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명박에 대한 숭고한 분노를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가 근본적 분석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표피적 분노로 그치는 한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감정적으로 분노한 이들을 이성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 분석을 통한 문제 제기 없이 표피적 분노의 표출만 이어진다면, 참극은 계속될 것이며 학살은 반복될 것이다.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대책위 홈페이지(http://mbout.jinbo.net)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눈에 들어온다. “공안정권”, “살인정권”, “이명박 살인정권”. 인터넷에 올라오는 익명의 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단체들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들까지도 대부분 정권을 규탄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참사의 책임을 이명박 정권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 참사에서도 역시 ‘문제는 이명박이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문제라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던데, 문제는 ‘누구’에게가 아니라 ‘무엇’에 있다. 그 ‘무엇’은 결국 ‘자본주의’라는 ‘체제’ 자체이다. 즉 ‘정권’이 문제가 아니라 ‘체제’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권’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역시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며 조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정권에도’ 문제는 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라서, 결과적으로는 하나 마나 한 말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정권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 ‘정권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굳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가장 쉬운 대응 방법은 정권을 ‘비난’하는 것이다. ‘비난’에는 별다른 과학적 분석이나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말하면서 감정을 배설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것은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며, 그만큼 대중적인 파급효과도 크다.
하지만 ‘비판’은 ‘비난’과 다르다. ‘비판’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체계적인 과학적 분석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비판’에는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요구된다. 즉 비판은 귀찮고 어려운 일인 동시에 또한 피곤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쉽게 ‘비난’하지만, ‘비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2008년 여름의 뜨거웠던 촛불의 열기를 돌이켜보자.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집단은 촛불을 들고 있는 대중의 물결을 ‘대중지성’이니 ‘집단지성’이니 하는 말의 성찬으로 치켜세웠다. 그러나 대중은 이명박을 ‘비난’했던가, 아니면 ‘비판’했던가. 설령 ‘비판’했다고 하더라도, 그 ‘비판’의 대상이 겨우 이명박이라는 개인 혹은 정권에만 그친 것을 과연 ‘지성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굳이 2008년 여름의 기억까지 끄집어낸 까닭은 그때의 촛불과 지금의 촛불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촛불의 주된 구호는 “명박 퇴진”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과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은 이명박이라는 개인 혹은 정권에만 있는가? 이명박이라는 개인 혹은 정권만 물러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에 대한 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절대로 아니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이든지 지난 노무현 정권이든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정권’은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데 복무한다. 즉 ‘정권’의 역할은 자본이 임금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자본이 도시빈민들의 삶의 터전을 철거할 수 있게 돕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나라당은 민주당보다 그 도우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판단되어 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판단을 한 사람들도, 그들에게 정권을 쥐어준 사람들도 결국 대중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고 떠들어대는 모든 정치 세력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를 살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지껄이는 모든 정치 세력은 저마다 자신들이 더 가혹한 학살자임을 자처하는 것이다. 즉 대중은 선거를 통하여 자신들을 보다 철저히 짓밟고 처참하게 짓이겨줄 자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중이 이런 자학적인 선택을 하는 까닭은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라는 기만적인 체제에서 선거라는 서커스가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정치활동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대중은 몇 년에 한 번씩 있는 선거를 통해서 국가의 모든 권력이 자신들로부터 나온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그렇게 대중은 자신들을 학살할 세력을 선출하고 그것을 승인한다. 이것을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라고 부른다.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되고 승인된 학살자들은 ‘법’에 의거해 ‘원칙과 절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국가 경제를 위협하며 ‘떼법’을 일삼는 노동자를 때려죽이고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며 ‘불법폭력시위’를 하는 철거민을 살해한다. 그러면 그에 이어 이른바 지식인들과 사회 원로,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불법폭력시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니까 시위를 하더라도 ‘합법평화시위’를 하라고 점잖게 타이른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지식’과 ‘도덕’이며, ‘종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의식은 지배 계급의 의식이라는 말은 이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검찰은 경찰의 용산 철거민 시위진압이 지휘계통에 따른, 즉 ‘원칙과 절차’에 충실한 ‘법’ 집행이었기 때문에 형사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한다. 오히려 검찰은 화재의 책임이 철거민들에게 있다며, 자본을 수호하는 공권력에 감히 대든 철거민들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체제’를 보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법’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법’은 오로지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흔히 ‘과잉진압’이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는 ‘과잉진압’이 아니라 ‘진압’ 자체가 문제라는, 즉 ‘진압’ 자체가 이미 ‘과잉’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그 어느 정권이 ‘과잉진압’을 하지 않았던가? 