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봉수에서 류기혁까지
95년 이런 일이 있었다. 회사의 합의사항 불이행에 맞서 라인을 정지시켰던 당시 대의원 양봉수. 이를 이유로 해고당한 그는 노동위에 부당해고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적 소송 계류 중에는 조합원 자격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노사협상장에 대의원 자격으로 나타난 양봉수를 경비를 동원에 정문 밖으로 내던지는 폭력을 행사했다. 그것을 ‘일부러’ 방관했던 당시 노조집행부. 그해 5월 양봉수는 몸에 불을 붙이고 열사가 됐다. 그의 분노는 노조집행부의 ‘어용성’에게 향하고 있었다. 회사는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정확히 10년 뒤. 2005년 현대차 사내하청의 한 노동자가 업체로부터 일방적인 해고를 당했다. “월차도 못쓰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며 노조에 문을 두드렸던 류기혁. 그는 그해 6월 해고를 통보받았고, 혹시나 해서 신청한 재심에서마저 해고가 떨어졌다. 결국 그는 그해 9월 노조사무실 옥상에서 목을 매고 자결했다. 그리고 열사투쟁이 본격화된다. 그 때 현대차노조 집행부는 “열사가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열사냐 아니냐 논쟁이 중요하진 않다. 하지만 그때부터 열사투쟁에 함께했던 이들의 분노는 회사가 아니고 현대차노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시 회사는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누가 박유기 노조징계를 주도했을까
지난 20일 현대차 울산공장의 한 활동가 박유기가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로부터 정권1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당신은 앞으로 1년 동안 조합원으로서의 권리가 없다”는 결정이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 그보다 앞서 그 징계 결정 표결에 ‘찬성’을 들었던 사람들을 우선 짚어보자. 앞서 얘기한 양봉수 열사를 탄생(?)시킨 당시 노조집행부 사람도 끼어있다. 류기혁 열사투쟁에 찬물을 끼얹은 “열사가 아니다” 논쟁을 촉발시킨 당시 노조 집행부 쪽 사람도 역시 다수 있다. 한때 회사 노무팀의 법규부 소속이던 이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다수를 점한 상태에서 표결로 정한 ‘박유기 1년 정권’의 결정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있을지 없을지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긴다.
이번 징계의 발단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조창립기념품을 노조 조합비를 이용해 조합원들에게 나눠줬으며,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기념품에 ‘불량’이 많았고, 그 납품을 맡은 업체의 불신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 업체는 도중에 부도를 냈고, 노조의 보증을 믿고 그 업체에게 수억의 돈을 빌려준 은행은 손해를 봤다. 이 일로 인해 당시 업체선정과 은행대출을 위해 노조 보증을 주도했던 노조 총무실장과 업체 사장은 구속됐다. 사건이 이쯤 되면, 보수언론이나 검경은 노조집행부가 조직적으로 연루되어 무언가를 챙기려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퍼뜨리기 마련이다. 그것이 민주노조의 싹을 죽이려는 저들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깨끗했다. 법원조차도 “노조 총무실장의 대표자가 직접 불법행위를 저지른 바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판시하기도 했다. 당시 사건을 요약하자면 여기까지다.
▲ 21일 현대차 울산공장 본관 식당 앞에서 조합원들이 박유기 전 위원장 징계와 관련 민노회 대자보를 읽고 있다. [출처: 울산노동뉴스] |
3년이 다 지난 일로 중징계
그러나, 당시 박유기는 노조의 대표자였다. 노조의 대표자는 노조집행간부 임명권과 관리감독의 책임이 있다. 특히 사소한 무슨 일이라도 조합원들로 하여금 노조의 신뢰를 깨는 일이 발생치 않도록 해야 하는 무한책임자이기도 하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유기는 당시 ‘비리집행부’라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고 중도사퇴의 길을 택했다. 그것이 잘잘못 이전에 노조대표자가 가져야할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노조의 대표는 ‘권력’이 아니라 ‘무한책임의 자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자 회사는 주기로 합의한 성과금 50%를 떼먹겠다고 도발했었다. 마치 노조위원장 자리가 비어있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이에 박유기는 대의원대회에서 “사퇴를 선언했지만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며 만장일치 총파업을 이끌고 회사 항복을 받아낸 뒤 감옥에 갇히는 신세를 택했다. 2006년 말 비정규법 개악 저지를 위한 열 두 번의 민주노총 파업지침을 모두 수행했던 죄목까지 모두 감수했다. 출감 뒤 그는 현장조합원 곁에서 평범하게 출퇴근을 반복하며 일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3년이 다 지난 일을 놓고 박유기가 1년 정권이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외관상 보면 최근에 있었던 대법 판결 때문이다. 당시 업체에 노조 보증을 믿고 돈을 대준 은행에게 그 돈을 보증 서준 노조가 반환해야 한다는 판결이 최근에 있었다. 그 판결을 그대로 이행하는 방법으로 법원은, 노조 조합비로 은행이 떼였다는 돈을 대주고, 그 금액만큼 불법행위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여 받아내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도 해줬다. 법적 절차는 이렇게 단순하다. 그런데 이 단순한 대목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한다. 지난달 6월 현대차지부는 대의원대회를 개최해 단순한 법적 처리 과정조차 표결로 묵살했다. 당시 노조임원들이 은행이 떼인 돈을 다 갚아주고 당시 위원장인 박유기를 징계하자고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 대의원대회는 쌍용차 투쟁 연대파업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킨 대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당한 중징계가 지난 20일에 있었던 징계다. 모든 과정은 ‘표결’로 진행됐다.
