한 꼴이다. 이로써 북에 대한 유엔 제재조치 국면은 사실상 일단락 된 효과를 낳게 되었다. 아니 이명박 정권의 ‘그랜드 바겐’ 제시가 그것의 의미나 의도를 떠나 이미 국제제재가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실효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제 다시 ‘선 핵 포기냐, 선 대북 적대정책 철회냐’를 둘러싸고, 또한 ‘6자회담이냐, 북미 직접대화냐’를 놓고 지겹고 지루한 힘겨루기 국면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동안 일관되게 유지돼온 과거의 패턴 그 자체다. 어느 한 쪽으로 저울추가 급격히 기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대, 최고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라야 미 국무부 켈리 대변인이 말하고 있듯이 “이번 북미 양자대화의 목적은 북한을 6자회담에 복귀시키고 2005년 9.19공동성명의 비핵화 의무를 재확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북핵문제, 북미관계의 시계가 2005년 9.19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오히려 두 번에 걸친 핵실험, 인공위성발사를 비롯한 미사일 시위가 벌어졌을 뿐이다. 명백히 미국 대북정책의 실패가 낳은 결과이며, 이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은 여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다.
북은 보즈워스를 평양으로 불러들이는 데 일단 성공했다. 이로써 북은 김정일 건강악화설, 후계자 구도 문제 등 온갖 악재를 딛고(?) 김정일 정권의 건재를 내외에 과시하는 효과를 먼저 거두게 되었다. 북은 지금 2005년 9.19 당시의 북이 아니다. 이미 핵실험을 거쳤으며,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사실상 확보하고 있다. 당연히 요구 조건이 상향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북은 얼마 전 프랑스와의 수교도 시도하고 있으며, 하토야마의 방북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오직 이명박 정권만이 자기도취에 빠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명박 정권도 비록 실패로 드러나긴 했지만 얼마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북 접촉을 시도했다. 남북의 의도와 의중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진정으로 북핵문제나 남북문제를 풀어보겠다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처지에서 보다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미FTA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정권이 기대와 의욕을 갖고 준비한 사안이다. 북핵문제에서는 명분을 얻으려고 했다면 이 문제에서는 실리(?)를 챙기려고 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미FTA 반대 목소리는 씻은 듯이 조용한 상태에서 한국이 오히려 미국을 향해 비준을 촉구하는 주장만이 온통 떠들썩하기 때문이다. 마치 한미FTA가 한국에게 매우 유리한 것인 양 둔갑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도 한미FTA를 단지 통상문제의 하나로 취급하였으며,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분야에서는 한국이 유리하고, 농업/서비스 분야에서는 불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위해 불가피하거나 반드시 필요한 것이란 논리와 주장을 편 바 있다.
또한 반대 진영의 경우에도 이를 반미 차원에서 대하는 세력과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손해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지금 한미FTA를 반대하는 투쟁이나 경계하는 목소리가 현저히 떨어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한미FTA를 반대해야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그것이 신자유주의를 더욱 노골화/전면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일부 자본에게는 유리/필요하지만 노동자 민중에게는 더욱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즉 한미FTA 반대는 반자본주의에 기초할 때 그 의미가 있으며 지속적인 투쟁을 동반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반미나 국익 차원에서 그런 것이라면 시류에 따라 일관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민족주의/애국주의 경향만을 강화시킬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이번 정상회담 뒤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자동차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두고, 보수 언론이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경우 농업/서비스 분야도 같이 검토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는 정도다. 정부는 기존의 ‘재협상은 없다’는 원칙적 수준의 발언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지난 국회에서 서둘러, 직권 상정을 불사하며 한미FTA를 비준하면서 내세웠던 논리에 대해서는 그 어떤 비판도 나오지 않고 있다.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해서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제 현실은 미국을 압박하는 효과는 고사하고 한국 국회에서 비준 동의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오히려 커졌다.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투쟁
오바마의 이번 아시아 순방, 특히 한미정상회담을 바라보는 노동자 민중은 한편으로는 가슴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 전략적 수단이나 물리적 억제력이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바마 방한을 앞두고 아프간 재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를 한 바 있다. 작년과 같은 촛불시위를 들지 않더라도 용산, 쌍용자동차 투쟁을 통해 반이명박 전선을 형성하기도 했으며, 두 번에 걸친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게 패배를 안기기도 했다. 운동이 더디지만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므로 전혀 실망할 필요는 없다. 큰 틀에서 볼 때는 미국의 패권이 약화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배계급의 통치력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그 핵심은 바로 자본주의 자체가 지금 커다란 위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노동자 민중에게 정치적 기회는 계속해서 찾아올 수밖에 없다. 노동자 민중운동은 이런 정세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며, 그럴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 민중은 국가의 성장이나 발전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나 전략과 결별해야 한다. 오직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오히려 국가의 역할을 약화/대체하는 방식으로만이 사회변혁은 가능할 수 있다. 이건 결코 현실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를 개조하거나 개선시키는 것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전략에 비하면 훨씬 더 현실적이며, 훨씬 더 운동을 일으키는 데 유리하다.
지금 동북아에서 지배계급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단의 움직임과 변화를 보면서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EU나 남미블럭처럼 아시아 국가 사이에도 대항/지역블럭을 형성하는 것을 노동자 민중의 대안으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 전자는 패배주의이거나 지나친 단견이며, 후자는 기존 국가 패러다임의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핵문제나 한미FTA 문제도 국가 사이의 대립과 경쟁이나 일국 내 지배 정파 사이의 정책 차이로 접근하면 노동자 민중이 개입할 여지는 사라지고 만다. 아니 그렇게 되면 부르주아 국가와 지배계급의 논리 아래로 노동자 민중이 동원되는 사태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국가 사이의 대립이나 경쟁이기 전에, 또한 지배 분파 내부의 차이이기 전에 세계적 차원에서든, 일국적 수준에서든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에 그어지는 전선이다. 세계가 국가로 나뉘어 있지만 그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실내용은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노동자는 비록 국가에 속해 있지만 본질적으로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일원이다. 물론 노동자는 국가 사이의, 그리고 정파 사이의 대립과 갈등과 분열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독자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독이 될 수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약화되고 있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부상하는 것을 반겨야 할 이유는 없다. 일본이 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미, 중 헤게모니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기 위한 차원에 불과하다. 북미 사이에 대화가 재개되는 것은 대화가 단절되는 것보다 나쁠 것은 없지만 거기에 크게 기댈 것도 없다. 노동자 민중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운동과 투쟁을 일으키고 건설하고 조직하는 일이다. 거기에 기반 해 노동자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가 전 세계 반전투쟁에 결합하고 앞장 서는 것이 북핵문제를 노동자 민중의 입장에서 해결하는 가장 올바르고 빠른 길이다. 한미FTA 반대가 국익 차원에서가 아니라 반자본주의 맥락에서 이루어질 때 노동자 사이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