아니 ‘과잉진압’이 아닌 ‘진압’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도대체 생존권과 주거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의 피맺힌 절규가 왜 ‘진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정말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과 주거권을 박탈하는 자본과, 자본을 위한 폭력 집단인 ‘공권력(경찰, 군대)’과 ‘사적 폭력(이른바 ‘경비업체’라 불리는 용역깡패들)’이 ‘진압’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명박 정권을 ‘공안정권’이라 부르며 이것이 단순히 이명박 정권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지난 정권들, 특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살해당한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의 수를 헤아려 보아야만 한다. 이른바 ‘민주정권’에서는 지금과 같은 공권력의 폭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희생당한 영령들을 모독하는 것이며,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이명박 정권은 공안정권”이라는 시답잖은 소리에 너무 큰 무게를 두지는 말자. 이명박 정권이 공안정권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정권은 공안정권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만을 겨냥하는 그런 비난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명박이 아니라 정동영이나 문국현이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용산에서의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고 진보신당이 원내 1당이 되어도, 아니 심지어는 오세철이 대통령이 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원내 1당이 되어도,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살인정권”이라는 문제의식보다 ‘살인체제’라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국회가 바뀌어도,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용산 참사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정세 조건을 무시한 정치적 판단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고 더욱 활발히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시켜 나아가야 하지만, ‘자본주의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 당장의 요구사항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의 빛나는 전망을 가지고 활동해야 하지만, 급진적인 구호만 반복하여 외친다고 해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실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망과 함께 지금 당장 현실적 쟁취 가능성을 갖는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대중의 동의를 확산시켜 나아가야 한다.
이를테면 헌법을 개정하여 생존권과 주거권이 소유권과 재산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법’은 오로지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말해놓고서, 이런 주장을 하자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헌법 개정 운동은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며, 지금의 ‘법’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헌법 개정과 함께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도입을 요구해야 한다. 이미 독일에서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도입에 대한 논의가 좌파당, 녹색당, 심지어 사민당에서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중적으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을 끊임없는 생존경쟁으로 내몰면서 낙오자는 도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살인체제’이다. 우리는 이 ‘살인체제’를 끝장내야 마땅하지만, 체제를 끝장내는 것은 소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선 비록 체제 내에서라도 자본주의적 방식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체제에 균열을 내야 한다. 그를 통하여 점차 대중의 동의를 확산시켜 나아감으로써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해야 한다.
혹자는 이러한 요구를 개량주의적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위의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삶을 개선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을 냄으로써 마침내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하자는 전략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개발보다 생명을, 이윤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살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살인적인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연대’를 말함으로써 대중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의 도입 요구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빈곤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철폐의 대상이다. 빈곤을 해결할 수 없는 체제는 철폐되어야 하며, 생명을 철거하는 체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분노의 표출이나 감정의 배설만으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는 이명박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의식을 확산시켜 나아가야 한다. 또한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대중으로부터 형성하기 위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당면 요구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자본주의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극단적인 발상이라는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자본을 위하여 인간이 희생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본주의가 극단적인가, 그런 자본주의를 폐지하자는 요구가 극단적인가.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삼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이다.”
1987년을 승리라고 믿었던 우리는, 2002년 노무현의 집권과 2004년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이 진보라고 믿었던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란 것일까. 2009년, 이 땅의 수많은 난장이들은 무엇을 쏘아 올려야 하는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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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은 님은 인하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