이는 정파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박유기는 평범한 조합원이 아니다. 올 2월 그는 <전국현장노동자회>라는 전국현장조직을 주도하여 만들었고 그 조직의 대표직을 자임했다. 1천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정파 간 갈등으로 안 그래도 폐해가 심한데 무슨 또 조직이냐”고 주저하는 것을 설득했다. 종이호랑이가 되어가는 산별노조, 3년간 실패만 거듭하며 자본에 질질 끌려 다니는 금속노조를 보며 집행부 탓과 비난만 하고 있는 것만큼 무책임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 박유기다. 노동조합의 집행부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장이 튼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21세기 판 ‘현장파’임을 자임하고 나선 그는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눈엣가시’였으리라. 거대 산별노조 집행부가 제아무리 ‘반정부투쟁’을 떠들어도 현장 동요 하나 없는 그런 세상에, 현장을 재조직하는 시도야 말로 반대편의 이들을 자극할 만하다. 여기서 말하는 ‘반대편’이 특정 정파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는 말을 분명히 해둔다. 이 문제는 결코 정파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KT노조 탈퇴에 대해 쓰여진 글 중에 눈에 띄는 글을 발견했다. “정파가 KT 어용노조 키웠다”는 제목을 달고 쓴 KT노조 내부 한 활동가의 글이다. 상대 정파의 성장을 경계하려는 정파적 ‘본능’ 때문에 정파적인 문제가 아닌 본질적 문제를 놓고 정파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실태를 꼬집는 글로 읽었다. 당장의 이해득실에 좌우되는 가랑비를 계속 맞다가 옷이 통째로 젖는지도 모른 채 현장을 통째로 자본에 내준 사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되고 있는데, 사람이란 경험으로만 인식하는 법이니 끝까지 가봐야 후회를 하곤 한다.
제2의 KT노조를 만들지 않기 위해
그래서 나는 박유기 구제운동(?)에 나섰다. 조합원 대중의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민주노조운동의 대척점에 있는 자들, 또는 그 사이에서 정파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이들과 은밀하게 거래하거나 타협해서 될 일이 아니다. 광범한 조합원 대중과의 직접 대중정치가 필요하다. 광범한 조합원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기획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진리는 노조운동 처음에 배운 ‘교과서’인데 우리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박유기의 부당한 징계를 철회시키는 것은 박유기 개인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근원적인 문제임을 조합원들에게 호소하며 지지를 이끌어낼 참이다. 제2, 제3의 현대중공업과 KT노조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박유기라는 한 노동운동가의 조합원 징계에 숨은 은밀한 배경과 숨은 속뜻을 현명한 조합원 대중들이 먼저 판단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나 부결될 것이라고 봤던 2006년 산별전환을 역동적으로 성사시켜 준 조합원 대중 속에 길이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 박유기가 노조 사무국장으로 있던 때다. 당시 노조 취업비리가 유행했고, 민주노총은 그것만으로도 도덕적인 타격을 받았다. 보수언론과 검경은 당연히 현대차노조를 주목했다. 그리고 당시 박유기 부인의 개인통장에 거액의 돈이 있다가 나간 흔적을 발견하고 지역신문에 대서특필한 적이 있다. 어떻게 됐을까? 조합비 가압류가 유행하던 때(지금도 횡행하지만), 그것을 피하고자 노조 감사위원회의 승인 하에 박유기 부인 통장에 조합비를 잠시 예치시켰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조합원에게 공개했었다는 점을 발견한 검경과 보수언론은 그 뒤 꼬리를 감췄다. 헤프닝으로 끝난 사건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민주노조에 치명타를 안기려고 저들은 혈안이 되어 있음을 이 자리를 빌어 모두 되짚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