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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들은 왜 그토록 좌고우면 하는가

[기고] ‘진보의 재구성’, 진보신당에 대한 짧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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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총선 이후 소강상태에 있던 ‘진보의 재구성’을 둘러싼 논의들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만 총선 이전과 비교할 때 오히려 그 탄력성은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첫째, 진보신당연대회의(진보신당)가 총선 전 역설했던 ‘실질적 제2창당’ 약속이 힘을 잃고 있다. 진보신당을 리모델링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라는 의구심이 일반화되고 있다. 둘째, 총선 전 ‘진보의 재구성’을 외쳤던 한국사회당, 초록정치연대의 모습이 가시권에서 멀어졌다. 물론 이들 두 세력은 초록에 공감하며 서로 교류의 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사회당의 생동력이 빈약하고 초록정치연대가 해산의 수순을 밟고 있어 진보의 재구성에 탄력을 불어 넣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이것은 민노당으로부터 먼저 탈당한 사람들이 조직한 ‘새로운 진보신당운동그룹’의 무원칙한 해소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문제이다. 여하튼 진보신당이 초기에 중요한 논의의 파트너로 생각했던 이들 그룹들은 이제 점차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있다.

'제도정치와 운동의 변증'을 놓아버린 진보신당

이러한 현재의 상황과 관련하여 필자는 4.9총선 이전에 진보신당의 ‘2단계 창당론’이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것을 진보신당의 선거결과에 종속시킬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리고 민노당의 선도 탈당그룹에게 당시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과 같은 리더들의 민노당 탈당 여부에 집착하지 말고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힘을 활성화시키고 여타 세력들, 특히 ‘계급 및 비계급좌파’와 대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주문한 바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보신당의 창당과 총선과정을 거치며 이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숙고, 실천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의 이 지지부진한 상황의 거의 모든 책임은 진보신당이 져야 할 몫이다. 혹자가 말하듯 ‘촛불의 힘’이 거세지는데도 진보신당에 대한 의미 있는 대중적 지지율 변화가 감지되지 않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그것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2단계 창당론’을 지적하고 싶다. 이른바 2단계 창당론은 진보정치라면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제도정치와 운동정치의 변증’을 놓아버렸고 준비기일 수도 있는 그 압축적인 시간으로부터 대중의 역동성을 분리, 약화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이러한 퇴영적 흐름과 달리 새로운 결의와 제안들 또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힘」 등 ‘계급좌파’의 행보가 그 이전보다 속도를 내고 있다.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의 건설을 주장하는 이 흐름이 그동안의 변화된 조건을 반영하여 어떤 새로운 가치와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융해하면서 어느 정도의 속도로 그 목표를 밀고 나아갈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물론 객관적으로 이 과정은 순조롭지 않겠지만,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흐름이다. 또한 단병호씨 등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계급적 대중정당’ 건설을 제안한 바 있다. 여기에는 노동자당건설추진위원회(노건추)가 호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의 힘」 등이 진보신당의 우경화를 말하며 일단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을 천명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그 우경화에 우려를 표하면서도 진보신당 등 모든 정치세력들이 참여하는 연석회의를 제출하며 반응을 살피고 있는 중이다.

