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껍질을 한 번 더 벗겨보자. 사실 이런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 싫겠지만, 잠시 1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명박 정권은 집권이후 자신을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정권’으로 불러 달라고 한 바 있다. 좀 더 소급해 보면 노무현정권도 한미 FTA 추진과정에서 이와 동일한 의미의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어느 정권이나 전매특허로 이용되는 이 언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신자유주의 좌파’인 노무현정권과 ‘신자유주의 우파’인 이명박정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의 이윤추구, 그것을 위한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를 이 사회 모든 영역의 관계들을 규범적으로 판단하는 유일척도로 삼아 그 관계들을 재편하는데 몰두했던, 지금 몰두하고 있는 정권들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노무현정권의 ‘시장권력론’이었고 이명박정권의 ‘비지니스 플랜들리’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그 자신의 외부에 다른 어떤 것의 존재 자체를 용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현존하는 세력 가운데 가장 독단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이념의 추종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위에서의 실용주의,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위협하지 않는 세력들과의 부분적 타협을 의미하는 것일 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세력들에게는 오직 배제, 억압, 차별이 가해질 뿐이다. 이들은 ‘더불어 사는 관계와 삶’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추구를 지고의 가치, 목표로 생각하는 그런 군상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격화된 권력으로서의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서가 아닌 사업가로서, 즉 자본의 전형적 논리인 “이후의 일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발상을 구현하는 관료기술적 행태로,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과 항의를 이른바 ‘정치가 아닌 치안(혹은 공안)’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이명박정권에게서 ‘공적 권력’으로서 최소한 요구되는 의미 있는 정치적 언술과 행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용역깡패의 고용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지불할지언정 철거민들의 최소한의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설자본과 직간접적으로 결탁하여 용산을 죽음의 지옥으로 내몰고 그 주검에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이고 탄압하는 지금 그 행태는 생생한 증거 아닌가.
둘째,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실용주의는 가시화된 권력의 향방을 추종하며 자신의 행보를 판단할 뿐 그 저류에 존재하며 재구성되는 사회관계들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기적으로 보이는 이벤트성 눈물은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노무현정권이 흘렸던 눈물이 그랬고 이명박정권이 가난한 자들 앞에서 흘리는 ‘행사성 눈물’ 또한 그렇다. 하지만 지금 그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수를 맞고 삶과 죽음의 높은 장벽에 좌절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그들이 실용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설왕설래하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 실용주의자들인 그들은 수구권력, 자유주의권력일 수는 있지만, ‘민주주의권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이용하여 현실의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관계들을 온존, 심화시키는 자들,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그들의 꿈과 희망을 빼앗는 자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정권이 그러하듯 ‘중도 실용주의자’ 황석영씨 또한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양 ‘스러진 제국’의 ‘대처여제’도 수십명의 광부를 죽였다며 ‘제도화된 5.18’이 아니라 핏빛 망월동이, 그것도 모자라 용산학살이 이명박정권의 실수였으나, 역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며 모독하는 것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격앙된 분노를 가라앉힌 후 확인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하여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은 그들이 실용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여전히 그들이 진보 운운하며 자신들을 민주주의의 본령인 것처럼 말하는 이 현실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저자로 알려진 황석영씨가 전향을 했든 어쨌든 그 자체를 머라 할 이유는 없다. 어떤 변화된 생각과 이념을 갖는 것, 새로이 어떤 정치적 행보를 걷는 것은 그의 선택사항이지 타자가 이래라 저래라 간여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쉽게 목도하고 있듯이 수구파시스트들에게 이끌리는 세력들이나 일삼는 천박한 발상이자 편협한 정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스러져가는 문학권력’을 이용하여 80년 망월동, 그것의 오늘의 표현인 용산과 같은 타인의 삶과 아픔을,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사는 그들을 희화하고 폄훼하고 있는 사실에 있다.
그렇기에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다. 비록 그의 행태가 모든 언론의 관심을 받고 그래서 의도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극대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또 하나의 올드 보이’가 던진 에피소드로 기록될 것이다. 왜냐구? 그의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투사’로서 그가 상징했던 시대는 장강의 물처럼 오래 전에 이미 흘러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세칭 ‘황구라’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아마도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 또한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가 됐건 현재 자신이 위치한 역사적 좌표, 그리고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해 그 자신만큼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구라’를 뒤늦게라도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퇴장하는 ‘역사적 문학인’의 고별사쯤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무언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그래도 한 시대를 가로질렀던, 이른바 ‘큰 이야기꾼’의 ‘마지막 구라’치고는 너무나 함량미달의 천박한 역사인식과 언술이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또 올 것이기에 그것이 무에 그리 아쉽더냐. 그가 불가피한 역사적 사건으로 치부한 그 용산의 아픔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 있기에 한 때는 그 또한 진정 자기의 것으로 품었을, ‘소박하지만 생명력 있는 망월동’ 또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난장이들의 아픔을 놓지 않는 ‘청년 조세희’가 있고 이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이 부끄럽다.’고 외치는 ‘거리의 시인 송경동’도 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많은 문학인들, 대중뮤지션들, 미술인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노래하며 그린다. 또 여기에는 이름 없는 또 다른 용산, 또 다른 망월동이 숨 쉬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종류의 올드 보이들’의 주기성 이벤트에, 그들의 회고조의 역사해설에 잠시라도 눈을 돌리지 말자. 지금 여기에 살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을 위해, 가난한 자를 도왔다는 이유로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과 수배 받아 가족과 떨어져 있는 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자. 그리고 죽은 자들이 아니라 진정 삶이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로 저 하늘과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이 땅 사이를 가득 채워 보자.
우리는 그 잘난 ‘중도 실용주의자들’일 수 없기에, 자본과 권력을 쫓지 못하는 부초이고 난장이이기에 아픔과 고통이 배어 있는 다른 목소리와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리는 ‘인간의 존재와 관계의 삶을 생각하는 그 어떤 민주주의자, 그 어떤 사회주의자, 그리고 그 어떤 꼬뮨주의자들’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념을 넘어선 실용주의자’라는 언술로 치장한 채, 노동의 땀과 피로 일군 이 엄청난 생산력을 가지고도 이 사회를 상처투성이의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은 ‘신자유주의의 노예’인 그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가 참조하는 이념들이 인간 존재와 그 관계적 삶을, 그것을 매개로 한 생태적 삶을 위협하고 파괴한다면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히 정중히 말할 수 있다. 잘 가시오, 실용주의자여, 아니 이 시대의 모든 ‘올드 보이들’이여!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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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 연구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