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을 잡아라
산업은행이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지분 인수에 나섰지만 상황은 그다지 녹록치 않은 듯 하다. 애초 50%를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하려다 리먼의 부실 규모에 대한 견해차로 협상에 실패한 후, 이제는 컨소시엄을 구성해 25%를 직접 인수하고 나머지 25%는 시장에서 매입하기로 방침을 바꿨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리먼브라더스는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유동성 위기에 몰려 40억 달러의 추가 상각을 해야 하며 오는 18일 발표되는 3/4분기 실적이 사상 최악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드러난 부실만 380억 달러이며 500~800억 달러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경고가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지난 8일에는 미 금융당국이 주택보증대출업체인 패니메와 프레디맥에 2,00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공적자금을 투입한다는 호재에 힘입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등 주요 금융주들이 큰 폭으로 상승한 반면 리먼브라더스 주가만 홀로 13% 하락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의 칼럼니스트 빌립 보링은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는 어리석은 일”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영국의 HSBC와 일본의 미쓰비시UFJ도 리먼 인수에 뛰어들었다가 잠재 부실 규모를 확인하기 어려워 포기하는 마당에 왜 유독 산업은행만 리먼 인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일까?
한국투자공사 1조 원, 국민연금은 5조 원 날려
산업은행측은 “리먼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지금이 인수할 적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투자적기 운운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지난달 13일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은 전세계 100대 주요(투자)은행들이 글로벌 신용경색으로 입은 손실과 자산상각 규모가 이미 5,000억 달러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IMF는 총 손실 규모가 8,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고, 골드만삭스는 1억 2천만 달러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씨티그룹이 1만3200명, 독일 코메르트방크가 9천 명을 감원하는 등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수십만 명의 금융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거나 자리에서 쫓겨날 운명에 처해 있다. 미국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는 파산위기를 맞아 JP모건에 헐값으로 인수됐다.
한편, 올 초 메릴린치에 20억 달러를 투자한 한국투자공사(KIC)가 이미 10억 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고 유재중 의원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올 상반기에만 주식투자로 5조 원을 날렸다고 한다. 전 세계적 금융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부실규모가 얼마만큼 확산될지 아무도 그 끝을 단정하기 어려운 오리무중 상황에서 투자적기라고 주장하는 짓은 무모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산업은행 민영화와 글로벌 플레이어
산업은행이 몇 달째 리먼 인수에 고집을 피우는 데는 민유성 산업은행장이 2005년부터 올해 초까지 리먼브라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역임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위기에 처한 리먼이 ‘한국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외환보유액이 감소하고 단기외채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환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은 낮다”며 계속해서 한국 시장에 러브콜을 보내는 게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민유성 은행장은 산업은행 민영화와 금융산업의 글로벌 플레이어를 육성하기 위해 교체투입된 선수기 때문에 그가 “5년 내에 아시아 선도 투자은행으로 도약할 것” “앞으로는 행장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행원이 나올 것”이라고 설레발을 떤다고 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볼 필요는 없다. 씨티은행, 모건스탠리, 살로먼스미스바니, 리먼브라더스 등에서 M&A 전문가로 성장해 온 그가 산업은행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그를 산업은행장 자리에 앉힌 이명박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가 더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산업은행의 리먼 인수 협상에 대해 “공적기관이 과도한 부담을 안는 주체가 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산업은행의 주거래기업들이 유동성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데 해외 M&A에 실탄을 써 버린다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 신용위기가 드러난 것 이상으로 심각하며 정부의 ‘금융화 프로젝트’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지켜보던 시장주의자들이 한마디 거든다. “해외 투자자들 보기 부끄럽다. 이럴 거면 앞으론 ‘글로벌 플레이어’ 운운하지 말고 산업은행장 자리에 말 잘 듣는 관료나 앉히라”고. 금융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기로 해놓고, 산업은행의 정책금융 역할이고 나발이고 간에 민영화해서 세계적인 투자은행 만들자고 해놓고, 우리도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화끈하게 놀아보자고 해놓고, 이제 와서 왜 딴소리냐 이거다.
금융산업은 ‘선진화’를 타고
참여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가 이명박 정부에 와서 ‘금융산업 선진화’로 재탄생했다. 경제정책, 특히 금융정책에 있어서 前-現 정부의 차이점은 많지 않다. 우스갯소리로, 노무현 정부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해서 국민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면 이명박 정부는 “우측 깜빡이 켜고 ‘강부자’만 태운 채 냅다 달려” 국민들을 소외시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금융위원회가 말하는 금융선진화는 “금융산업이 단순히 다른 산업에 대한 지원 산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新성장동력으로서 우리경제 선진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비금융주력자의 은행 지분 소유 규제를 완화하고(은산분리 완화) 심지어 연기금과 사모펀드의 은행 지분 소유를 추진한다. 비은행지주회사에 대한 규제도 완화한다. 이를 두고 경제개혁연대는 “재벌하기 좋은 금융 환경”이라고 평한다. 대기업들의 금융시장 점유율은 2005년 3월 총자산 기준으로 생명보험 75.2%, 손해보험 47.6%, 증권 35.7%, 신용카드 63.9%에 이르고 있으며, 삼성그룹의 경우 총자산 217조 원 중 금융계열 자산이 133조 원으로 58.6%에 달한다. 국내 금융기관들의 총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금융선진화를 통해 집중적으로 혜택을 받는 이가 누구겠는가?