진보신당은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가치를 가능케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향후 ‘진보의 재구성’은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아마도 지금의 흐름이 고착된다면 서로 각자의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 진보신당의 경우, 자신에 호의적인 세력들을 모아 외연을 확장하는 것이 아마도 유일한 경로가 될 것이다.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이른바 ‘계급좌파’, ‘비계급좌파’ 등이 아니라 이미 진보신당 행을 택했거나 마음을 굳힌 한국사회당 출신 일부와 개인화될 초록세력 일부, 그리고 온건한 시민운동 쪽에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경로는 4.9선거 이전에 자신들이 공언한 ‘실질적인 제2의 창당’이라 볼 수 없기에 그 정당성의 빈곤으로 인하여 진보신당 내부에서의 반발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이런 판단을 하는 이유는 진보신당이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가치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것들 사이의 관계, 그것이 어떻게 서로 어우러져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미 있는 고민의 흔적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것들은 단순 나열된 항목들에 불과하다. 이것은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을 말하면서도 그동안 제도 안에서 정당 활동을 하거나, 혹은 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와 접촉을 강화해온 행태 속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물론 그와 같은 행태조차도 매우 빈곤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와 같은 가치들이 제도 안에서의 활동만으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설사 성과를 낸다고 해도 어느 정도 지속될 수 있을까. 결국 제도정치에의 과도한 집착은 이들 가치들 사이의 긴장을 더 격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진보신당은 과연 알고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 가치는 진보신당의 특허품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정치세력들도, 민주노동당도, 여타의 급진적 시민사회운동들도, 그리고 이른바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도 말하고 있는 목록들이다. 그렇다면 진보신당과 이들 세력이 말하는 것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이들 가치의 융합이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코뮌주의 위에서만 가능하며 바로 그럴 때만이 서로의 긴장관계로부터 해방되어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해소, 극복은 핵심적이며 ‘사회주의’는 단지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관계를 재조직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꼬뮌주의’의 표현이라는 맥락에서 고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부르주아정치의 헤게모니를 반영하는 ‘운동정치냐 제도정당정치냐, 직접민주주의냐 간접민주주의냐, 절차적 민주주의냐 실질적 민주주의냐’ 등의 이분법적 대립 틀을 넘어서는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대중참여가 다차원적으로 모색되고 활성화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장기과정이 될지, 아니면 몇 개의 단계를 거칠지 알 수 없는 ‘이행’의 과정에서 더욱더 요구되는 대중의 힘을 축적, 심화, 확대시키는 기제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점들에 대한 진보신당의 인식은 매우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 가운데 하나는 진보신당이 지난 선거에서 지지표 획득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는 가치들을 기계적으로 엮어 전면에 내세웠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선거 이후 ‘실질적인 제2의 창당’ 과정에서 제반 정치세력들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여백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가운데 무엇일까. 안타깝지만 이른바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이후 지속된 좌고우면의 미적지근한 정치적 행보를 염두에 둘 때, 후자보다는 전자의 해석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 진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금 진보신당이 ‘진보의 재구성’을 자당의 리모델링 수준에서 고민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보신당의 향후 행보를 이처럼 미리 단정 짓는 것이 과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필자의 생각이 단지 기우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진보신당이 내세운 가치들의 융합을 가능케 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코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성, 역동성에 의해 추동될 수밖에 없는데, 지금 진보신당 안에서 이러한 자발성, 역동성은 점차 소진되거나 눌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혈기왕성했던 ‘직접행동’은 거리에서 강화되는 ‘촛불의 힘’과는 반대로 진보신당 안에서는 그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진보신당에서 필요한 것은 심상정, 노회찬씨 등 대표단의 말이나 행동, 그 당에 결합한 명망가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진보신당의 근간인 일반당원들의 절절한 목소리인데도 말이다. 바로 이들의 목소리가 진보신당의 미래는 물론 ‘진보의 재구성’을 조건지을 중요한 열쇠인데도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 진보신당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는 세력은 오히려 ‘계급좌파’와 ‘비계급좌파들’이다. 비록 이들은 그 적실성 여부와 무관하게 과거 좌파운동의 모든 오류를 안고 그에 대한 비판을 감수하고 있는 상황이지만–사실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은 진보신당 안의 이른바 ‘평등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자본, 생태, 평화, 소수자, 연대 등의 관계정립 문제를 자신의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있다. 이것이 이들이 지닌 잠재적 생동력이다. 물론 이러한 생동력은 이들 또한 자기 스스로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꼬뮌주의의 해소 및 극복의 대상이라는 점을 더욱 내재화하면서 부르주아적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는 이분법의 정치 틀을 끊임없이 전복시키고자 하는 실천을 전제로 할 때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신당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스스로 공언한 ‘실질적인 제2의 창당’이라는 자신의 결의조차 절절히 느끼지 못하는 진보신당이 자신들 또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꼬뮌주의의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얼마나 인식, 체현하고 있을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만일 그것을 인식, 체현하고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지금과 같은 퇴영적인 정치행태를 되풀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 나아가 ‘계급좌파’나 ‘비계급좌파’의 발상과 행태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들의 제기한 가치들이, 그리고 지금 자신들이 걷고 있는 정치적 행보가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어떤 연관성과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그것에 조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긴장을 유발시키는 것인지 더욱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기계적 결합이 언제, 어떻게 끊기어 파열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맨손임을 말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들이라면, 왜 그토록 좌고우면하는가. 얼마나 더 오래 리더로서의 자리를 지키며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다른 한편 촛불의 자발성과 역동성에 그토록 찬탄을 보내면서도 언제까지 ‘명망적 리더들’의 저 우유부단함을 참고 기다릴 작정인가. ‘직접행동’은 기존의 고착화된, 혹은 그러한 경향을 강화시키는 그 어떤 경계들을 넘어 나아갈 때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말

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과 연구교수입니다.

  • 짧긴하구려

    "짧은 생각" 이라더니
    글은 길고 생각은 정말 짧다는 느낌~~
    "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코뮌주의 "
    이 긴글에 달랑 이거 둘만 나열해주시다니,,,,,,,,,,

  • 나루터

    근본적인 문제제기..그러게요. 평등과 생태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진보신당이 그런 그릇이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입니다.

  • 재미있군

    '진보신당'. 그들의 노골적인 사민주의, 부르주아 정당화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지도자의 좌고우면이 문제인가요? 하기야 이광일 씨의 관점에서야 그렇겠지만요.