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1만 여명의 시민을 모아 ‘만민공동회’라는 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당시 요구는 러시아의 영도 조차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기지 철수, 한러은행 철거,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자주독립강화 등이었다. 독립협회 활동가들은 헤이그에서 산화해 간 이준 열사 같은 이도 있었지만 윤치호 서재필 등 대부분 훗날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상한 일은 다음부터다.
이틀 뒤 1898년 3월 12일, 독립협회가 직접 지도하지 않았는데도 수 만 명의 서울시민이 서울 종로에 모여 제2차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놀란 정부는 뒤늦게 대외 외교에 나서 러시아의 요구를 철회시키고 한러은행과 군사교관, 재정고문도 철수시켰다. 그 결과 1898년 4월부터 잠시나마 한반도를 둘러싼 세력균형이 형성됐다.
독립협회는 1898년 4월부터 의회설립을 꾸준히 요구해 11월 2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의회인 ‘중추원’를 공포에 이르렀다.
친러파는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려는 게 아니라 황제를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기도한다는 전단을 독립협회의 이름으로 시내에 뿌렸다. 놀란 황제는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11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 다시 수구파 정부를 세웠다.
서울시민들은 11월 5일부터 만 42일간 철야시위를 하면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독립협회의 복권과 의회설립을 요구했다. 시민들은 대한문 앞(지금 촛불집회가 열리는 바로 그곳)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남녀노소없이 나와 서로 주먹밥을 나눠 먹으면서 시위했다. 8살짜리 아이도, 과부(寡婦)도 나와 즉석 연설했다. 1898년 11월 21일 수구파는 보부상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많은 부상자를 냈지만 시민들을 흩어지지 않았다.
고종은 주한일본공사와 결탁해 1898년 12월 25일 지도부 430명을 일시에 체포하고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시켰다. 고종은 이후 관료만 정치를 논하고 백성들의 정치집회와 언론, 결사를 금지시켰다. 이후 나라는 망했다.
딱 110년 전의 일이다. 2008년 6월 서울 시민들은 1898년 초겨울처럼 40일 넘게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전제 군주와 현 정부, 보부상과 극우단체, 촛불집회와 만민공동회, 대한문 앞과 시청 광장, 어쩜 이리도 똑같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은 어떤 역할도 못하고 그저 놀라 사태를 분석하기에 바쁘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중앙일보 6월17일자 27면 기고에서 이명박 정부를 향해 “보수의 기조를 유지하더라도 진보적 요구들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조 교수 글 바로 왼쪽엔 중앙일보 문창극 주필의 ‘정부다운 정부’란 칼럼이 있다. 문 주필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포퓰리즘에 끌려다니지 말고 “정당한 권력의 권위를 회복하라. 질서와 원칙을 지키라”고 주문한다. 전경을 동원해 어서 빨리 촛불을 짓밟으라고 악을 쓰고 있다.
▲ 중앙일보 6월17일자 27면 |
조 교수 글 아래엔 1000일 넘게 싸우고도 거리를 헤매는 이 땅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를 범법자로 매도하는 기륭전자 회사의 의견광고가 큼직하게 실렸다. 1000일 동안 죽는 것 빼고 다 해봤다는 해고자를 파렴치범으로 내모는 광고다. 한겨레신문에도 같은 광고가 실렸다고 변명할 순 없다.
조 교수가 아무리 선량한 뜻으로 중앙일보에 기고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거리에 나와 시민들이 조중동을 향해 뭐라고 하는지 똑똑히 들어야 한다. 그 소리를 듣고도 삼류 찌라시 보다 못한 종이쪼가리에 글을 쓸 순 없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지식인의 역할을 되짚어 본다. 아무 역할이 없었다. 대한제국은 망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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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선실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