정부의 고민은 ‘글로벌 플레이어’에 오래 멈춰 서 있다. 미국의 3대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등 3개 사의 평균 자산은 7,620억 달러에 이르는 반면, 한국의 3대 증권사인 삼성, 대우, 우리증권 등 3개 사의 평균 자산은 87억 달러로 1.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둔 상황에서, 정부가 원하는 대로 간접금융시장에서 직접금융시장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매물이 필요하고 자본은 좀 더 집중되어야 하고 자본회전 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이런 연유로 (금융)공기업은 민영화될 수밖에 없고, 경부운하 토목공사가 필요하며, 연기금이 주식시장에 동원되어야 하며, 대기업들의 금융산업 진입과 사업확장이 용이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은행은 ‘글로벌 플레이어 육성’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민영화 후 투자은행으로 변모하는 시나리오가 제출되는 것이다.
금융공기업 민영화로 양극화 해소?
금융위원회는 산업은행 민영화의 근거로 “정책금융과 상업금융이 혼재되어 시장마찰이 확대되고 민간 금융의 발전도 제약하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소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산업은행은 1954년에 설립된 국책은행으로서 50년대 전력, 석탄 등 기반산업에 대한 재정자금공급을 시작으로 60~70년대 개발금융, 80년대 장기설비금융, 90년대 기업금융 등 시대별로 변화된 역할을 수행해 왔다. 2006년 12월 기준으로 104조의 총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산업은행은 2007년 27조 원의 산업자금을 공급했고 중소기업에는 7조 3천억 원의 자본을 지원했다.
글로벌 금융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정책금융을 최소화하고 국책금융기관을 민영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소기업 경기가 좀처럼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은 다시 심화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의 발표에 따르면, 200대 기업 중 30대 그룹 계열사들의 자산비중은 무려 70%에 육박한다. 일부 중소기업들은 통화옵션거래인 KIKO계약에 묶여 위기에 처해 있다. 산업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양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을 산업은행 민영화, 기업은행 민영화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정부 금융당국자들은 답을 주기 바란다.
英 노던락은행 재국유화... 美 패니메 프레디맥 공적관리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사태에 따른 신용 경색 영향으로 지난해 9월 영국의 제 5위 모기지은행인 노던락(Northern Rock)은행에서 1866년 이후 처음으로 예금인출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올해 2월 영국 정부는 국유화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작년부터 올해 7월까지 자산규모 320억 달러의 모기지대출업체 인디맥을 비롯해 8개의 금융기관이 부도를 냈고, 올해 3월에는 모기지 대출업체인 베어스턴스가 JP모건에 헐값 매각됐다. 한 국내 경제일간지는 장외파생상품시장에서 베어스턴스가 얽히고 설킨 스와프 거래가 무려 10조 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국 경제 규모가 14조 달러임을 감안할 때 71% 수준이고 메릴린치, 골드만삭스, 리먼브라더스 등 다른 투자은행들이 만든 거래를 포함하면 미국 경제 규모의 몇 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어 지난 7일에는 주택보증대출업체 패니메와 프레디맥에 대해 미 금융당국이 2000억 달러 규모의 공적관리 체제에 돌입했다. 38년에 설립된 패니메는 68년에 민영화 된 후 꼭 30년만에 다시 국가 관리 모드로 전환된 것이다. 1980년대 급속한 금융화를 견인해 온 영국과 미국이 20~30년 만에 글로벌 금융위기의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어찌 보면 필연적일 수 있다.
런던, 뉴욕, 홍콩, 싱가폴, 쥬리히,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시카고, 시드니, 동경
이번 금융위기를 통해 시장 참여자들과 정부 관료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올해 5월 강연회에서 “시장참가자들의 자율이 지나칠 경우 서브프라임 위기와 같은 시장불안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이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위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시장자율이 지나치면 위기와 불안을 초래한다는 인식을 한 건 다행인데, 이 또한 감수하고 돌파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안타깝다. 독일은 리히텐슈타인 공국 등 조세피난처에 대한 탈세조사에 착수했고, 호주는 국부펀드 규제를 위해 6개의 심사원칙을 발표한 바 있다. 미국과 영국은 부실 금융기관 재국유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원유시장 투기세력을 색출해내고 불안정한 파생상품을 규제하자고 나서고 있는데 “글로벌” “시장자율”만 외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런던, 뉴욕, 홍콩, 싱가폴, 쥬리히,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시카고, 시드니, 동경.
올해 3월 런던시티공사가 발표한 국제금융센터지수의 경쟁력 순위다. 서울은 상해, 오사카, 북경에도 못미치는 53위다. 이명박정부가 말하는 금융선진화가 동경을 제치고 10위 안에 드는 것이라면 일찌감치 그 꿈을 접는 게 좋겠다. 금융산업 발전의 제1과제는 금융소비자를 보호하고 금융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며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지 글로벌 플레이어를 만들어서 세계시장을 휘젓고 다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불균형, 중소기업-대기업 양극화,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금융소외자 등 산적한 문제를 외면한 채 ‘산업은행 민영화, 글로벌 플레이어 육성’에 핏대 올리는 그들의 입방아에서 우울한 미래를 본다.
- 덧붙이는 말
-
공공부문 사유화저지 공동행동 연속기고 - "팔려가는 공공부문”을 연재합니다. 정부의 방송장악 시도가 이어지고 있고, 공기업 선진화 방안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상수도 민영화와 에너지 공기업의 민영화 계획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과연 정부는 공공부문을 어떻게 민영화 하는 것일까? 선진화, 경영효율화는 민영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각 영역별 민영화(사유화)의 현재 상황과 정부의 의도를 짚어보는 연속 기획을 <공공부문 사유화저지 공동행동>과 마련했습니다. 이 글은 미디어스, 참세상, 프레시안, PD저널과 동시게재 됩니다.<편집자주>
공공부문 사유화저지 공동행동은 물사유화저지공동행동, 미디어행동, 보건의료단체연합, 범국민교육연대, 빈곤사회연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입시폐지대학평준화범국본 등 공공부문의 강화를 위해 200여 노동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